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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로디 Jun 30. 2020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북아프리카 히포의 위대한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후 354년에 태어나 430년에 생을 마감했다. 살면서 딱 5년을 제외하고는 북아프리카에서 생을 보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보다는 북아프리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히포는 현재의 알제리로 인생 후반부인 34년을 이곳의 주교로 살았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 히포의 위대한 사상가


초기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회는 다섯 지역으로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이었다. 그런데 이곳과는 거리가 떨어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교부들이 활동했다. 라틴교회 즉 서방교회의 신학 용어집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테르툴리아누스와 교회의 단일성을 주장한 키프리아누스가 이곳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교부들이었다. 


이곳 북아프리카 지역은 현재의 튀니지 일대였던 고대 카르타고 지역을 말하는데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를 점령한 로마는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해안 지역의 거주를 전면 금지시킨다. 그리고 100년간 오랜 페니키아 문화를 모두 말살한 후 제2의 로마라 불릴 정도의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의 이주민을 이곳으로 보내며 라틴어를 사용하는 라틴문화가 뿌리내리게 했다. 이런 이유로 카르타고 지역은 로마의 박해 때 가장 심하게 탄압받은 곳으로 순교자들이 많이 나왔던 지역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니카’였다. ‘기도하는 자식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는다’는 명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술이나 음식을 탐하지 않았지만 성욕이 강했다. 열일곱 살 무렵 카르타고에서 노예였거나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여자와 사귀어 동거를 했고 이때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다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1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하며 마니교도들과 어울려 지낸다. 이 시절 그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 대해 전투적으로 비판하며, 교회 신자들에 비해 자신이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다. 20대였던 이 시절 그는 라틴문헌뿐 아니라 수사학을 공부하고 가르쳤는데 그러다 마니교의 한계를 느끼며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회의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수 없이 읽었고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던 중 384년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지방에서 올라왔고 결혼하지 않은 여인과 동거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을지 모른다는 염려를 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첩과 아들을 카르타고로 돌려보낸다. 그리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앞길에 든든한 힘이 되어줄 집안의 나이 어린 신부와 결혼시킨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아내가 성장해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며 문란한 생활을 이어갔다. 결국 이런 문란한 생활에 깊은 회의감이 몰려오게 되며 깊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와 회심


그러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나게 되며 그의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기독교 지식인들을 만나며 교재 하게 된 그는 어린 시절 키케로에게 빠졌던 시절로 돌아간다. 그래서 열정과 육체적 감각들을 억누르라는 신 플라톤 주의를 통해 사고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가 쓴 <고백록>에 따르면 유한한 피조물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간절히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고, 유한한 피조물의 자기실현은 자기를 넘어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정의할 수 없고 묘사할 수도 없는 존재 안에서만 경험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는 서른한 살의 아우구스티누스를 교회로 향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신플라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존재가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는 것에 고민한다. 특히 성적 충동은 여전히 그를 타락의 길로 잡아끌고 있었다. 그러다 386년 7월의 끝자락에 집 정원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단을 한다. 교수직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했다. 그리고는 387년 부활절에 밀라노의 집 정원에서 암브로스에게서 세례를 받게 된다. 


388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른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고향인 타카스테에서 평신도 공동체를 시작한다. 날마다 모여 기도하고 시편을 낭송했다. 기도 시간 사이에는 키케로, 바울, 신플라톤주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공부했다. 이 모임은 ‘형제들의 모임’이라고 불렸고 재산을 공유하고 간소하면서 단순한 삶을 살았다. 이곳에서 2년 정도 지내며 영성을 쌓아가고 공부와 집필에 매진한 그는 391년 초 히포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된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도나투스파가 주류여서 로마 가톨릭의 세력이 미약하던 때였다. 수도원을 꿈꾸는 그가 주교가 되는 것에 부담을 갖고 있는 것을 안 히포의 노 주교는 성당 옆에 수도원을 지어 주겠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수도원 생활과 함께 주교의 삶도 살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요 논쟁

                      _성례전 논쟁, 은총론, 삼위일체론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적인 사상은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한 교회와 성례전 교리 그리고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한 은총론 그리고 삼위일체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가장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이들의 순교자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더 강하게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런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태동된 것이 도나투스 운동이었다. 이들은 로마의 박해가 세상 종말의 징조라 여겼으며 그래서 자신의 땅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았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평안한 로마 가톨릭은 로마와 손을 잡은 배교 집단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배교한 성직자가 집례 하는 성례전은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는 집례자에 따라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 아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나투스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성례전 논쟁의 핵심이다. 


펠라기우스는 당시의 로마 교회가 지나친 은총론에 빠져있어 모든 문제를 덮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로마 제국에 기댄 교회와 주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은총 신학으로 퉁 치려고 한다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로는 펠라기우스의 지적을 부정할 수 없었지만 교회를 개혁하려는 그의 주장은 교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 성화,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을 강조한 것이다. 이 주장은 훗날 루터와 에라스뮈스의 갈등에 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역사에서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것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은 당시 철학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스나 로마인들은 계절이 바뀌듯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는 순환론적이고 운명론적 사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역사관이 아닌 히브리적인 역사관을 세상을 이해한 것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목적론적 역사관이었다. 그래서 신의 세상을 ‘창조’ 했는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가 ‘창조’의 순간부터 ‘시간’도 의미가 있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세상을 보며 해석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관을 토대로 인간과 죄와 구원에 대해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를 재해석해 나갔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그의 ‘원죄’ 이론에 대해 인간이 완벽해지는 것에 대해 가장 방해하는 이론이라며 매우 싫어했지만 계몽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칸트가 인간 본성은 편재하는 근본 악으로 인해 왜곡되었다는 믿음에 단호히 동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낭만주의에서는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지성이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중요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덕에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신의 은총보다 인간의 노력에 집착했던 중세 가톨릭을 비판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의 영상을 참고 하세요.  https://youtu.be/G_pO-Dmol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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