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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아버지 그리고 엄마

by 오롯한 미애

새벽부터 비가 내린 궂은 날씨이지만, 여느 때보다 부산스럽게 움직여서 친정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엄마를 뵈러 가고 싶은 마음이 몇 주 전부터 마음속에 한가득 이었고, 내가 사는 일산에서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닿는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내 상황과 시간이 좀처럼 맞지가 않아서 오늘에서야 찾아뵙게 되었다.

양손에 큰 쇼핑백 하나씩을 들고 비가 그치긴 했지만, 아직까지 눅눅한 길을 씩씩한 발걸음으로 총총히 걸었다.

그동안 엄마, 아버지께 드릴 여러 것들이 생각날 때마다 메모를 한 후, 식재료나 반찬들은 출발하기 하루이틀 전에 냉장고에 챙겨두었다. 친정에 드릴만 한 반찬들을 만들며 추가로 우리 가족 것도 함께 해서 친정에 드릴 것은 냉동실에 얼리거나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밑반찬들을 준비하다 보면 아버지와 엄마께서 무엇을 즐겨하시고 입맛이 어떻고 그때는 이 음식을 잘 드셨지, 그날에 나는 세상을 모르던 천진한 아이였었구나. 기억 너머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게도 된다. 지금에 내가 그때에 내가 될 수 없음에 가슴 한편이 아련해졌다.

아버지는 1939년생으로 올해 87세 토끼띠이시다.

아버지를 뵈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현실로 와닿는다. 나의 직장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일이다 보니, 여느 사람들보다는 다양한 나잇대에 어르신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어르신이 오시면 아버지와 의도치 않게 비교를 하게 되는데, 나의 아버지가 인지능력이나 운동신경면에서 그 나잇대의 어르신들보다 월등함을 느낀다. 사실 지극히 객관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평소 아침 7시 전에 기상하셔서 식사를 하신 후, 10시쯤 외출준비를 하시고 서울지하철이나 인천행, 수원행 지하철을 타시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오신다.

우리나라의 노인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이 제도를 유용히 쓰신다.

놀라운 것은 이 지하철노선들을 거의 외우고 계셔서 , 내가 어느 장소를 가야 한다고 하면 어디서 하차하며 환승역까지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보다 젊은 나도 일상 속에 매일 접하는 일련에 것들도 기억이 안 나서 애를 먹을 때가 많은데, 아버지의 기억력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더불어 그 장소 인근에 맛집과 볼거리까지 덤으로 알려주시니, 아버지께 인간 내비게이션이라고 했더니 껄껄껄 웃으신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도 계산능력, 숫자감각도 좋으시고 영어, 한자도 잘 아셔서 그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면 다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내가 성인이 되어 보니 아버지가 신체활동이나 인지적, 상식적인 면에서 월등 하심을 느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버지가 시대를 잘못 타고나셨다고, 요즘시대에 나셨으면 한가닥 하셨을 텐데 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아쉬움을 전하곤 했다.

아버지는 70세 초반에 첫 번째 암이 발병되어서 지금까지 정기검진을 받고 계신다.

첫 번째 암이라 하니 그 당시 방광암을 2기 때쯤 발견하여 치료를 하며 정기검진을 주기적으로 받고 계셨다. 그러던 중 요로로 전이된 요로암이 또 발견되었다. 두 번째 요로암도 2기 때쯤 발견되어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으며 70대를 지나셨다. 그 당시 아버지는 이 나이가 되면 병이 당연히 걸리고 병 없는 삶이 이상하지 않느냐며, 엄마와 자식들이 도리어 긍정적인 맘을 갖도록 안심시켰다. 아버지는 암치료가 힘들지만 무리 없이 잘 받으셔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이겨 내셨다.

그러던 중 80세 초반쯤 목에서 피가 나오고 쉰소리가 계속되어 진료를 받으셨다. 또다시 암이 발병되었다.

이번에는 후두암 2기 진단이 나왔다. 가족들 모두 또다시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이 다행스럽게도 초기라서 희망적이라며 치료를 적극적으로 해보자고 하셨다. 그 후 아버지가 치료도 잘 받고 정기검진도 잘 받으셔서 많이 회복되셨다. 현재는 1년에 한 번씩만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계신다.

한 개의 암도 건강에 위태로운데, 방광암, 요로암, 후두암을 의연히 이겨내시는 아버지를 뵐 때면 대단하시다는 말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그러면서 어렵고 힘든 치료과정을 이겨내시고 우리 곁에 계시는 아버지께 감사함도 느낀다.

아버지를 떠올리다 보니 한 가지 더 자랑하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글씨체도 참 멋지시다.

글씨체가 좋다는 표현보다는 멋지다는 표현이 더욱 걸맞은 것 같다. 젊으셨을 때의 그 글씨체가 그대로 이시다.

