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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u Poloi Mar 22. 2018

프랑스에서 포르투갈까지 1500km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거쳐 포르투갈까지

이 해, 유독 외로웠다. 다들 나아가는데 나만 어딘가에 정차된 느낌이었다. 오랜 해외생활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기도 하고 각자 자기만의 삶의 안정기를 접어드는 듯 보였다. 나는 가끔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뿐이라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경험들이 끝내 나를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들 것이라고 나를 다독이곤 했다.


그 해 여름, 한국에서 친구들이 다녀갔다. 한 친구와는 근처 유럽 나라들을 여행하기도 하기도 했고, 향락의 섬 이비자에 가서 신나게 즐기고 돌아오기 했다. 친구들을 모두 공항에서 떠나보낸 후, 혼자 마드리드에 남았는데, 끝도 없이 깊은 공허함을 나를 스쳤다. 어디로든 떠나야 했다. 그래서 바로 며칠 뒤 비행기를 알아보고 그리스로 떠났다. 그렇게 발칸반도를 돌고, 크로아티아에 도착해 어느 작은 한 마을의 비앤비에서 약 한 달을 머물렀다. 무료로 숙박을 하는 대신 주인 할머니를 도와 손님들에게 아침을 제공하고, 청소도 돕고, 남는 시간은 바닷가에 나가 놀거나, 비앤비 안에 있는 해먹에 누어서 책을 읽고 낮잠을 자며 보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크로아티아를 떠날 시간이었다. 그 때 내가 돌아갈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 길. 이미 전에 2번이나 완주한 후였다. 나는 순례길 위가 내가 돌아갈 집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랑스로 날아갔다.


크로아티아 풀라에서 프랑스 톨루즈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슬로베니아에서 왔다는 친구를 만났다. 자기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비행기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톨루즈 기차역까지 함께 갔다. 그 친구는 바욘까지 가는 기차표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바욘까지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꼭 다시 보자며 기차역에서 작별을 했다. 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첫 스페인 마을에서 그와 재회했다. 그렇게 산티아고에서 정말 마지막 작별을 했던, 기억에 남는 친구 중에 하나인 동시에, 세상은 좁고 사람의 인연의 끈은 길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준 친구이다.


프랑스 톨루즈에서 어찌어찌 히치하이킹을 해 바욘까지 갔다.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산티아고를 가는 길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프랑스길. 매년 몇만 명이 걷고 있고, 그중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국적의 사람들은 단연 유럽 사람이겠지만, 미국인 그리고 한국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스페인 작은 마을을 걷다 마을의 할아버지들은 만나 짧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같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한국인이 많이 오는 거야?'였다. 그나마 스페인어를 잘하는 한국사람을 만났다고 항상 나만 보면 왜 이렇게 한국사람이랑 미국 사람이 순례길에 가득 찬 거냐며 물으셨다. 하지만 순례길에는 한국인 미국인을 제외하고도 정말 세계 곳곳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 길은 사람에 지쳤을 때 사람에 치유받는 곳이라고 하고 싶다. 프랑스 길 외에 다른 길도 걸어봤는데 다른 길들은 더 나를 위한길, 혹은 자연과 소통하는 길, 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면, 프랑스길은 자연과 나뿐만 아니라 사람이 존재하는 길이다.


프랑스길을 다시 걷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내 외로움을 사람으로 치유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첫 번째 프랑스길에서 정말 소중한 인연을 많이 만났고, 사회생활로 사람에 치일 데로 치인 나는 프랑스길에서 같이 걷는 친구들의 따듯한 마음을 정말 많이 느꼈었다. 그런 진정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거기다 더불어 스페인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는 길, 그 길로 다시 향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직전 프랑스 길의 가장 유명한 시작점으로 불리는 생장에서는 우연히 만난 한 이탈리아 친구와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이후 이 친구와 장난을 더 많이 치긴 했지만, 정말 처음 며칠동안은 아주 진솔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때는 이 친구와 한 달을 내내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지만, 그렇게 나의 세 번째 순례길 그리고 두 번째 프랑스길에서 다시 한번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국경을 지나고 스페인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한 달이 넘게 스페인을 떠나 있었고 오래간만에 내 귀로 스페인어를 들었을 때, 드디어 안도감이 들었다. 아- 집에 왔구나, 이런 느낌. 이 묘한 스페인어의 매력, 그리고 호탕한 사람들, 이런 몇몇 이유 때문에 나는 그토록 스페인을 떠나지 못했었다.


