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홍진 Jun 03. 2019

<기생충>, 그 힘을 중심으로

 이건 누가 봐도 봉준호다. 이야기는 예측 불가능하게 튀어 오르고, 장르적인 관습,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웃음이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은 어딘가 살짝 비틀린 형태로 영화에 적용된다. 상징과잉이라 느껴질 정도로 비유들이 범람하지만, 대부분이 관람 과정에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늘 그렇듯, 봉준호는 이번에도 보편적 문제의식을, 어렵지 않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허하다. 앞선 수사들이 훌륭한 ‘영상 카피라이터’로서의 봉준호에 대한 찬사가 될 수는 있어도, 거장 봉준호의 명예에 썩 걸맞는 종류의 태그인가? 예술이란 말 자체가 그 기술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예술적 성취가 기술적인 접근만으로 도달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봉준호가 재능 있는 스토리텔러임은 분명하다. 동시에 봉준호의 영화에는 번뜩이는 영감들과 기이한 힘이 있고, 기생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상징 하나하나의 원관념을 찾아낸다 한들 그것이 퍼즐 놀이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나. 관객들이 영화를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적 계층구조를 높낮이로 표현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힘이 발생해 관객들에게 닿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는 그 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영화 ‘괴물’을 떠올려보자. 괴물이라는 대상이 상징하는 관념이 있다. 괴물이라는 대상자체가 주는 분노와 공포감이 있고, 그것이 상징하는 관념이 원래 지니고 있는 분노와 공포감이 있을 것이다. 괴물이 상징하는 그 관념에 대해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을 쭉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와 닫는 표현은 ‘우리 사회 속 괴물들’이라는 재귀적 표현이다. '괴물'이라는 이 훌륭한 영화는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을 할애한 끝에 마침내 텍스트로 환원될 수 없는 ‘영화적인’ 상징을 구축한 것이다. 영화적인 상징이라 함은 단순히 복합적인 상징이 아닌, 활력을 동반한 상징이다. '괴물' 이후 우리는 공동체가 가진 문화적, 제도적 모순과 그러한 모순의 희생양들을 볼 때 공포스럽게 약자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과 그 힘을 떠올린다. 달려드는 힘. 이러한 인상은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의미를 부여 받고 영화 속으로 던져진 괴물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스스로의 속성과 의미관계를 확장하면서 내달린 결과물이다. 결국 괴물은 죽지만 동시에 산 채로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이 뛰쳐나오는 힘은 기생충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기우네 가족의 반지하 집 화장실

 ‘기생충’의 경우를 보자. 반지하와 대저택, 그 사이의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영화 초반부에서 이미 제시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을 (거의)모두 보여줬을 뿐 아니라, 그 사이의 위계질서까지 영화의 전반부에 모두 드러낸 것이다. 물리적 높낮이에 사회적 계층을 투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투적이다. 관건은 영화가 그런 상투적인 은유에 어떠한 ‘영화적’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이다.


 영화의 톤이 바뀌는 중반부, 그러니까 전 가정부가 등장하기 까지의 언덕은 오르막길이다. 기우네 가족의 상승을 향한 열망과 어긋남 없는 계획은 그들은 언덕위의 집까지 올려놓는다. 그들의 침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쉽게 이루어진다. 이야기, 톤, 리듬, 카메라까지 모두 상승이다.