손에 힘이 있으시고 떨림도 없어 문체가 곧고 바르고 힘이 보인다. 그래서 나의 딸들에게 할아버지의 멋진 글씨체를 보여 주고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제 몇 년만 지나면 90세가 되신다. 백세시대인 요즘, 아버지가 이 시대에 발맞춰 사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신체활동이 조금씩 쇠약해지긴 하실 테지만, 큰 지병 없이 우리 삼 남매와 그리고 아버지보다 4살 적으신 엄마 곁에서 산너머 노을에 붉은 기운처럼 넓고 은은하게 우리들 가까이 계셔 주시길 바란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러신다. 두 분이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에 정기검진을 갔다가 연명치료거부신청서를 쓰고 오셨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여태껏 사실만큼 살았다고, 두 분 모두 우리나라 노인 평균수명보다 훨씬 많이 덤으로 살고 있다고 하시며, 오늘 죽어도 아쉬움이 없다고 남 이야기하듯 말씀하셨다. 덤덤히 말씀을 이어가시는 걸 보고 있으니, 가슴 한편에 구멍이 나서 그 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듯했다. 아버지 옆에 앉아 계시던 엄마의 말씀을 들으니, 더욱 새찬 바람이 몰아 쳤다. 엄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난 그래도 더 살고 싶어. 이 좋은 세상에 뭐 하러 일찍 가?' 여태껏 가만히 아버지 이야기만 듣고 계시던 엄마의 말에 `지금은 언제일지 알 수가 없지만 아프면 이제 그만 가야 하는 거지. 이제 그만 살아도 되는 나이지. 더 나이 들면 살아도 숨만 쉬는 거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애들도 힘들고 미련 없어.`

나는 입을 떼지 못하고 베란다 쪽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을 볼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가 지내 온 세월을 나는 까마득히 못 느끼는 무지에 나이이니 무어라 함부로 말하고 의견이랍시고 내놓는 것조차 긴 세월을 사신 아버지의 삶을 단순하게 단정 짓는 꼴 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이 좋은 세상에서 더 살고 싶다고 떼쓰 듯 말씀하시는 엄마와 그것을 타박하듯 되 받아치시는 아버지. 두 분은 나와 다른 세상에 놓여 계신 듯 이질감이 들었다. 무관심이 아니라 살아오신 그 삶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조심스러웠다. 나도 언젠가는 부모님 나이의 삶을 살게 되면 그때서나 깊은 미지의 시간들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미루어 본다.

나는 점심시간에 맞춰서 친정에 도착했다. 아버지 엄마께 내가 준비해 온 반찬과 함께 따뜻한 식사를 차려 드리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은 내가 만든 반찬들이 입맛에 맞으셨는지 처음 대하는 음식처럼 맛있게 잡수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 기회에는 좀 더 응용을 해서 재료도 아낌없이 넣고 맛있게 만들어야지 하고 드시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엄마는 드시면서 역시 우리 딸이 간도 잘 맞추고 음식을 참 잘한다며 입에 침이 마르셨다.

결혼 전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도 않고 그냥 시집보냈는데, 김장김치도 혼자서 잘 담그고, 음식도 이렇게 잘한다며 대견해하셨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결혼생활이 30년이 다 되었고, 요리는 본인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할 수 있다고 겸손한 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웃음을 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셋이서 오붓하고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차와 함께 과일을 가운데 두고 앉아서 이런저런 지나 온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고생하시며 집안을 꾸린 이야기, 지금은 몇 분 안 계신 고향 친구분들 이야기,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에 시집살이 눈물나게 하신 엄마의 이야기, 특별히 속 썩인 일 없이 무던히 자란 우리 삼 남매들, 가까운 친척들의 근황, 이제 살만큼 살아서 더는 아쉽지 않다는 마무리 이야기로 아버지의 레파토리를 끝맺음을 하셨다. 65번만 더 들으면 백번이 되는 이야기보따리를 오늘 한번 더 푸셨다. 나는 이미 차와 과일을 내놓으며 아버지의 이야기 보따리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번 거의 비슷한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처음 말씀하시듯 진지하고 실감 나게 부연 설명까지 하시니 생각만큼 지루하진 않다. 그 옆에 계시는 엄마는 내가 와도 아버지의 레퍼토리를 함께 들으시지만, 오빠와 나 남동생과 그밖에 친척이나 지인들이 오셔도 또 들으실 것이다. 그럼에도 더 크게 웃으시고, 실감 나게 감탄까지 하신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환상의 파트너란 이런 커플을 두고 하는 이야기구나 싶다. 나는 맞장구치시며 호응하시는 엄마가 더욱 재미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아버지가 젊은 나처럼 활발하게 사회활동이나 직장 생활을 하시는 나이가 아니니 어떤 드라마틱한 일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옛날 지나온 이야기를 하시며 잠잠한 마음도 동요가 일어나고 감정의 요동도 느껴 보셨음 해서 일부러 슬금슬금 이야기를 유도한다. 몇 번을 들은 이야기인데도 다 들은 후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이 참 신기하다.

나는 저녁 무렵 아쉬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며 다음 달 어버이날쯤에는 아이들과 다 함께 오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친정집을 나섰다. 늘 친정에 오면 나이 드신 탓에 살림살이가 내 마음 같지 않아서 속이 상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부모님이 몸과 마음이 젊은 나와는 달라서 조금은 완벽하지 않아도 당신 두 분의 생활패턴에 맞추시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좀 더 부지런을 떨고 몸은 피곤할지라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으니, 자주 와서 부모님을 챙겨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머지않아 부모님처럼 나이가 들 텐데 내가 아는 삶의 방식이 전부이고 옳다는 건방지고 무지하며 틀에 얽매인 사고를 갖고 있었음을 반성했다.

친정집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모퉁이를 돌기전 늘 그렇듯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엄마의 모습을 올려다 보았다. 나도 엄마의 모습을 보며 엄마보다 더욱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 위로 큰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어렴풋이 환하게 웃으시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웃음 속에 나를 향한 염려와 무엇이든 잘되길 바라는 기원이 들어 있음이 보였다. 그것은 나만이 볼 수 있다.

아버지 엄마, 아프지 마시고 오래도록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라고 되뇌며 바닥에 놓인 가방을 다시 들고 모퉁이를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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