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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Nov 18. 2019

긍정의 윤리학과 해방의 정치학

*원문서지사항: Rosi Braidotti, 'Affirmative Ethics and Generative Life', Deleuze and Guattari Studies 13.4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463–481


긍정의 윤리학과 생성적 삶     


로시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위트레흐트 대학(Utrecht University)     


초록

이 논문은 로시 브라이도티가 2016년 로마에서 열렸던 ‘들뢰즈 연구’ 컨퍼런스(로마 트레 대학, 7월 11일~13일)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이 글은 이후 저자가 옮겨 적은 다음 교정했다. 여기서 저자는 새로운 형상들을 생성하고 상상하는 것에 대해 가늠하는 동안, 긍정적 사유의 접근방식을 위한 최근의 요구들에 대해 단호하게 지적하면서, 순전히 현재의 상황 앞에 그것을 내세운다. 세계에 대해 ‘예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수동적인 수용을 초래하지 않고, 그 보다 변형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능동성을 드러낸다. 이 목표에 따라, 브라이도티는 들뢰즈 뿐 아니라 페미니즘 이론을 바라본다. [이로써] 내재성의 존재론은 하나의 유물론적, 집합적, 생명적, 신체화된(체현된, embodied) 그리고 관계적 윤리학으로 전화한다.      

키워드: 삶/생명, 내재성, 생성(되기), 긍정의 윤리학, 유물론, 페미니즘     

저는 이 굉장한 자리에서 말하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 컨퍼런스의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가 나에게 주어졌군요. 나로서는 여러분들과 아페리티보(aperitivo, 식전음식) 사이에 서 있다는 것[식사시간 전이라는 의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간결하게 말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Rosi Braidotti(1954~   )와 Donna Haraway(1944~   )

그래도 여기 모인 《들뢰즈 연구》의 다종다양한 공동체들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분들은 거의 모두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재결합한 가족 같습니다. 이 방을 둘러 보면, 난 매우 많은 친근한 얼굴들을 접하고는 편안해 집니다. 다양한 나이대의 나의 이탈리아 친구들도 많이 있군요. 내 네덜란드 여행의 동무들도 여기 와 있지요. 그들은 모두 로마에 있는 ‘왕립 네덜란드 협회’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그리고 내 절친한 친구 파트리샤 피스터스(Patricia Pisters), 그녀는 들뢰즈 연구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델프트에서 온 안드레 라드만(Andrej Radman)도 있군요. 나는 로날드 보그(Ronald Bogue) 선생님에게도 존경어린 인사를 드립니다. 이 분은 《들뢰즈 연구》지의 설립자 중 한 명이지요. 또한 내 오스트레일리아 연구 공동체 분들도 여기 있군요. 펠리시티 콜만(Felicity Colman), 이안 뷰케넌(Ian Buchanan)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 여러분들을 만나서 너무 감동적입니다. 

     

Ian Buchanan(1969~   )

우리는 이야기 나눌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간결한 발표를 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난 프란체스코 교황같은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긍정의 양상 안에서 반-부정성(counter-negativity)에 관한 진지한 행동들입니다. 세계가 지금 원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현재에 관해 즉각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서로 마주 보며,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말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내재성의 철학들 안에서 들뢰즈, 푸코와 더불어 당대의 질문에 접근한다면 그리고 만약 당신이 체현과 경험으로서의 페미니즘 철학을 부가한다면, 그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성 과정으로서 현재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겁니다. 특별히 인문학부에 있는 아카데믹한 학문은 현재를 사유하면서 행복해 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현재란 미끄러지고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다양한 통계적인 변수와 더불어 한 더미의 경험적 데이터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그때 여러분은 현재를 표명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재는 우리 – 인문학자인 – 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과거는 우리의 영역이고, 과거의 권위는 우리의 방법론들과 핵심 가치들에 대한 중요 사항으로 존중되지요.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여전히 문학부 학생이 살아 있는 저자에 대해 박사논문을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지요. 죽는다는 것은 쓰여지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따라서 여러분은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에, 앞선 비평가가 해석했었던 것과 모순되는 다른 책을 쓸 수 없겠지요. 만약 여러분이 사회학자거나 인류학자라면, 아마도 현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과 비평 이론이 과거에 집중하면서 현재에 관한 어떤 주제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한편 만약 당신들이 지리학자라면, 당신의 시간역(time span)은 수 백만 년 뒤까지 이르고, 이 깊은 시간이 인류세(Anthropocene)에서 우리를 뒤좇아 오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지요.      


