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좋았고, 버스에서 잘못 내렸고, 뒤를 돌아봤을 뿐인데...
파리에 살다보니 날씨에 대한 강한 의심이 생겼다.
'오늘의 날씨' 에 배신감을 느껴 본 적이 한 두 번이었던가.
오늘의 날씨에 햇님의 얼굴이 뺄꼼이라도 보인다면, 햇살을 즐길만 한 가치가 있는 걸 우선순위로 두고 실행해야 한다. 언제 예정에도 없던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한 달 내내 징그럽게 하늘을 꿰차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
햇살이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된건, 파리에 살면서 의사가 처방해준 비타민 D를 알약으로 섭취하면서 부터다.
# 우연히 발견한 마르세유의 매력
이제 막 도착한 아파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만해도 10년이 더 지난 서울에 살던 아파트가 떠오를 만큼 여기가 마르세유임을 잠시 망각할 뻔 했다. 바깥의 따뜻한 햇살이 아니였더라면, 난 아마도 마르세유의 아파트안에서 서울의 추억을 떠올리며 중얼중얼 '혼자놀이' 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햇살도 좋고, 여기는 프로방스라는게 아파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정당한 이유다.
핸드폰을 꺼내 구글맵을 켜서 현재 위치를 파악해서 주변에 뭐가 있나 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뜬 명소는 '노트르담 성당' (Basilique Notre Dame de la Garde).
오늘의 날씨는 나무랄 것 없이 좋고, 구글맵에서 당장 갈 곳을 한 군데 찾았을 뿐인데, 난 정말 인터넷 발달의 최고 수혜자라며 흐뭇해진다.
검색창에 단어 하나 입력하지 않고도 내 위치와 명소 하나를 찾아내는 이 좋은 세상...
아파트에서 노트르담 성당 까지 버스로는 18분, 도보로는 20분. 가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이런 세상에 여행준비며, 가이드북이 뭐가 필요하겠냐며 여행 그까이꺼 당장 떠나야 제 맛 아니겠냐며.
그렇게 밖으로 나와 '햇살이 가득한 마르세유' 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다.
도보로 20분이라고 했지만 아까 기차역에서 아파트에 찾아 올 때, 편도 지하철 티켓과 24시간 무제한 교통 티켓의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24시간 무제한 교통 티켓을 구입했기 때문에 버스를 타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 조금 지나자 오르막 길, 그리고 계속 오르막길.
걸어오지 않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버스는 계속 오르막길을 빙글빙글 돌며 달린다. 걸어왔으면 절대 20분 안에 오지 못했을 것 같다. 구글맵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할 생각이었는데, 경사는 생각하지 않고 거리만 계산해서 예상 도보시간을 20분으로 산출했나보다. 인공지능의 한계에 인간으로서 안도의 한 숨, 휴~. 그리고 내렸는데, 한 정거장 전에 내리는 실수를.
오르막길을 두 발로 오르며 '인공지능이나, 인간지능이나.....'
한 정거장을 걸어가는 동안 보이는 건물들,
파스텔 빛 벽돌과 창문들 , 창 밖으로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 허름하지만 흉측스럽지 않은 건물들. 파리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모습이지만, 파리에서 이방인들이 느낄 그런 위화감 같은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밝은 색감들이 주는 안정감, 회색 빛 도시 파리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마르세유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 우연의 순간이 주는 선물
언덕 꼭대기에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보며 길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풍경. 오르면 오를수록 뒤로 보이는 전망에 노트르담 성당은 어느덧 뒷 전이고 한 눈에 보이는 마르세유의 풍경에 매료되고 만다.
성당이 이렇게 높이 위치해 있을지 몰랐고, 이렇게 멋진 전망을 보리라고는 더욱이 몰랐기에 생각도 못했던 순간이 주는 짜릿함이란.
