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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u Poloi Dec 09. 2018

발리_여행의 시작은 밝혀 준 아름다운 사람들

열흘간의 인도네시아 발리

 독일에서 친하게 지내던 J라는 친구가 있었다. J는 아주 히피 같은 친구인데, 남자 친구와는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였다. 그 친구는 인도네시아 롬복으로 교환학생을 간다고 했다. 근데 그즈음 롬복에 큰 지진이 나는 바람에 발리에서 교환학생을 하게 되었다.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고 몇 달 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다. 우리가 여행을 위해 독일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독일로 돌아와야 했다. 덴파사르에서 우연히 지나가다 시위 현장을 목격하게 됐고, 신기한 나머지 사진을 찍었다. 그것을 본 인도네시아 비밀경찰은 J와 그의 친구를 인도네시아에서 강제 추방시켜버린 것이다. 교환학생을 미처 끝내지 못한 J를 우리는 떠나기 전 독일에서 다시 만났다. 며칠간에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지쳐있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우리는 독일을 떠나왔고 한국을 거쳐 인도네시아 발리에 도착했다. 우리의 첫 거처는 J가 얹혀살던 인도네시아인 친구의 집. J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우리는 위해 부탁해 준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발리에 살고 있는 U를 만났다. 그의 집은 작은 원룸이었다. 주방은 없었지만 우리를 위한 작은 침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U 또한 카우치서핑 호스트였는데, 이미 수십 명의 여행자들이 그의 집을 거쳐갔다. 그의 집에서 우리는 5일을 머물렀다. 오일 간 우리는 밤새도록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무거운 이야기까지. 사람과 사람은 시간을 뛰어넘어 마음으로 가까워 짐을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다시금 깨닫는다.

 U는 인도네시아 북쪽의 보르네오라는 섬에서 왔다. 다수의 다른 인도네시아 섬처럼, 보르네오도 알라를 섬기는 섬이다. U는 자신이 살던 섬을 떠나 발리로 왔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발리는 이미 서양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여러모로 많이 개방화가 되어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가 자란 보르네오라는 섬은 그의 정체성의 자유를 인정받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발리를 제외한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지역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그가 살고 있던 발리의 한 건물에는 다른 동성애자들이 몇명 더 살고 있었다.

  U는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또한 U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에게서 유럽식 사고방식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유럽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고, 유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그가 감당하기에는 턱 없이도 비쌌다. 여러 번 돈을 모으려고 시도를 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비행기 값을 마련하기엔 부족했다고. 대신 그는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집으로 초대함으로써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한국과 독일, 그리고 내가 살아온 나라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U의 집에서는 전 세계 여러 나라에 사 온 친구들의 흔적이 있다.  나는 전세계 사람들을 집으로 들인 U야말로 진정한 여행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다. U와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와 정말 많이 가까워졌고, 언제 가는 U를 독일에서 볼 수 있기를 소망했다. J와 함께 어울려 놀 수 있기를 말이다.


 그렇게 U를 떠나 우리는 발리 북동쪽 아메드라는 곳으로 향했다. 카우치서핑을 통해 세계를 여행한 어느 다이버의 다이빙 캠프에서 며칠 지내기로 했다. 나는 다이빙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다이빙 자격증을 가비고 있는 남자 친구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이빙 레슨 시작 전, 이틀간 스쿠터를 타고 주변 해변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스노클링 하기에 아주 좋은 해변이 펼쳐졌다.

 물속을 헤엄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을 구경하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한 지역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그 청년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이름은 R. 그는 자신을 어부라고 소개했다. R음 우리에게 그가 사는 마을을 방문하기를 청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스쿠터를 타고 20분을 넘게 달려 그의 마을로 도착했고, 그는 우리에게 아주 전망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며 어느 언덕길로 우리는 데리고 갔다. 지나고 나니 부끄럽지만, 우리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나 우리는 외진 곳으로 데려가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의 두려움 말이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간 전망 좋은 곳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꼭대기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전망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그의 대한 마음의 문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우리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갔다. 집 어귀에는 돼지들이 있고, 닭들이 마당을 뛰어다니고, 어린 그의 동생과 사촌들이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껏 발리를 여행하며 보아왔던 집들보다 훨씬 허름한 집에 살고 있었다. 발리 사람들은 집안에 다들 작은 힌두 사원을 가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보면 화려한 사원을 가지고 있는 집도 있고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사원은 가지고 있는 집도 있다. 가지고 있는 사원이 바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부를 상징한다고 했다. R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사원은 우리가 발리에서 본 것들 중에 가장 볼품없었다.

