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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의 작은 아파트.

'부르주아'들이 사는 아파트라고 했다.

by Pho

어제 오전만 해도 내가 오늘 마르세유에 있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지금 당장 떠나고 싶어서 온 여행이 아니라, 과거에 여행을 원했던게 생각나서 떠나 온 여행이었다. 과거의 욕구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만큼 내 자신에 대한 애정이 이토록 끔찍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파리에서 한 동안 흐린 날씨를 탓하며, 아니 핑계삼아 집에서 쳐박혀 복잡한 머릿속만 쥐어 짜고 있었던지라, 마르세유에 왔다고 갑자기 여행자로 변신해서 거리를 활보하며 다니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장소만 바꾸었지, 그대로 집 안에서 인터넷이나 끄적끄적 하다가, 배고프면 밥이나 해 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를 렌트했다.

'작은 아파트' 라는 문구가 딱 '이 집이다' 싶었던.....



# 마르세유의 작은 아파트

지하철역을 나오자, 웅장한 '프랑스 은행' (Banque de la France) 이 떡하니 서있었고, 평일의 대낮 사무실 앞을 보듯 한적한 거리에 동네 노인들만이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경시청' (Bureaux de la Prefecture) 을 지나니, 그 앞에 서류파일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아랫층에 그림을 파는 상점이 있는 내가 지낼 '작은 아파트' 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오래되고 묵직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힘껏 문을 밀어서 열자, 겉 모습과는 달리 깔끔한 내부. 전형적인 프랑스 오스만(Haussmann) 스타일의 건물이었다.

집 주인은 '부르주아들이 사는 아파트' 라고 설명했다.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아파트는 절대 아니지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를 맞이해주는 아파트 주인과 둘이 안에 서있자니 민망할 정도로 작은 아파트였지만, 이런 아파트는 파리에서도 많이 봐왔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나는 늘 '큰 도시'에 살았고, 당연하게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래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몇몇 이웃이 부르주아 였다는 것이, 최소한 동네 분위기가 부르주아 스러웠던 것이 '작은' 아파트에 사는데 있어 초라함을 덜 느낄 수 있는 심심찮은 위로가 되어주었던.


그래서 집 주인이 '부르주아들이 사는 아파트'라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주 괜찮은 위로군요'


집주인은 히터 , 가스렌지, TV를 켜는 방법, 열쇠꾸러미를 주며 각각의 열쇠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마치 일하다가 잠깐 나온것 처럼 황급히 떠났다. 물론 이런 설명을 해주는 데에는 5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침대에 앉아 방을 둘러 보다가, 서울에서 살았던 작은 아파트가 마치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이 아파트와 바깥 분위기도, 집안 내부 구조도 너무나도 닮았었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교차하는 곳 안쪽 지역에 있는 아파트였다.

평일에는 불편하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주말이 되면 고요하다 못해 죽은 도시처럼 싸늘하게 느껴졌었다. 이 아파트처럼 문을 열면 현관 옆 쪽 으로는 화장실이, 그리고 정면으로는 침대와 책상, 조촐한 주방이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창문이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 빼면, 영락없는 그때의 그 아파트 모습. 아니, 아파트로 오는 길 경시청 앞에서 보였던 사람들을 떠 올려보니, 그 때의 아파트 앞을 지나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세월은 10년이 더 지났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마르세유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마르세유의 아파트에서 뜻하지 않게 되찾은 '서울의 추억' 으로 머릿속에서 생각을 퍼즐 맞추며 프로방스에서 보내는 햇살 좋은 첫 날 오후를 그렇게 낭비할 뻔 했다.




# 첫 날 밤

그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행을 했고, 여행지에서 보내는 첫 날 밤에 설레여하는 나를 보며 혹시 변태가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오는 약간의 긴장감과,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날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교차하는데서 오는 야릇한 설레임.


그런데 이번에는 긴장감도 없고, 설레임도 없다.

붉은 조명아래 테라스를 가득 채우고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처럼 더 어두워지면 편히 자러 들어갈 아파트가 날 기다리고 있고, 오늘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듯 동네를 걸었으며, 내일도 오늘만큼 평범한 하루를 보낼 생각이다.


여행에 꼭 긴장감과 설레임이란 요소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늘 난 우연히10년이 넘은 추억에 젖었었고, 오랫동안 걷지 않았던 다리가 이렇게 많이 걸어도 멀쩡함을 확인했다. 이것만으로도 여행 첫 날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오늘 하루 나는 차갑고 음산한 파리의 공기 대신 차갑지만 온화한 지중해 바람을 맞으며, 뭔가에 쫓기듯 바삐 걷는 파리지앵들이 아닌 한결 느긋한 마르세유인들과 그 속도를 맞춰 걸으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으니 내일이 오늘보다 멋지지 않더래도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아파트를 렌트하면서, 여행보다는 일상의 변화를 주고자 요리를 해먹겠다는 로망이 생겼었다.

정육점에서 송아지고기를 사서 스튜를 한다거나, 아니면 간단한 스파게티 요리라도.

하지만 여행 첫 날치고 난 이미 너무 많은 일상의 변화를 주었기에 요리까지는 큰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욕심을 나무라기보단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남프랑스, 국내로 여행오길 정말 잘했다며 나 자신을 칭찬한다. 슈퍼마켓에 가서 아주 간단하게 전자렌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인스턴트음식과 내가 평소 좋아하는 군것질 거리등을 능숙하게 골라 사왔다.


바게뜨 대신 거의 20년 째 나의 최애 칩스, 도리토스 (Doritos).
도리토스를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 줄 건강식이라는 생각에, 그 와중에 샐러드는 퀴노아.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파스타,

인스턴트 파스타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줄 디저트로는 설탕가득한 케익 대신 오렌지.

맥주를 살까 와인을 살까 고민하다가 에잇, 짬짜면! 하며 고른 데낄라향 맥주 데스페라도 (Desperado).


이렇게 마구 집어온것 같은데, 아파트로 돌아와 상을 차리고 보니 에피타이져/본식/디저트 쓰리코스 완성.

습관이란게 참 무서운거다.




식사를 준비하고 방안에 난 유일한 긴 창문을 여니, 나만을 위한 테라스 레스토랑이 되었다.

아파트로 오면서 보았던 그 어느 레스토랑들 하나 부럽지 않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갔거나 까페로 갔거나....어쨌든 텅빈 거리.

파리에서 복잡한 머릿속을 쥐어뜯고 있는 대신, 이렇게 마르세유의 텅빈 거리를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여행,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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