 상승의 이야기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은 전 가정부의 등장으로부터 촉발된다. 아니, 사실 그 전에 암시가 있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항상 마법 같은 순간을 연출했던 그 ‘비’ 말이다. 봉준호의 작품세계를 주의 깊게 관찰해왔던 관객이라면 비가 내리는 순간에 이미 어떤 불길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기우네 가족들은 술을 마시고, 팔자 좋은 그들과는 다르게 이미 영화는 대화의 미묘한 텐션과 폭우, 캠핑을 떠난 가족이라는 암시들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갑자기 병을 깨더니 크게 웃는 기택의 모습을 보라. 이 얼마나 불길한가.(이 순간 이후로 기택은 몇차례의 일그러짐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가장 불길한 암시들은 모두 송강호의 얼굴에서 비롯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열리는 새로운 공간. 좁은 어둠의 통로를 따라 내려간 관객, 기우네 가족은 반지하 외의 또다른 지하를 본다. 첫번째 하강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대소동은 작은 상승-하강의 반복이다. 한바탕 소동이 정리되고 이어지는 대하강.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과 함께 인물들은 내려간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그들의 집이 물에 잠긴 것을 확인했을 때의 처참한 광경에서, 영화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극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들을 여럿 집어넣는다.(일단 하나만 먼저 이야기하도록 하자.) 담배를 문 채 역류하는 변기 위에 앉은 기정을 보라. 기정의 화장실에서 물은 하강하며 동시에 파괴적으로 상승한다. 겉잡을 수 없이 흘러내려오는 물이 있고, 반대로 겉잡을 수 없이 역류하는 탁류가 있다. 상승과 하강의 충돌. 영화를 지배하던 두 운동이 한 쇼트 안에 응축된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폭발이 일어난다. 영화적 폭발 말이다. 폭발은 힘의 분출이다. 영화적 폭발은 관객에게, 인물들에게, 이야기에 힘을 부여한다. 폭발 이후 바뀐 송강호의 눈빛을 보라. 기우의 태도를 보라. 마음껏 폭주하는 이야기를 보라. 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영화적 사건들의 동력은 이 한 쇼트, 폭발의 쇼트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이후의 사건들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들의 죽고 죽임에는 충동과 분노 이외에 어떤 것도 없다. 말 그대로 폭력이 흐르고, 인물들은 그 흐름에 휩쓸린다.(‘복수는 나의 것’이 폭력을 그리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 흐름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 이후의 이야기를 파헤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분석이다. 필자는 원인이 되는 그 폭발에 대해 더 파고들어보려 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 과연 그 폭발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장치인가, 혹은 ‘기생충’이라는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자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이 흐르는 것은 내리막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지점에서 물이 역류하는 것은 더 높은 지점에서 물이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리막은, 이 고점과 저점은 영화의 시작부터 존재해 마지막까지 남는 유일한 것이다. 애초에 공간의 설정에서부터 (물리학적 개념을 빌리자면) 높낮이에 의한 중력 퍼텐셜의 차이가 있었다. 두 공간 사이에 놓인 텐션이 어떤 형태로 분출되는지가 영화의 관건이었을 뿐, 텐션 자체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 끝에 바뀐 것은 무엇인가. 반지하는 여전히 가장 낮은 곳에, 저택은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저택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또한 마음에 구김살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두 공간 사이에는 언제 분출될 지 모를 강렬한 힘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다시 비가 온다면 반지하는 물에 잠길 것이고, 그곳에서 분명 무엇인가가 터질 것이다. 다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건 전적으로 내리막의 탓이다. 그러니 영화를 바탕으로 우리의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논하려면, 먼저 그 내리막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산수경석의 첫 등장

 앞서 반지하에서의 역류를 이야기할 때 넘어간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장면이고, 이면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온 또다른 힘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산경수석이 물에 떠오르는 그 장면 말이다. 애초에 이 산경수석은 등장부터가 수상했다. 수석을 내려다보는 기우를 역으로 올려다보는 수석의 시점숏이라니. 이건 뭔가 이상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뒤, 물난리가 난 반지하에서 정확히 상응하는 쇼트가 등장한다. 수석을 내려다보는 기우의 시점숏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곤 기우의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수석을 보라. 마법처럼 나타나 기우네 가족에게 돈을 안겨주더니, 끝끝내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 이 돌덩이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욕망에 대한 상징물이라고 어물쩡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 돌덩이에 부여된 기묘한 힘을 그런 식으로 지워버리는 건 옳지 않다. 확실한 것은 영화의 시작과 전환, 결말에 이 이상한 돌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영화적’인 이 돌에 대해, 그것이 숨은 축으로서 영화를 이끈 힘 대해 오래 고민해보게 될 것 같다. 여태껏 봉준호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었던 질감의 낯선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작가의 이전글 죄와 용서의 이야기, <영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