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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홍진 Aug 03. 2018

꿈꾸는 이들을 위한 찬가, <라라랜드>

  장르 영화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그 통념을 보기 좋게 깨부수는 작품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킬 빌’이 그렇고 ‘다크나이트’가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르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킬 빌’은 독특한 리듬감과 장르에 대한 애정으로, ‘다크나이트’는 치밀한 연출과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뮤지컬영화 ‘라라랜드’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의 방식을 따른다. 영화는 그 모든 의미에서 리드미컬하며, 예술 전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순간적인 위트도 상당해서 곱씹다 보면 꽤나 ‘타란티노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1)의외성과 변박의 쾌감, 리듬

  영화에서 리듬감이라 하면 편집이나 음악의 리듬감을 이야기할 수도, 플롯 자체의 리듬감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라 랜드’는 두 가지 모두 탁월하다. 이 중 플롯의 리듬감이 특히 돋보인다.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리듬감은 규칙적인 반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의 규칙성이 파괴되는 지점에서 리듬감이 태어난다. 정교하게 규칙을 쌓아올리는 것만큼이나, 시의 적절하게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리듬감은 규칙적인 것과 불규칙적인 것의 조화 속에서, 전형성과 비전형성의 만남 속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라라랜드’에서 전형성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장르 영화라는 속성 자체가 전형성을 보장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뻔하다. ‘꿈꾸는 주인공들의 운명 같은 사랑과 좌절’, 혹은 ‘일과 사랑 사이의 선택과 결과’같은 이야기는 수백 번도 넘게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한 대략적 그림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비전형성인데, ‘위플래쉬’의 강렬하고, 때론 극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비틀기나 비꼬기의 흔적은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감독은 대신, 장면의 배치나 플롯을 통해, 전작에 비해 상당히 점잖은 방식으로 엇박을 구사한다. ‘위플래쉬’에서는 관객의 예측을 뒤집는 방식으로 리듬감을 만들어냈다면, ‘라라랜드’에서는 관객이 기대하는 장면들을 밀거나 당기는 방식으로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자르고 붙이고 늘이고 줄이면서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음악적인 접근이기도 하다. 도돌이표나 악센트, 안단테나 알레그로 같은 음악부호가 떠오르는 장면이나 연결점들이 존재하며, 전체 플롯은 비발디의 사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먼저 오프닝부터가 새롭다. 꽉 막힌 도로에서 누군가 내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도로는 순식간에 거대한 무대가 된다. 수십 명의 인물이 현란한 춤을 추고, 카메라도 과시적인 롱테이크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언뜻 잉여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이후 이야기가 펼쳐질 꿈같은 공간, ‘라라 랜드’의 속성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그곳은 음악으로 대화하는 공간이고,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이며, 무엇보다 꿈꾸는 자들을 위한 공간인 것이다. 뮤지컬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분명 화려한 장면들을 기대했겠지만, 오프닝에서부터 이런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의 끝자락에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전체를 놓고 봐도 오프닝만큼 화려한 장면을 찾기 힘들 정도로 힘을 많이 준게 보인다. 오프닝의 강렬함 속에서 용케 이성의 끈을 붙들어 맨 관객이 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이 영화는 뭔가 다르다!”
            

고속도로에서의 오프닝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파티를 충실히 담은 카메라는 곧바로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에게로 시선을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두 주인공의 시선이 처음으로 교차하는데, 이 시점부터 둘의 두 번째 만남까지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미아의 이야기로, 두 번째는 세바스찬의 이야기로. 말하자면 도돌이표의 방식인 것이다.

  미아는 기본적으로 짠한 캐릭터다. 배우 지망생이지만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커피숍에서 헐리우드 스타들을 상대하면서 상당한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파티에 가서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투영한 것 같은 보랏빛 하늘의 LA를 걷던 그녀는 정체 모를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클럽 안으로 들어간다. 미아의 쌉싸름한 이야기에 몰입한 관객들은 이 시점에서 어떤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야속하게도 시간을 원점으로 되돌려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만남의 시점을 유보한다.

  세바스찬도 미아와 꼭 닮은 처지다.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재즈 피아니스트이지만 세상은 더 이상 재즈를 원하지 않는다. 재즈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는 할 말도 없다는 음악인이 식당에서 캐롤을 연주하는 모습은 웃기면서도 처연하다. 그 처연함 속에는 생활인으로의 삶과 예술가적 욕망의 갈등이 놓여있다. 결국 예술가적 욕망을 선택하긴 하지만 그리 통쾌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박수를 받지도 못한 채 일자리마저 잃기 때문이다. 그의 처지도 미아 못지않게, 혹은 미아보다 더 딱하다. 둘이 만난다면 그 만남은 분명 운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은 타이밍이다. 그러나 감독은 둘의 만남을 허무하게 흘려버림으로써 관객들의 기대를 또다시 쳐낸다. 이미 한번 유보된 만남을 미완으로 남겨둔 이 선택은 이후에 이어지는 관계에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후반부의 플래시백 장면의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늘이기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식은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를 연상케 한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둘의 사랑은 상당히 절제된 형태로 드러난다. 밤거리를 걸으며 서로가 서로의 타입이 아님을 주장하기도 하며, 같이 영화를 보자는 말에도 굳이 연구목적이라며 군말을 덧붙인다. 시종일관 느리게 진행되던 영화는 ‘천문대 씬’을 기점으로 드디어 템포를 바짝 끌어올린다. 말하자면 관객과의 밀당 같은 건데, 상당히 능숙하다.

