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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군 May 02. 2021

당신의 조각들

세례, 이발, 쇼핑몰

#세례


“세진이 데리고 멕시코 한번 가면 좋은데. 세찬이때처럼 세례도 받고 오고? 세진이 대모는 누구로 하면 좋을거 같아?”

어제 저녁에 남편에게 물어봤다.


세찬이가 6개월 때 시가족과 함께 멕시코에 2주정도 다녀 왔었는데, 계획에는 없었지만 즉흥적으로 세찬이 세례 계획을 잡고 동네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왔다.

남편, 시아버지, 남편의 형제들 중 아무도 교회/성당에 안나가신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신실한 카톨릭교인이셨고, (성당 안나가는 가족들 영향으로) 성당에는 안나가실지언정 늘 믿음을 갖고 살아오셨었다.

그래서 내가 세찬이 세례 받으면 좋겠다고 얘기 했을때 제일 좋아 하시며 열심히 추진하는걸 도와주셨다.


“우리 멕시코 또 갈지 안갈지 모르겠다. 멕시코 가는 의미가 이제 없는 것 같아.”

돌아온 남편의 대답이 의외였다.

작년 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남편은 종교적 믿음이 더 없어진 것 같다.

그 전엔 그래도 신이 있나 없나 긴가민다 했다는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신은 없는걸로 나름 확신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도 세진이 세례 하고싶으면 해. 근데 멕시코에는 별로 가고싶지 않아.”


이해 한다. 남편은 내가 뭐 하고싶어하는거에 안된다고 혹은 반대 의견을 내는 법이 없다.

나도 시어머니가 가끔 너무 그리운데.

30년 넘게 어머니와 지내온 남편은 오죽 할까.



#이발


코로나 바이러스가 미국에 사는 사람들 삶에 영향을 본격적으로 끼친건 2020년 3월 정도였던 것 같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왔고, 나도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했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생필품 쇼핑 하러 일주일에 한두번 나가는 것 말고는 거의 집콕 하게 된 것.


이발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남자들이 다들 20+여년간 가던 미장원/이발소가 있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집안 남자들 머리가 주체할수 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세진이를 임신한 몸이었지만 내가 자원해서 집안 남자들 머리를 잘라주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싹뚝싹뚝, 좀 망할뻔한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은 또 자란다며 가족들이 허허 웃어넘겨주곤 했다.

(실제로 시아버지 옆머리를 쥐파먹은것 처럼 자른적도 한번 있었다.)


이제 다들 백신들도 맞았고 코로나도 조금은 주춤 하는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시아버지와 남편 머리는 내가 잘라주고 있다.

(세찬이 머리도 내가 잘라주고 싶지만 잘 안대준다.)


오늘도 시아버지 머리를 잘라드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세진이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 간다는 이야기.

세찬이 6개월때 사진들 찾아보면 세진이랑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

세찬이 어릴때 사진과 비디오 속엔 시어머니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

시어머니는 늘 딸을 원하셨다는 이야기 (아들만 셋).

시어머니가 세진이 크는거 보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이야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30+년을 결혼해 살아오셨는데.

몇년 전 결혼 30주년 때에 시아버지는 “30분정도로밖에 안 느껴지는 시간이었지. 물 속에서의 30분...” 하며 농담도 하셨었다.


작년 11월 두분의 3x년째 결혼 기념일 기념으로 시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딸기 케익을 사왔었다.

시어머니는 집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받고 계시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병원 침대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케익을 나눠 먹었었다.

두 분이 같이 보내는 마지막 결혼 기념일이 될 거리고 믿지 않았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



#쇼핑몰


4월 30일. 멕시코에 사는 친척이 나에게 sns 메세지를 보내왔다.

“세찬이랑 세진이가 행복한 어린이날 보내길!”

미국에는 없는 어린이 날이 멕시코에는 있구나 생각 했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한국에서도 어린이 날이 이맘때쯤이란게 불현듯 기억 났다.


한동안 밖에 잘 안 나가서 세찬이가 외출용 신발을 신을 일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운동화들 사이즈에 비해 세찬이 발이 많이 커지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세찬이가 꼬맹이 시절에 큰 사이즈의 장화를 사주셨었는데, 어디 나갈 일 있으면 이 장화로 때우곤 했지만 이제 이 장화마저 작아지고 있었다.


어린이날 겸, 세찬이 신발 살 겸 해서 (코비드때문에) 지난 1년여간 안갔었던 쇼핑몰에 가기로 결정 했다.

남편이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난 마음 속에서 작게 “쿵” 하는걸 느꼈다.

시어머니랑 자주 갔던 쇼핑몰이고, 또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로 처음 가는 거라 괜히 슬퍼지면 어쩌나.

괜한 걱정이길 바라며 쇼핑몰에 갔다.


생각보다 사람이 꽤 많았지만, 그래도 주말 치고 (코비드

전에 비해) 주차장도 쇼핑몰도 많이 한산했다.

세찬이 신발, 내가 좋아하는 초콜렛집의 초콜렛 1 kg 어치 등을 사고 이제 세찬이 장난감을 사러 디즈니 스토어에 가려고 하는데, 발걸음을 멈칫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세찬이 좋아한다며 군것질 거리를 한봉지 가득 사곤 하셨던 그 가판대였다.

옆을 지나며 남편이 나에게 “여기서 뭐좀 사갈까?” 하는데 차마 멈춰서 뭘 사질 못하겠는 것이었다.

“에스텔라 (시어머니) 생각나서 안되겠어, 그냥 가자. 쇼핑몰 오면서 에스텔라 생각 많이 날 거 알았지만 여긴 정말 안되겠어.”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에스텔라 생각 나지?” 물어보는 내 말에

“엄마 생각은 항상 하지. 그래도 슬퍼하진 않으려고 해. 늘 엄마 생각 나긴 하지만 그냥 그거는 그거대로, 살아가는 건 살아가는거 대로 하려고 매일매일 노력 중이야” 너무도 담담하게 얘기 하는 남편.


세찬이는 나 혹은 남편이 시어머니 얘기 할때마다 우리 눈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해준다.

“There is nothing to be sad (슬퍼할 것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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