하지만 핵심은 우리가 그것에 저항하고 비판하기 위해 현재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세대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푸코와 들뢰즈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세대이기도 합니다. 나는 운명애(amor fati)에 감염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실재로 현재를 생각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를 원하는 욕구에 중독된 겁니다. 난 우리의 제한된 현재의 조건에 관한 겸손한 수용 – 스피노자가 우리 결속의 조건으로 기술한 바 – 은 긍정의 기획의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사항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멀리 가기 전에, 현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어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 현재를 변형하고 그것에 개입하기 위해 현재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서의 능동적 양식이라는 점을 되새겨 봐야겠지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 즉 우리의 한계들, 우리의 제한들의 조건을 생각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이지요. 이것은 내가 들뢰즈에게서 많은 부분 가져온, 내장되고 체현된 유물론(embedded and embodied materialism)입니다. 물론 옛 유물론도 있지요. 그리고 들뢰즈는 맑시즘이 이전에 거기 있어 왔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그는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을 통과해 가는 겁니다. 그것은 철학자가 언제나 세계를 해석해 왔지만,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라는 점에 대한 예이지요. 이 말은 현재와의 관계에 변형의 사유를 도입함으로써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급박한 변형들에 응답하는 방법은 후기-구조주의 세대의 핵심적인 관심사이지요.       


예를 들어, 이러한 도전을 취급하면서, 푸코는 어떤 상이한 메타-방법론적 접근을 전개하지요. 즉 그는 어떤 주어진 역사적 순간에 지속하는 담론적 생산물에 이론적으로 주입된 지도그리기와 같은 것으로서, 지도제작법에 관한 생각을 도입합니다. 담론은 물질적임과 동시에 기호론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지식을 기념비이자 문서들 둘 모두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 생산이 정치경제학과 현재 진행되는 권력관계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러한 기획을 추구함에 있어서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껏 거쳐온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운동은 이러한 지도제작적 방법을 이전에 개척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경험의 정치학의 여러 다른 탐색들을 거쳐, 입장론적 인식론들과 상황적 지식과 페미니즘 이론은 가장 친근한 것 뿐 아니라 가장 공식적 지점에서도 권력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본래적인 도구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생생한 경험 안에서 말이지요. 그래서 여기 그리고 지금, 당대성을 연구하기 위해 인문학에 속한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현재와 화해하는 방법에 관한 사유의 비판적 전통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그의 놀라운 철학작업 안에서 종종 그것을 해냅니다. 그가 현재를 위한 접근과 사유에 대한 문제는 그 현재가 어떤 지금 당장과 평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증거들의 즉각성(here-and-now-ness)과 맞아 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니, 현재는 시간연속체의 부분이지요. 그것은 지속하는 흐름에 속합니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로 돌아가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라는 것이 동시에 우리가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우리가 생성의 과정 안에 존재하는 바의 흔적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들뢰즈는 현재를 현행성(the actual)으로서의 현재로 쪼갭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가 존재하기를 그만둔다는 것 그 둘 모두이며, 그리고 잠재성(the virtual), 즉 우리가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현재성, 곧 현대성은 다-층적(multi-layered)이며 그리고 다방향적(multi-directional)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잠재적인 과거를 다루고 있어요. 잠재적 과거란 ‘우리는 존재해 갔을 것이다’(we will have been)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투사된/투사하는 미래이며, 언제나 어떤 시간 연속체를 다루며 살아가고 있지요. 그렇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모양을 갖추고 우리를 탈출시키는 현재의 바로 그 조건들에 관한 지도제작술을 그리는데 있어서 넉넉한 틀을 고정하기에 충분한 준-안정성(meta-stability)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 생각을 내가 방금 언급했던 메타-방법론적 문제에 적용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현재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기를 그만 두는 것과 우리가 생성의 과정 안에 존재한다는 것의 어떤 기획투사를 동시적으로 실행해 나간다는 의미이지요. 이 이중구조는 이원론적인 것도 대립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권력의 지도제작을 집합적으로 공동-생산할 가능성을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 역동적으로 복합적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주체-형성의 계속되는 재구성 과정으로 기획됩니다. 지도제작적 사고는 순간마다 현재 위에 터를 잡는 방법이고,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추고 있는 것에 관한 정동적-인지적 관계의 사상(寫像, mapping)을 생산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통해 우리는 또한 생성의 과정 중에 우리가 있다는 것의 흔적들을 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긍정적 생성의 발생적 힘을 탐지하기 위해 부정적인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사상하지요.     