Pamplona를 조금 남겨두고 그의 축제 분위기가 길을 걷는 우리들에게 까지도 영향을 미칠 때 쯔음, 아침에 길을 나서서 이미 약 10km쯤 걸었을 때 전 날 묶은 숙소에 휴대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난 게 아닌가. 휴대폰이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물건은 아니 된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가족과의 연락을 위해 찾아야 했다. 하지만 되돌아 가기에는 이미 먼 길이었다. 나는 그날 걷기로 한 길을 일단 그대로 걸었다. 그리고 다음 숙소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에게 '나 핸드폰 찾으러 갔다 올게~' 하고 우리나라 국도와 비슷한 큰 차도로 걸어나갔다. 정말 더운 날이었는데, 길가에 서서 열심히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손을 흔들에 댔다. 한 십 분에서 이십 분쯤 지났을까. 한 아저씨가 기꺼이 차에 태워주었다. 그전에 몇몇 차들이 멈춰 서긴 했지만 나의 목적지를 듣고는 다시 떠나버렸었다. 아저씨는 자기가 가는 방향은 아니지만 멀지 않으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차에 타서 순례길을 걷고 있고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전 날 묶었던 숙소로 되돌아 가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마드리드에서 공부하고 있다. 뭐 이런 얘기 들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는데, 아저씨는 너무너무 반가워하시면서 자기도 순례길 한번 걸어보고 싶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와서 스페인어 정말 유창하게 잘한다. 자기는 지금 엄마 집에 밥 먹으러 집에 가는 중이었다 이런 얘기들을 또 꺼내 놓으셨다. 게다가 중간에 ' 아, 나 우리 엄마한테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전화해야겠다' 라며 자동차 블루투스 전화기로 전화를 거시더니, ' 엄마! 나 지금 집 가는 길에 한국에서 온 여자아이를 하나 차에 태워서 어디다 데려다주고 있는 중이야! 스페인어 엄청 잘하는데 통화해 볼래?' 그렇게 아저씨의 엄마랑도 통화를 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아저씨가 '휴대폰 찾아서 다시 차로 와! 숙소까지 태워다 줄게' 라며 내가 묵고 있던 숙소까지 태워다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랑 사진 찍어 달라며 나의 사진까지 찍어가신 아저씨.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잊지 못할 하나의 재미나고 특별한 에피소드를 남긴 건 아닐까. 나는 뜻밖의 환대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길을 걸어 나갈 힘이 200퍼센트쯤 더 생긴 것 같았다.


그렇게 스페인 Pamplona를 지날 때, Pamplona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 중의 하나인  San fermín이 한창이었다. 사실 한번쯤은 꼭 와보고 싶은 축제였는데, 이렇게 걷는 중에 지나게 되니 반가웠다. 이 축제는 스페인 소축제, 소몰이 축제로 많이 알려져 있다. 스페인 내에서는 위상이 대단한 축제 중에 하나이다.