 역시나 우리에게 발리식 커피를 내주었다. 엄마가 직접 튀긴 팝콘도 함께 말이다. 동생들은 차례차례 소개받았다. 삼촌 할아버지 할 것 없이 모두 만났다. 오후 한나절을 이 가족과 함께 보냈다. R의 동생은 내가 손목에 차고 있던 머리끈에 아주 큰 관심을 보이더라. 나는 머리끈은 빼서 동생에게 쥐어줬고, 동생을 환한 미소로 답하며 나에게 과자를 나눠줬다. 그들과 함께한 그 시간 동안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의 따듯함만은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R의 마을로 돌아갔다. 전 날 드리지 못한 기도를 드리러. R은 우리에게 여행을 잘하게 해달라고 자신의 신에게 빌어야 한다고 했다. 발리를 지나가다 보면 간단한 음식과 사탕 담배 등등에 꽃 장식을 더해 각자의 사원 또는 집, 가게 앞에 향을 피워 놓은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그의 신을 위한 음식과 꽃과 향을 준비해야 했다. 일부러 많은 음식을 준비했다. 오이부터 바나나 망고까지. 예쁘게 바구니에 담아 R의 사원에서 그와 함께 그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사실 나는 다른 신을 믿고 있지만 진정한 여행은 여행하는 곳의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체험에 불과했지만 R에게는 우연히 만난 외국인 여행자가 자신의 절에서 자신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건 분명 큰 의미일 것이다. 아니면 누가 아는가. 정말 그의 신이 우리를 지켜줄지. R는 자신이 보는 그의 신은 하얀색 옷을 입고 하얀색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고 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한 음식, 꽃, 담뱃개비, 그리고 소정의 돈.


  R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 마음이 참 이상했다. 이런 가족을 만나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그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나누어 준 것에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동시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R의 가족은 아주 가난했다. 서양에서 온 많은 백인들이 발리에 살며 돈을 마구 쓰는 곳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그는 학교조차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발리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한 그에게 여행이랑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고, 우리에게 바로 옆 자바 섬에 가면 나쁜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차마 그에게 우리는 세계를 여행 중이고, 이런저런 나라는 가 보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자는 이 지역에 그의 가족이 생각하기엔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의 돈을 스쿠버 다이빙하는데 쓰러 왔다는 말을 또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다음에 혹시라도 발리에서 비즈니스를 하게 되면 꼭 자신의 가족을 고용해 달라고. 발리에서는 관광업에 종사하는 자와 종사하지 않는 자의 빈부격차가 심한 듯했다. 언젠가 그의 가족들을 도와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아메드에서 자바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3시간에서 4시간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현지 버스 시스템은 알 수가 없었고. (발리는 현지 이동 교통수단이 정말 얼마 안 된다. 여행자들은 다들 비싼 택시를 타고 다닌다.) 택시비를 내기에 우리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했다. 동네의 끝자락에서 전날 어설프게 인도네시아어로 프리 드라이브라고 적어 논은 팻말을 들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느 젊은 여성이 스쿠터를 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그렇게는 차가 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현지 버스 (보통 빨간색의 봉고차)를 세워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돈이 부족하냐면 대뜸 우리에게 한화로 약 만 오천 원가량이나 되는 돈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인도네시아를 여행해 본 사람들은 이게 여기선 얼마나 큰 돈일 수 있는지 알 것이다. 우리는 그 정도로 돈이 없는 게 아니니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그녀를 우리에게 절반이나 되는 금액을 쥐여주고 유유히 떠났다. 우리는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발리 사람들에게 백인(독일인)과 극동 아시아인(한국인)이 절대 가난해 보이지는 않을 텐데, 그녀를 왜 그렇게 큰돈을 우리에게 서슴없이 쥐어줬을까. 이건 그녀의 정일까 동정심일까. 하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그녀의 친절함을 베풀고 싶어 했음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반면 나라면 모르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이렇게 큰돈을 건넬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하지 못 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친절함이 가득한 그 돈을 다음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해야 할 때 쓰기로 했다.

 히치하이킹은 십분 정도가 지나서 성공했다. 우리는 어느 현지인 투어 가이드의 차를 얻어 타고 그의 집까지 가게 됐다.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인 부인과 딸과 살다가 얼마 전 고향인 발리로 돌아와 네덜란드인에게 관광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우리에게 커피를 대접해주었고, 현지 버스까지 직접 잡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발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의 발리 여행은 사람이 가득했다. 정이 가득했고, 놀랍고 새로운 일이 가득했다. 모든 건 우리가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고, 이 사람들이 우리의 긴긴 여행의 시작을 아름답게 밝혀줬음에 틀림이 없다.

 다시 한번 내가 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다른 문화권, 다른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비슷하지만 다른 인생을 공유하고 행복과 사랑을 소통 고하고 싶었다. 벌써 시작부터 우리는 여행이 따듯해 짐을 느낀다. 긴 이 여정 길에서 얼마 더 다양한 동시에 똑같은 마음의 색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너무 설레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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