그리고 이것이 긍정의 논의가 철저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즉 체현되고, 내장되며, 관계적이고 정동적인 이유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감안할 수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가치로운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어떤 수동적 수용도 아니며, 우리의 차이나는 위치들에 관한 평준화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비판적 사유의 작업에 있어서 다양화, 복잡화며, 그렇게 해서 지도제작의 기반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과 우리가 그 과정을 통과해 갈 것에 대한 사유이며, 따라서 우리는 생성의 과정 중에 우리가 존재하는 바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고려한다는 것은 권력 관계를 사상하는 것에 관한 지도제작 연습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저러한 내 연구를 읽는다면, 당신은 내가 들뢰즈를 굉장히 많은 페미니즘 이론으로 보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것은 천재적인 사상가가 제안하는 그러한 추상적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지요. 들뢰즈는 우리에게 수많은 방법론적 도구상자들과 핵심 개념들을 주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 비판과 창조라는 그 모든 작업들을 하지는 않아요. 이러한 도구들을 적용하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한테 달려 있습니다. 즉 이것은 현행화를 요구하는 어떤 실천 철학인 것입니다. 들뢰즈의 비판은 심지어 ‘그는 어째서 내가 분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가?’라는 그에게 반하는 말조차 받아들입니다. 글쎄요, 들뢰즈는 철학자들의 최소한의 오이디푸스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당신이 실제로 스스로 몇 가지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실행하라! 실행을 독려하라!’라고 말이지요.     

비판(비평)의 임무는 세계 안에 실재로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것, 즉 배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횡단적 주체성들와 만나는 평면들을 창조하는 것이기도하지요.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의 공리들에 의해 초코드화되어 있는 시스템에 대항-코드들을 주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탈-영토화의 흐름들과 속도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은 생생한 유물론적 흐름들의 과정 가운데에서 우리가 언제나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과 생성하기를 노력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가동시키는 하나의 방법이지요. 만약 당신이 정말로 푸코적인 사회-구성주의 방법들의 오래된 언어들을 사용하길 원한다면, 이 과정은 생명정치적(biopolitical)이면서도 죽음정치적(necropolitical)이 요소를 두루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핵심은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오랫동안 존속하고자 하는 개체들의 존재론적 긍정성입니다. 부정성에 대한 비판은 긍정을 생성시키지요. 현재를 가치롭게 하는 존재란 현행적으로 아직 촉발되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들을 활성화하고 표현하는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우리의 수 많은 개념들, 그 수많은 우리의 실천들 중 죽음을 성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내가 의도적으로 주체와 주체-구성의 문제를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이 문제는 들뢰즈주의자의 것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결코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에 대한 교조적인 독자이고자 하지 않았지요. 어떤 경우 나는 모든 교조적 주장들에 대항해서 실재로 싸울 지점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는 순종적인 딸도 아이고, 오히려 불복종하는 비판적 사유자에 가깝지요. 특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내가 주체성 문제와 주체성에 관한 그 이론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이지요. 우리는 정치적 주체성 없이는, 심지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비겁하게 익명성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독설적인 블로그를 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비윤리적 태도로 활동하기 때문이지요. 생산적인 정치적 실천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적 주체성으로 간주되는 것에 따른 합의점들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들뢰지앙다운 때는, 내가 인간과 비-인간 행위주체들의 횡단적, 복합적, 비-단일적인 주제적 배치들을 요청하면서, 가능한 미래들의 생산을 향해 활동했을 때였지요.     


여기서 나는 페데리코 지아르디니(Federica Giardini)와 의견을 같이 합니다. 즉 페미니즘 철학은 체현되고 내장된 경험으로서의 급진적인 내재성의 이론이며, 내재성에 관한 추상적 철학을 구체성으로, 물질성으로, 격정으로 그리고 모든 철학자들이 그로부터 이익을 취했던 어떤 영감으로 데려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대륙철학을 강렬하게 관통했던 급진적 페미니즘 사유 전통의 커다란 기여입니다. 물론 급진적이라기보다 다른 당대의 페미니즘도 많이 있습니다. 난 냉소적으로 여겨지길 바라진 않지만, 우리는 자클린 로스(Jacqueline Rose)가 최근 《가디언》에서 지적한 바에 따라, 이를테면 최근 브렉시트에 의해 야기된 혼란에서, 우리는 이제 정치에서 엉망인 상황을 정리하려고 등장하는 여성들의 세대를 목격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노동의 전통적인 성별 분리를 확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또 다른 위험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그것은 만약 우리가 그것을 잘 살피지 않으면, 보수성을 가지지만 평등을 중시하는 여성들에 의해 우리가 모조리 점령당할 처지라는 것이지요. 현대 페미니즘은 몇몇은 기독민주당 소속인 신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 전반에서 활성화되어 있어요. 그들은 대중들을 그들에 영합하도록 타락시키는 자들과 같습니다. 또 다른 것은 이기적인 자기-권력추구와 더불어 노골적으로 상스러우며 뒤죽박죽인 페미니즘입니다. 이방카 트럼프를 보세요.    

