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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Jun 09. 2022

오후 1시지만, 아무튼 퇴근

오후가 있는 삶

오늘의 출근 시간은 영국시간으로 새벽 6시 30분.

매일의 출근시간이 이러하다면, 지독한 저녁형 인간인 나는 일찍이 회사를 떠났겠지만 어쩌다 한 번이기에 거뜬하게 그것도 기분 좋게 새벽 5시 30분에 침대를 벗어났다.

싫어하는 일도 아주 가끔 하면 좀 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기상시간 하나만 반복의 패턴을 벗어나도 생활이 조금 더 윤택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따르릉, 따르릉'

호텔 리셉션에서 걸어온 알람 전화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다. 호텔룸에 있는 전화기는 구식인 경우가 많고, 그 벨 소리는 언제 들어도 날카롭다. 

전화 알람은 내가 부탁한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호텔에 요청한 것이라 어느 호텔에 묵든 일정 시간에 적어도 한 번에서 많게는 세 번이 걸려온다. 알람 전화를 받지 않으면 벨소리가 계속 울리거나 호텔 직원이 방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알람 전화를 원치 않으면, 하지 말아 달라고 호텔 측에 미리 말해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승무원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맞춰 놓은 알람이 만에 하나 울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증이 있고, 알람이 안 울리거나 놓쳐 늦잠 자는 악몽은 한 번쯤은 꿔봤기에 호텔 알람 전화는 내버려 두는 편이다.

승무원이 모자라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결항되는 대참사의 주역이 되는 걸 예방하는 차원에서라도.


출근 장소는 하룻밤, 정확하게는 아홉 시간을 묵은 호텔의 아래층 로비.

어젯밤 헬싱키에서 런던으로 는 마지막 비행기에서 일을 하며 왔고,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직원 셔틀로 10분도 채 되지 않는 호텔에서 밤 잠을 잤다.

오늘의 업무는 어제와는 정 반대로 런던에서 헬싱키로 가는 첫 비행기에서 일을 하는 것.

업무는 전 날의 것의 반복이지만,

출퇴근 시간과 출퇴근 장소가 바뀌었다.

(야, 신난다. 머리는 신나는데, 마음은 그저 그렇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20분 더 일찍 내려왔다.

호텔의 로비 한 켠에 마련된 조식 뷔페에 가니, 파일럿을 포함한 팀원 일곱 명 중, 네 명이 먼저 와 식사를 하고 있다. 내가 바로 옆 의자에 앉으니 연세가 지긋한 사무장이 커피를 마실 거냐고 물은 뒤 테이블에 있는 커피포트를 들어 내 컵에 커피를 따라주며, 잘 잤느냐고 묻는다. 나는 커피 안에 우유를 넣으며, 아주 푹 잤다고, 수면 양말을 신었더니 마술처럼 잠에 들었다고 대답했다.

늘 하는 인사치레임을 알면서도 나는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는 편이다. 그러고 나서 상대에게 되물으면 그들 역시 형식적이지 않은 대답을 해온다.

여러 사람과 식사를 하는 것은 내게 늘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은 오늘처럼 막상 닥치면 곧 잘 사그라든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님을 알아채는 일도 빈번하다. 


핀란드인 동료들과 아침식사를 함께 할 때면 나와는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이 있다.

그들은 두툼한 빵에 햄과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그보다는 작지만 달콤하게, 크루아상과 같은 페이스트리에 커피나 차를 곁들여 먹는 게 다이다. 

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속으로 '어떻게 아침을 저렇게 많이 먹을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지만, 평소에도 나와 그들은 서로의 다른 점을 굳이 피력하지 않는 편이다. '다름'이 익숙한 사이다.


올 때마다 날씨는 스산하고, 공항 근처라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도 없는 런던 비행에서 좋은 점은 딱 하나다.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면, 비행기 바로 밑자락에 대기 중인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 상상만 해도 복잡한 런던 공항에 발을 디디지 조차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탈 때도 같다.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공항의 직원 검사소에서 잠깐 정차해서 짐 검사를 받은 후, 바로 비행기 앞에서 하차한다.

이런 걸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시시하거나 조금은 어이없을 것도 같다. 하지만 공항만 가도 설레는 것은 여행을 앞둔 자들의 입장이고, 공항을 한 달에 열 번은 드나들며 '일'을 하러 가는 나의 입장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런던에서 헬싱키까지는 세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헬싱키-런던 비행은 호텔에 묵지 않고 공항만 찍고 되돌아오는데, '막차'와 '첫차' 비행을 할 때에만 이렇게 잠을 자고 온다.


영국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 비행기가 런던 히드로 공항을 이륙했다. 핀란드 시간으로 오후 12시 20분, 헬싱키 반타 공항 도착.

영국과 핀란드는 2시간의 시차가 있다.


보통 비행이 끝나고 나면 여운이 남아 몸이 둥 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머릿속이 뱅뱅 도는 느낌도 나는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는 '경험'을 했고,

오랜만에 동료들과 둘러앉아 테이블 위로 다정다감한 대화를 주고받은 아침의 시간을 가졌다.

게다가 근무시간도 짧았고, 평소와 같이 스트레스 없이 가뿐하게 일을 마쳤다.


비행기 밖으로 나오니, 6월 초의 햇 빛이 따뜻하고 공기는 아직 차갑다.


아, 이렇게 퇴근해도 되는 건가.

집으로 가면 모처럼 상쾌한 하루가 일찍이 마무리될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자꾸 든다.


공항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헬싱키 공항 안에는 슈퍼와 몇 안 되는 카페가 있는데, 나는 마치 학교매점 이용하는 학생처럼 출퇴근 시 꽤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커피를 마시는데, 오늘은 마치 집에 가기 싫어 괜히 학교 주변을 맴도는 학생이 된 기분이다.

이 시간에 공항으로 불러 낼 사람은 없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라도 이 좋은 시간을 만끽한다.


인스타를 열어보고, 회사 메일도 확인하고, 인터넷 뉴스도 보고, 집에서 해도 되는 것들을 굳이 공항 카페에 앉아하고 있다.

그렇게 한껏 여유를 부리고 일어서는데도 오후 한 시.


집에 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동네 산책을 할까,

볕이 좋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을까,

창문을 활짝 열고 요리를 해볼까,

막상 집에 갈 생각을 하니, 머릿속에  막무가내 계획들이 떠오른다. 집에 가면서 이렇게 들 떠 본 적이 있었나.


오전 일찍 출근하고 남들 퇴근하는 오후에 퇴근한 적은 있어도,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 적은 있어도,

미국이나 아시아에서 출발해 밤새 비행을 하고 헬싱키에 오전에 도착해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적은 있어도,


아침에 출근해서 이른 오후에 가뿐하게 퇴근하는 것은 승무원에게도 흔한 일이 아니라,

너무 신이 나서 뭘 해야 이 기분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퇴근.


런던 호텔 방 안에서 보이는 풍경
헬싱키 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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