함께 길을 걷던 친구들과 함께 이 축제를 보러 갔다. 사실 나에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 중에 하나이며,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축제로 기억된다. 도시 전체에 빽빽하게 모여든 사람들은 소들이 넘어지고 고통받는 모습은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보는 동안 나는 속에서 슬픔인지 화인지 모를 감정이 마구 치솟아 눈물을 겨우 삼켰다. 산 페르민 축제는 사실 나에게 동물보호화 관련된 관심이라던가, 채식주의와 같은 주제들을 더욱더 일깨워준 계기이기도 하다. 산 페르민을 보기 전에는 가끔 일이 있으면 고기를 먹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후에 지금까지도 고기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순례길에서의 시간을 참 빨리 지나간다. 걷는 게 일상에 되다 보면, 걷는 일상에 너무 당연해지는 동시에, 스페인의 자연에 매일매일 그렇게 취하다 보면 어느새 몇백 킬로를 나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나 걷기 시작하고 일주일쯤은 걷는 것이 고돼서 힘들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몸은 더 단단해지고 마음은 더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첫 순례길에서 사람들이랑 장난 반으로 매일 '가방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다'라고 얘기하곤 했다. 길을 걷다 보면 배우게 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얼마나 적게 소유하느냐' 인 것 같다. 많이 가지고 다닐수록 몸이 고생이다. 비움의 미학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사실 이 번 순례길에서 나의 걸음을 더 즐겁게 해준 요소중의 한가지는 나의 스페인어가 이제는 정말 유창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 전에 길을 걸을 때는 주로 영어를 사용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했기 때문에 현지인들과 소통하는데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나는 마을 사람들과는 스페인어로 대화하고 순례자들과는 영어로 혹은 한국사람들과는 한국말로 대화하는 그야말로 만능 언어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가끔 스페인어를 못하는 순례자들이 문제에 처했을 때 현지인들과 통역도 자청해서 해주었다. 이 점은 분명 나의 여정을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줬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부르고스를 지나고, 레온을 향해 걸어가던 길 위가 생각난다. 라 마세타라고 불리는 지역인데, 무덥고 건조한 데다 길은 단조로와서 많은 순례자들은 지치게 만드는 길로 악명이 높다. 한 낮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아침 6시부터 일어나 같이 걷던 우리 일행은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까르르 웃으며 재미나게 걸었다. 알렉산드로, 마우로, 조안, 프란시즈, 알렉시스, 라일리, 엠마, 알베르토, 그리고 나. 그들과 그렇게 웃으며 걷는 날들에는 힘들어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레온에서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며칠은 혼자 걸었다.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이 아직도 너무나도 많았다. 레온에서부터 한동안 혼자 걷다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문화를 공유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느 날은 채식에 대한 의견이 강한 독일 친구 한 명과 육식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미국 친구 한 명과 그렇게 셋이 걸었다. 하루 종일 이 둘의 의견 다툼을 들으면 걸었다. 채식을 하면 어떻고 육식을 하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이미 토론을 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산티아고까지 조금 서둘러야 했다. 몇 해 전, 북쪽 길을 걸을 때 만났던 친구가 산티아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 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를 100km 정도 남겨두고 나는 걷는데 박차를 다했다. 하루에 40km를 넘게 걷는 그야말고 행군이었다. 걷는 길은 그래도 즐거웠다. 한 손에는 스페인의 맛난 와인이 들려 있었고,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서의 낮잠은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티아고에 도착 했고, 산티아고대성당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을 만났다.


그와 함께 나는 산티아고에서 피네스테라, 묵시아를 거쳐 해변을 따라 포르투까지 보름을 더 걸었다. 포르투에서 산티아고까지도 포르투갈길로 잘 알려진 길인데, 우리처럼 반대로 걷는 이들은 없었다. 걷다 보면 사람들이 소리치곤 했다. '야! 너네 반대로 가고 있어' 그럼 우리도 따라 소리쳤다. '알아! 우리는 포르투로 갈 거야!'


스페인 국경을 지나 포르투로 가는 해변길은 작은 마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포르투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걷는 포르투갈은 처음이었다. 일단은 커피값과 음식값이 스페인보다 조금 저렴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너무 친철했고,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확실히 더 많았다. 반면 스페인은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나와 같이 걷던 그는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데, 포르투갈에서는 영어가 통하는 경우가 많아서 좋아했다. 산티아고에서 약 일주일 걸었을 뿐인데 우리는 포르투갈에 다 달아 있었고, 스페인과는 묘하게 다른 포르투갈의 공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대서양을 끼고 한참을 걸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지만 대서양의 물은 지중해의 것과는 대조되게 차가웠다. 가끔 걷다가 덥고 힘이 들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대서양은 '내가 바로 대서양이야!'라고 소리치는 듯 차갑고 파도는 거셌다.


사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금방 포르투에 도착해 버렸다. 그렇게 걸음을 멈춰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우리는 포르투에서 히치하이킹을 해 차를 얻어 타고 스페인 살라망카로 돌아왔고, 나는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다. 그래도 분명 내 마음에 전과 같이 외롭지 않았다. 나의 몸이 강인해진 것 같이 마음도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다. 앞으로 내 마음을 휩쓰는 작은 파도들을 이겨낼 힘이 조금 더 생겼음에도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리워할 사람들이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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