지난 날의 여행을 되짚어보면, 이런 짜릿함을 수 도 없이 경험하며 하루하루가 신이 내린 선물이라 느껴질만큼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세계일주를 하겠다며 배낭을 짊어지고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멀어지는 항구를 바라보며 '안녕~2년뒤에 봐~' 설레임이 두려움,걱정보다 백배는 앞섰던 그 때.
배낭 속에 가이드 북은 한 권도 없었다. 그 당시만해도 한국 가이드북은 업데잇이 잘 안되어있거나 다른 나라 가이드북을 짜집기 해놓은 것들이 많아 가이드북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그나마 신뢰했던게 영어판 론니플래닛(lonely planet) 이었다.
론니플래닛에 나와있는 숙소에 가면 반드시 그곳이 있었고, 론니플래닛에 나와있는 버스를 타면 어김없이 그곳에 도착하였다. 론니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시간,돈 낭비 없이 90% 정석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론니는 정말 유용했지만, 모두가 가는 여행루트를 나도 그저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심심찮은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회사에 사표를 쓰기 몇년 전부터 서점을 들락날락하고, 인터넷을 수도 없이 뒤지며 내 나름의 여행가이드북을 만들어 파일로 저장해놓고 2년이 넘는 배낭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내가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며 내가 만든 가이드북의 정확성을 확인할 때 마다 나름 뿌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의 노하우가 생기고, 다른 여행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세운 여행계획서와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기간의 반도 지나지 않았을 때 컴퓨터가 고장나면서 파일은 이미 날아갔으며 말그대로 바람따라 여행을 하게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을 바라보며, 처음 보는 음식을 먹고, 현지인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스쳐지나가는 여행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매일매일이 서프라이즈로 가득찼다. 밤에 잠 들기 전, 오늘도 무사히 보낸 하루에 늘 감사했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던. 그렇게 2년 반 이라는 세월을 세상의 이런 저런 거리에서 보내며 20대를 마무리했다.
그랬었지...
# 괜찮아 - 바람이 나에게
마르세유가 한 눈에 보인다.
20 대 때 나는 빼곡한 집들을 내려다보며 내 집 하나 없는 것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었다.
높이서 내려다 본 도심의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 오히려 내 집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으니깐.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집이 많은데, 난 집이 없네...'
이렇게 10년이 넘게 지나도 내 집이 없을 줄은 몰랐지.
가지런한 집들이 보이는 고요한 풍경과 달리 성당이 우뚝 서 있는 이곳은 마치 높은 산이라도 올라온 것 처럼 바람이 요란법썩을 부린다. 그 세기에 반해 별로 차갑지 않은 바람이 나를 이리 저리 밀어내기도 하고, 귓 가에 맴돌면서 소리도 내고, 내 몸을 감싸 안아 주는 것 같다.
파리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비와 함께 몰아치던 바람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바람이 포근하게 느껴지는건, 온화한 마르세유의 기후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기분탓인지. 그리고 또 바람이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것 같은건 환청인지.
이 시대에 태어나 숨만 쉬었을 뿐인데 얻은 '인터넷 발달의 수혜자' 혜택을 누리기 위해 조용한 성당안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본다.
Notre dame / Marseille (노트르담/마르세유)
"S'il fallait presenter Notrea Dame de la Garde en quelque mot......마르세유에서 가장 유명한 상징....마르세유에서 자연적으로 가장 높은 곳....157미터...마르세유에서 가장 방문객들이 많아서..........성당의 아랫부분은 로마네스크양식, 윗 부분은 네오 비잔틴 양식.........1864년에 지어졌으며....성당 꼭대기에 마돈나와 아기가...une vue imprenable et...."
쭉 읽어 나가며 속으로,
'그래서 뭐', '뭐가 중헌디'
핸드폰 하나만 손에 잘 쥐고 다니면, 세상에 모를게 없는 이. 좋은. 세상.
그런데 난 아까 본 파스텔 색감과, 따뜻한 바람과, 갑자기 떠오른 추억이 더 중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