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려고 옷장 문을 열었다.
언제 받은 것인지 어렴풋한 화장품상자들.
그 옆 구석에 딸이 선물한 안마기박스.
그 사이에 철 지난 회색 양복 한 벌이
비집고 걸려 있다.
신발장을 열었다.
서로 짝은 안 맞아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뒤엉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발들.
눈을 들어 가장 위칸을 보았다.
비어있는 자리의 가운데에
구두 한 켤레만이 당당하다.
어느 겨를에
둘 사이에 가느다란 냇물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냇물은
바닥을 훑고 흘러 깊어지고 넓어졌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그 강을 건너 오려하지 않았다.
이제 냇물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둘 사이를 흐른다.
그의 나약하고 허술한 자존심이 가라앉아 있다.
그의 안개처럼 가벼운 존재감이
저 끝 어딘가
물살이 되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