Federica Giardini

 

그런데 나는 본질주의적으로 되고 싶지는 않지만, 정치적 영역에서 노동분할의 젠더화는, 정치적 현실들의 양극화와 매 순간의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복합적으로 되는 바, 어떤 무분별한 혼합을 향하게 됩니다. 가끔 여기 유럽에서 현재의 모순들은 너무 날카로운 나머지, 마치 파시즘의 폐허 위에 놓여 있던 1948년인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들을 재-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 포퓰리즘적 운동들에 의해 수행되는, 그러한 - 여기 지금 당장의 – 파시즘이 특히 잘 살아 남아 있음에도, 반면에 반-파시즘적 좌파는 소진되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추고 우리가 생성하는 것 둘 모두에 대한 기록들로서의 지도제작의 지점이지요. 그것들은 모두 반복에 관한 것이며 – 차이 없는, 그러므로 허무주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익살극인 바 – 미분적이고, 그에 따라 긍정적인 것의 전면에서 발생합니다. 비판 이론은 부정성과 긍정 사이의 차이 – 권력과 가치들에 대한 윤리적 차이 - 를 아는 것입니다.    

 

한 발 앞으로, 그리고 두 발 뒤로? 그 보다 그것은 매 번 우리의 윤리적 지향들을 담기 위한 반복들을 야기하는 천 번 정도의 지그재그 우회로겠지요. 나는 자주 – 크고 뚜렷하게 – 듣습니다. 올랭프 드 구주(c)의 말을 말이에요. 그는 1792년에 혁명의 한 가운데에서, 세계 여성 인권 선언을 썼고, 그로 인해 길로틴으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 더 크고 또렷하게 울리고 있지요. ‘여성의 권리가 인권이다’라는 표어는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그녀의 실패한 선거운동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녀의 비디오 클립 중 하나에서, 당신은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이력에서 미국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지요. 그것을 보면 그녀가 올랭프 드 구주가 아니라 세네카 폴스(Seneca Falls)에서 시작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서부터 되어온 과정에 있다는 것을 기록상으로 따라 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올해는 정확히 몇 년이고 우리는 어디에 도달해 있나요?  만약 여러분이 우리가 존재하기를 그만두어 온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즉 가부장제의 보호 아래에 있는 영원한 여성성이라는 의미에서 지도제작을 행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속한 연대기는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아니거나 전부이겠지요. 수 천년의 억압과 해방을 위한 투쟁, 천 개의 운동과 반-운동의 고원들. 이것은 잠재적 과거의 현행화로서의 해방이며, 결코 완성되지 않고, 죽지도 않는 이념입니다. 완벽하게 현재인 것, 완벽하게 고전적인 것, 완전히 현재의 부분인 바, 그것은 현행적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그것은 어떤 불-사(never-dead)이며, 언제나 막 삶 속으로 터져 들어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부정성을 뛰어 넘는 긍정의 존재론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있어요. 왜냐하면 질문들이 수립되어 왔기 때문이지요. 즉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그런 개념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질문들 말입니다. 난 정말 이 모순의 핵심의 기반에 대한 긍정을 위한 예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당신은 현재적 맥락에서 긍정에 대해 말하기 위해 다소 치매에 걸려야할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모든 비평가들에 대항하면서 말이지요. 난 치매에 걸린 이에게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문제는 의외로 쉬워요. 왜냐하면 현재가 현행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전적이라는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안과 위에서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현재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비판적인 좌파가 선호하는 장르였던 자기연민적인 애도를 시작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우리는 비참함, 잔혹성, 욕구불만들의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현재의 부정성에 한껏 고무될 것입니다. ‘이런데도 뭐 좋은 것이 있나?’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글쎄요, 생각 좀 해 봅시다. ... #미투와 흑인인권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건 더 나빠질 수 있군요. 우리는 지젝(Žižek)과 같이 될 수 있고 자유의 챔피온으로서 트럼프를 찬양할 수 있어요. ... 그러나 정확히 누구를 위해인지 나는 궁금합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정말로요!     