  후반부의 플래시백 장면은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황홀하고도, 리드미컬한 장면일 것이다. 둘의 사랑이 좌절된 현실의 쓸쓸함 위에 세바스찬의 피아노 선율이 들어앉고 카메라는 둘이 두 번째로 대면했던 그 클럽으로 돌아간다. 앞서 무심히 흘려버렸던 둘의 관계를 키스로 붙들면서 영화는 빠르게 새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춤을 추는 듯한 이 장면은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적인’ 장면일 것이다. 그 속에는 변박의 쾌감과 함께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마법 같은 힘이 자리하고 있다. ‘휴고’나 ‘시네마 천국’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마법을 로맨틱 뮤지컬에서 마주하는 것은 꽤나 가슴 벅찬 경험이 될 것이다.
  

플래시백, 혹은 상상씬



2)그 모든 사랑에 관하여
     
  말 그대로 사랑으로 넘쳐나는 영화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사이사이에 예술에 대한 사랑이 깊게 배어있다. 각각 피아니스트와 배우 지망생인 두 남녀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때때로 두 예술가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다. 특히 세바스찬은 미아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자면 ‘위플래쉬’의 앤드류와 겹치는 지점들이 있다. 물론 앤드류만큼 광적이진 않지만, 세바스찬도 나름의 확고한 음악관이 있다. 락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는 것은 ‘진지한 음악가’의 일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하고, 재즈가 싫다는 여자를 클럽으로 데려가 재즈의 매력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좋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한탄하고 자기만이라도 그것들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적어도 스스로의 지향에 대해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쉽게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현실적 문제, 또는 미아와의 사랑을 만나면서 좌절되기도 하는데 이 지점들에서 영화 중 가장 처연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앞서 언급한 클럽에서 캐롤을 연주하는 장면이 그렇고, 밴드 공연에서 미아가 보는 앞에서 키보드를 연주할 때가 그렇다. 재즈는 악기들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하던 그의 피아노 소리가 전자음에 묻히는 순간, 그의 얼굴에 드리운 체념의 표정, 그것을 지켜보는 미아의 표정이 쉽사리 잊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영화에 대한 사랑도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헐리우드는 그곳이 꿈의 공장이라 불리던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의상이나 카메라에 포착되는 LA의 풍경들도 상당히 고전적이다. ‘이유 없는 반항’같은 작품은 영화속에서 상영되기도 한다. 이때 필름이 타버리고, 이후에 상영관이 문을 닫는 장면들은 고전의 몰락에 대한 알레고리로, 재즈의 몰락과 함께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안타까움의 정서를 뒷받침한다. ‘카사블랑카’,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작품에 대한 레퍼런스나 오마주도 보인다.

카사블랑카 오마주


  오마주나 레퍼런스는 창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창작자는 고전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고 관객들도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감독과 관객 사이에는 모종의 연대감이 형성된다. 물론 그 연대감의 근원은 '영화에 대한 사랑'이다. ‘저수지의 개들’이나 ‘펄프픽션’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정성일이 결국 ‘킬 빌’을 인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델로니어스 몽크를 동경하는 주인공이 ‘사랑은 비를 타고’를 따라 하며 ‘이유 없는 반항’을 관람하는 이 영화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3)영화에서 삶으로, 삶에서 영화로

  앞서 언급한 필름이 불타는 장면을 조금 더 낭만적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려 한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던 중 필름이 타버리자 미아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아마 영화에 등장하는 그리피스 천문대로 가서 영화에서처럼 별을 구경하자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둘은 곧 천문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하늘을 날며 춤을 춘다. 상당히 로맨틱하면서도 영화적인 장면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영화가 끝나버린 지점에서 현실의 사랑을 통해 다시 영화적 장면을 연출해 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를 날아다니다 안착해 키스하는 장면은 하나의 작은 엔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요컨대 둘의 행위는 결국 ‘미완의 픽션을 현실에서 완성시키는 행위’다. 곱씹어 보면 이는 꿈의 속성과도 비슷하다. 특히 미아의 꿈이 그러한데,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결국 영화 속 세계를 벗어나 현실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는다. 

  앞에서 언급한 장면이 영화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라면 플래시백 장면은 삶에서 영화로 이어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영화적 상상’을 통해 완성시킨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장면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혹자는 영화를 비롯한 예술이 현실의 문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누군가는 삶이라는 것의 팍팍함을 지적하며 영화 속 세계에 빠져 살기도 한다. 낭만과 현실의 대립으로 치환되는 이 대결에서 ‘라라랜드’는 쉽사리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낭만과 현실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둘은 화해하며 영화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을 연출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영화와 삶이 서로 관계하는 역학에 더 관심이 있는 듯 하다. 영화가 멈춘 지점에서 삶이 시작되고, 삶이 닿을 수 없는 지점을 영화가 채워 넣는다. 이것이 '라라랜드'가 바라보는 영화와 삶의, 낭만과 현실의 관계인 것이다.
“서로 부딪히고, 화해하고, 진짜 환상적이야!” 
그래, 삶은 진짜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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