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통해, 예전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함께 일하던 직장 상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말단 사원이었던 나를 상사들은 신경을 많이 써주셨고 나 또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상사들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를 관두고 얼마 후까지는 종종 안부 메일을 보내곤 했었다.
세월이 흐르며 연말연초에 새해인사 정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가 어느새 그마저도 안한지 이미 몇 년이 지났다.
그런데, SNS 계정들이 어떻게 연동이 되어있다 보니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이 온 것이다.
오랜만에 갑자기 연락하기가, 그것도 윗사람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을 텐데 메시지를 보는 순간 우선 고마웠다. 그 이유가 조언을 구하는 부탁일지라도 내가 반갑게 받아들일 사람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다.
고민이 많이 되었다. 내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간혹 '승무원 과외'라 하여 승무원 지망생들에게 '대단한 비법'이라도 전수해주는 듯 보이는 전/현직 승무원들을 보았다. 돈 까지 받는 그 비법은 나도 늘 궁금했다.
아쉽게도 내겐 그런 강력한 한방은 없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 '간절히 원하면 꼭 이루어질 거야'가 아니라 그 아이가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정말 필요한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승무원, 그것도 에미레이트라면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라는 말로 시작했다.
에미레이트는 초대형 항공사다. 내가 퇴사할 당시에 승무원 수만 1만 8천 명 (파일럿 빼고)이었다. 그것도 전 세계 각 국에서 온 120여 개국 이상의 승무원들로 구성되어 있어, UN다음으로 다국적 집단이라는 말이 있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넘어 다양한 인종, 배경,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일을 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영어는 필수, 아랍어는 선택, 제3 언어는 글쎄.
에미레이트 항공이 베이스를 두고 있는 두바이에는 외국인 근로자(Expat)가 90%, 나머지가 현지인. 외국인 비율이 현저히 높다 보니 아랍어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말이 공용어지 영어의 사용률이 훨씬 더 높다. 토익, 토플 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예로, 두바이에서 입사 훈련을 받던 중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입사가 취소되어 고국으로 되돌려 보내진 이들도 있었다.
영어는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 그래야 동료들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 즐거운 회사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항공사라면 여러 언어를 구사할수록 입사에 유리하지만, 에미레이트의 경우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만 명이 넘는 승무원들이 이미 다양한 언어를 커버하고 있기에, 한 사람이 여러 언어를 구사할 필요까지는 없다. 단, 비행기당 1명 이상의 아랍어 가능 승무원이 탑승하기 때문에 아랍어를 할 줄 안다면 가산점이 될 수 있다.
현실은, 에미레이트에는 레바논, 시리아, 모코로, 이집트 등의 아랍계 승무원들이 워낙 많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두바이를 떠날 때까지 아랍어 까막눈으로 살아간다.
오로지 승무원이 목표라면 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
승무원이라는 직업 자체가 대학 수준의 학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력을 중시하는 한국의 항공사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에미레이트뿐 아니라 유럽의 항공사는 입사 조건에 '고졸 이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학력에 따라 급여나 진급에 차등을 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두바이에는 승무원 말고도 외국인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다국적 회사들이 무한하게 많다. 굳이 다른 회사에 눈을 돌리지 않더라도, 에미레이트 항공은 말했듯 초대형 회사라 그 안에 다양한 보직이 있다. 그리고 내부에서 채용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승무원이 적성에 안 맞아 차선책을 생각한다면 대학에서 전공을 하나 갖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승무원들 중에는 비행을 하며 석사 학위를 이어가는 이도 있고, 전공을 살려 투잡을 병행하기도 한다.
만일 대학엘 갈 거라면, 학업 중에나 졸업 후, 관련 분야에서 인턴쉽이라도 실무경험을함께 쌓아 놓는 것이 좋다. 졸업하고 한참 후에, 그것도 해외에서 과거 대학 전공 운운하며 인턴쉽을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해외에서는 한국보다 대학 이름에는 덜 신경 쓰는 반면, 경험과 경력에 훨씬 더 높은 치중을 둔다.
동아리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아라.
이력서에 학교 이름과 각종 자격증만 달랑 적는다면 서류 탈락.
