드라마틱한 이유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파리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해서 떠난건 아니다.
한 달 내내 오던 비도 거의 그쳤고, 범람했다고 뉴스에서 떠들썩대던 센느 강 수위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첫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미팅은 9일 뒤였다.
그 전 부터도 파리에서 특별히 할 일은 없었고, 앞으로 미팅 날짜까지도 뭐 딱히....
일 할 땐 휴일 하루가 아깝고, 당장 며칠이라도 주어진다면 어디론가 훅 떠나고 싶더니, 막상 무한대 휴일이 생기니 집 구석에 쳐박혀 못난 짓은 혼자 다하고 있다.
'떠나고 싶다며? 떠나자!'
갑자기 떠나려니 비행기 티켓값은 이미 치솟았고, 오랫동안 떠날 수 없으니 멀리가는 건 포기.
기왕이면 따뜻한 곳으로, 포르투갈의 포르투(Porto) 와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Andalucia) 이 후보에 올랐다.
파리에서 떠나는 비행기 티켓값은 두 곳 모두 왕복 100유로 내외.
인터넷 한 시간 뒤적이니 두 곳 모두 일주일동안 할 거리, 볼 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래, 포르투!'
한 번 도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한 70-80개국 정도는 가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한 번도 가본적이 없으니, 이번이 기회다!
결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날씨를 체크했는데, 일주일 내내 비!
'그래, 포르투는 나중에 가고 안달루시아로 가자.'
그런데 거기도 비!
그것도 매일 비!
심지어 로마에도 6년만에 눈이 왔다는데, 굳이 이런 기이한 현상을 비행기타고 외국가서 체험할건 아닌것 같아, 이럴바엔 그냥 가까운 국내여행을 가기로.
그렇게 남쪽으로 떠나게 되었다.
기차예약, 숙소예약, 도시간 버스예약 까지 하루만에 모두 마치고,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10년 넘은 전세계 론니플래닛 파일 중 남프랑스 (프로방스, 꼬뜨다쥐르) 파일만 아이패드에 옮기고, 작은 가방하나 싸서, 그렇게 어쩌다 마르세유!
# 남프랑스로 떠나는 기차
갑자기 떠나는 여행이 남프랑스라니.
여행가방을 끌고 마르세유 행 TGV(떼제베, 프랑스 고속기치)에 오르는 이런 호사로운 시츄에이션에 무슨 드라마틱한 이유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일주일 뒤에 실업급여를 받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관련자와의 미팅'을 위해 돌아와야 하는 이유밖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말이 국내여행이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 가는 것 보다 비용은 더 많이 든다.
기차비가 비행기 값과 비슷비슷한데다가, 숙박비나 식사비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보다 더 비싸다.
생각해보니,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남프랑스 중 첫 도착지로 마르세유를 택하고, 모든 예약을 반나절 만에 마치고, 밤 늦게까지 인터넷으로 예약한 티켓을 프린트하고 짐까지 싸느라 늦게 잤다.
기차를 타는 순간, 아이패드에 옮겨온 론니플래닛이라도 읽으면서 여행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늦게 잔 탓에 불편한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가위까지 눌렸다.
이런 호사로운 여행에 설레임이 가득차도 모자랄판에 가위에 눌리다니.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3시간 30분을 달리기로 한 기차는 회색 빛 파리를 벗어났고,
기차의 빠른 속도 때문에 자다가 종종 귀가 멍멍해져서 깨어 창 밖을 흘끗보니 끝없는 밭이 펼쳐졌고,
가위에 눌려서 완전히 깨어나니 하늘은 파랬고,
창 밖의 풍경이 점점 올리브 빛으로 변하는 순간, 여기는 프로방스.
'그래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면 어때, 여기는 프로방스잖아.'
어차피 아무것도 해야 할 것 없는 파리에서 프로방스로 온 것 자체가 이유이고 목적이다.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한가.
철저히 준비한 여행이 과연 그렇지 않았던 여행보다 더 즐거웠던가.
유명한 명소는 인터넷치면 사진으로 , 유튜브 치면 동영상으로 다 나오는 세상이며,
맛집이란게 과연 누구의 입맛이 기준이며,
모르는건 그 자리에서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계획는 무슨 계획.
기차가 막 마르세유에 들어섰다.
정해진 건 숙소 밖에 없고, 그마저도 도착하면 핸드폰 구글지도에 쳐서 찾아갈 생각이다.
기차안에서 이번 여행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그럴싸한 이유, 이번 여행을 알차게 보낼 멋진 계획을 세우려고 했건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근사한 이유만 하나 만들었다.
'프로방스니까'
파리에서 출발할 때부터 기차에는 아랍계 프랑스 인들이 많이 보였다.
마르세유는 알제리아, 모르코, 튀니지 같은 아랍계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산다.
기차가 서자, 마치 집으로 돌아온 듯 익숙하게 내려서 빠른 발걸음으로 기차역으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나 혼자 이방인인 듯한 느낌.
갑자기 떠난 여행, 국내로 오길 정말 잘했다.
말도 통하고, 핸드폰도 그대로 터진다.
평소 쓰던 날씨 어플과 길찾기 어플을 익숙하게 사용해서 갈 곳이 어딘지 어떻게 가는지 금방 파악한다.
처음타보는 마르세유의 지하철이지만, 기계에 평소 쓰던 신용카드를 넣고 지시사항대로 쉽게 티켓을 구입했다.
지하철 타는 법은 파리보다 열 배는 더 간단하다.
난 지금 여기,
여기는 마르세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