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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홍진 Jun 10. 2019

그 모든 혁명에 관하여, <품행 제로>

 영화는 달리는 열차 속 아이들을 담으면서 시작된다. 열차 속 아이들은 과시적으로 각자의 장난을 뽐낸다. 손가락 절단 마술로부터 시작된 그들 만의 유희는 종국에 흡연으로 마무리된다. 열차는 멈추고, 뜬금없이 죽어버린 옆자리의 승객을 뒤로한 채 그들은 목적지인 학교로 향한다.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한 눈에 봐도 엄하고 규율적이다.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이미 목도한 관객들은 단번에 그들이 학교와 충돌할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등교 첫날 기숙사에서부터 그들은 규율과 충돌한다. 이후의 장면에서까지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충돌은, 영화 자체가 무엇을 그리려 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그들은 학생들을 통제하고 감시한다. 그들은 검은 옷으로 스스로를 꽁꽁 싸맨 채 외출 금지라는 처벌을 무기로 아이들이 가만히 있도록 강요한다. 심지어 학생들의 물건을 훔치는 행태는, 조금 과하긴 하지만서도 그들의 부당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위게 선생님의 행동이다. 아이들의 일탈을 감시하는 다른 선생들과는 반대로, 위게 선생님은 일탈하는 아이들을 등지고 선다.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행동은 채플린을 따라하는 이 선생님이 다른 선생들과는 어딘가 다름을 보여준다. 아이들과 선생들 사이의 두가지 대립, 동-부동의 대립과 흑-백의 대립에서도 위게 선생님은 빠져있다. 빠져있다는 표현은, 그가 양자대립 속에서 그 누구의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가 다른 선생들의 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아이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른들의 억압에 진절머리가 난 아이들은 새로운 일탈을 계획한다. 혁명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지지부진하던 계획은 투쟁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인물들마저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급물살을 탄다. 축제날을 디데이로 정한 아이들은 혁명전야에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를 벌인다. 새하얀 배게 깃털이 눈처럼 날리는 이 장면은 선생들과 학교의 어두침침한 이미지와 대립하면서 우아한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낸다. 헐벗은 아이들과 흩날리는 깃털은 마치 천사의 행진처럼 숭고한 느낌마저 준다. 아이들을 악마라 지칭했던 도입부를 멋드러지게 뒤집으면서 만들어낸 명장면인 것이다.


 슬로우모션까지 활용해가며 잔뜩 힘을 준 이 장면이 혁명 이후가 아니라, 혁명 전날 밤에 위치하게 한 선택 또한 장면의 힘을 강화해준다. 전복 이후에는 곧바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고, 전복의 과정은 치열한 투쟁이니, 진정한 축제의 순간은 혁명 전날이야 하는 것이다. (사견을 보태자면 레미제라블의 킬링넘버는 혁명 전날의 이야기를 담은 ‘One day more’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은 결국 마네킹을 넘어뜨리고 선생들을 다락방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승리한 아이들은 나란히 지붕 위를 오른다. 그러나 정작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홀로 채플린 스텝을 밟고 있는 위게 선생님이었다. 이건 분명 이상하다. 문득 이 인물은 좀 더 정밀하게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기차에서 죽은 승객은 사실 위게 선생님이었다. 죽었다 살아나 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이라니! 이 뿐만이 아니다. 위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그린 그림이 갑자기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장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위게 선생님을 그저 조금 이상한 인물 정도로 읽으려 한다면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게 선생을 도대체 무엇으로 봐야 하는가. 다른 인물들과 동일한 층위에 위치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가.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 등장하는 ‘검은 비니를 쓴 남자’ 처럼 특정 관념을 의인화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프랑스의 7월혁명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에서 프랑스 국기를 들고 전면에 선 여신처럼 신 그 자체, 혹은 신에 의해 대변되는 혁명의 정신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두 경우 모두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아니, 사실 두 경우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부활은 신을 표현하는 가장 흔한 기독교적인 메타포 중 하나이고, 위게 선생님의 유희정신과 자유로움이 아이들의 혁명 정신에 부합하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영화라는 닫힌 세계의 신이 곧 감독임을 생각한다면, 애니메이션을 창조하는 위게 선생이 감독 자신의 영화 속 대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약간의 비약을 섞어 정리하자면, 그는 아이들의 혁명을 이끄는 유희정신 그 자체이며, 혁명을 지지하나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하는 영화의 창조주인 장 비고의 영화 속 대리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림과 동시에, 혁명 이후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선지자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위게 선생님의 선지자적 모습은 산책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아이들이 따라오든 말든 자신의 길을 간다. 아이들은 발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서로 다른 길을 가던 아이들과 선생님은 결국 다시 만난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뜀박질과 선생님의 선지자적인 걸음이 양갈래길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장면은 어쩌면 영화 자체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성급한 감이 있지만, 이쯤에서 좋아하는 노래의 한 소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The kids will be alright, just fine. (Asap Rocky-Kids turned out fine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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