승무원은 서비스 직종이다 보니, 손님을 상대하는 서비스 경력이 필수라 할정도로 중요하다. 카페나 편의점 등 소소한 경력이라도 있다면 좋다. 하지만 이게 아니더라도 모임이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신과 여러모로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일해본 경험이 있다거나 어떠한 성과를 내 본 적이 있는 각종 학업활동들도 큰 도움이 된다.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경험과 경력들도 이력서에 쓰기 나름이다. 예를 들어, 옷가게에서 일했다면 단순하게 '점원(staff 혹은 employee)'이라고 적는 것이 아니라 '고객 서비스(customer service)'라고 적으면 더 눈에 띈다. 동아리에서 회원들과 뭔가를 한 게 있다면, '그룹 프로젝트 (Group project)'라고 표기를 해서 팀워크를 통해 어떤 성과를 이뤄 본 적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은 이력서뿐 아니라, 대면 면접에서 면접관에게 자신의 캐릭터나 역량을 설명할 때 풍부한 소스로 작용한다. 즉, 다짜고짜 '나는 성실한 사람이다'가 아니라, '이런 동기로, 이런 활동을 했고, 이런 사람들과 이렇게 맞춰 나갔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대처했고, 이런 것들을 깨달았다'와 같은 스토리 텔링이 완성된다.
최종 면접에서 면접관은 이력서를 보며 질문을 한다.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일할 때 밤에 술 취한 손님이 온 적 있나요?,
두려웠을 텐데 어떻게 대처했죠?,
손님을 안정시키기 위해 했던 말을 그때다 생각하고 해 볼래요? 등등.
질문은 이력서에서 나오고, 답변은 경험에서 나온다.
다양한 취미 생활을 만들어라.
목표는 승무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승무원이 되어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것일 것이다.
이 직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나 같은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에너지 소모가 두배).
매 비행 때마다 안면도 없는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합을 맞춰야 하고, 수 백명의 승객을 상대하고, 비행 목적지에 가서 말도 안 통하는 현지인들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액티비티 등을 할 줄 알면 좋다. 알프스에 갔는데 혼자 스키를 탈 줄 모르고, 발리에 갔는데 수영이나 서핑을 모르고, 자전거나 스쿠터를 탈 줄 모르고, 클럽에서 춤을 출 줄 모르고. 특히, 에미레이트 항공은 동물의 왕국 나이로비, 쌈바의 도시인 리우 데 자네이루까지 안 가는 데가 없다. 이 직업은 잘 놀수록 더 재미있다.
내향적이고, 아웃사이더 성향이 강하며,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 (난가?)이라도 취미 생활은 중요하다. 사진 찍기, 조깅, 맛집 탐방, 요리(전 세계 식재료 모아 오기). 아니, 그냥 호캉스가 취미여도 좋다. 승무원들이 묵는 호텔은 보통 4성급 이상. 고급 수영장과 헬스장 사용, 호텔 식음료는 승무원 할인.
전 세계를 다니며 이 모든 혜택들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같은 승무원이라도 만족도가 더 높지 않을까.
대략 이러한 것들을 이메일에 적어 전 직장 상사분께 보냈다.
그랬더니 며칠 후,
"우리 아들과 함께 메일은 잘 읽었네. 그런데 급여는 얼마나 되나?
아차, 내가 이 중요한 걸 말 안 했다.
일이든, 어떤 노동을 요구하는 제안이든 돈 얘기 먼저 안 해주는 거 극혐 하는 내가,
결국 노골적으로 돈 얘기를 꺼내며 '이런 말을 내 입으로 직접 해야 하나' 궁시렁대는 내가,
상사에게 이런 노골적인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두 번째 메일에는 생각나는 급여 수준과 함께 에미레이트 승무원들이 누리는 각종 복지에 대해 비슷한 길이의 메일을 보내드렸다.
그리고 덧붙여, '과외'라 거창하게 부를 만큼 대단한 비법 같은 것은 없지만 아들이 승무원 면접을 볼 기회가 다가온다면 다시 한번 연락을 달라고 말씀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