진지한 개념적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매우 쉬워요. 그리고 그것이 비판적 기능을 만족시키기도 쉽지요. 만약 우리가 들뢰즈의 긍정주의(affirmationism)의 원천으로 되돌아 간다면, 벤야민 노이스가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다름 아니라 스피노자가 바로 그 선생님입니다. 스피노자는 아주 지독한 시간들을 살아갔지요.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공화정 말기를 살아갔습니다. 이것은 그가 유럽 초기 역사의 갈등 과정 안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적 실험을 목도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정치적 암살을 목격했습니다. 램브란트가 그림 안에서 불사로 만든 더빗(de Witt) 형제에게 가해진 린치와 교수형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없는 저항 때문에, 스피노자는 그의 경력이 연소되어 버린 것도 봤지요. 그는 교수직을 내던지고, 유대인 집회와 도시들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주위에서 붕괴되어 가는 세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노동자로서, 즉 렌즈 세공사로서 벌어 먹고 살았지요. 이것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과 여러 사람들이 ‘또 다른 계몽주의’, 즉 네덜란드(프랑스가 아니라) 계몽주의라고 묘사한 17세기의 급진적 계몽사상입니다. 암흑과 혼란스러움에 관한 계몽은 동터 오는 18세기의 윤곽을 볼수 있게 했지만, 그것은 바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아직 ...이 아닌 바, 이러저러한 것이 아닌 그런 고통을 알게 합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1677] 1996)는 그와 같은 재난과 갈망의 조건들이 난만한 가운데에서 쓰여진 겁니다.       

   

우리는 우리 당대의 재난이 스피노자 시대의 재난들보다 더 큰지 어떤지 재미삼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유용한 실천이 될런지는 불분명하네요. 대신에 나는 오늘날의 스피노자주의자, 예컨대 들뢰즈와 같은 사람의 지도를 따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스피노자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며 뒤처져 있지는 않는다고 논증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에티카』의 원천이 필연성이며 고통으로부터 인식을 이끌어내려고 욕망하면서, 어떤 구체적인 가능성 안으로 잠재성의 현행화를 이루기 위해 현재의 파국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 재구축을 위해 몇 번이고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지요.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그토록 신중하고, 애착있게, 그리고 매우 실용적으로 독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는 긍정이 과정에 뒤따르는 것에 대한 어떤 낭만주의도 없어요. 이것은 파편들과 폐허를 작동 가능한 체계들로, 절망을 실행으로 변형하고자 하는 실천철학입니다. 현재가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에 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우리가 생성의 과정에 있다는 것의 흔적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패배하거나 배제되는 것은 무(nothingness)의 변방에 제한됨으로써 생성의 과정으로부터 변증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증법은 잘못 된 것이에요. 이것은 부정성을 과도하게 강조합니다. 현행화되지 않는 것은 단지 이런 것입니다. 즉 비-잠재화된 선택지, 잠들어 버리는 것, 라이프니츠가 상당히 잘 묘사한 대로, 존재의 상이한 수준으로서 존재론적 선잠에 빠져 드는 것이에요. 이것은 증식하기, 동면을 취하기, 잠재적인 진행입니다. 그 현행화을 욕망하고 요청하는 집합적 배치에 의해 다시 불러내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긍정의 전체적인 요점은 그와 같은 어떤 실행(praxis) 안에서 철학의 실천을 밀어 넣는 것에 놓여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폐허로부터 앞으로 진행될 것에 대한 영감의 방아쇠를 당길 만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겁니다. 스피노자적 실천은 부정성의 변형이며, 그것에 맞서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생각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정말 원합니다. 왜냐하면 긍정에 관한 모든 비판들은 들뢰즈적 기획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는 식의 어떤 도덕적인 젠체, 순진한 믿음이라는 환영적인 것으로 축소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떨어져서 보면, 이것은 스피노자나 들뢰즈가 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몇몇 스피노자주의자들은 그렇게 하지요. 예컨대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맥동치는 물질』(Vibrant Matter)에서는 이러한 낙관주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더 미묘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작품에 부정성의 명확한 분석적 기능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이거나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내장된 자유의 긍정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 자유는 우리 모두가 실행할 수 있는 것, 우리의 신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이 되지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시간의 위협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실천의 한 가운데 부정성을 수립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어떤 분석적 기능만을 할 뿐이지요. 즉 부정성이란 우리가 가능한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잠재력들을 생성시킬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부정성과의 조우 그리고 고통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가 전복하거나 변형하고자 하는 조건에 대한 적합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지요. 비판[비평]은 또한 진단(요법, clinical)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부정성의 효과로부터 우리를 해독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피노자 『에티카』의 전체 장들은 일종의 독에 관한 것, 질병에 관한 것 그리고 죽음에 관한 것, 즉 여러분이 살아가는 시기들에 의해 감소되는 느낌들에 관한 것이지요. 그것은 어떤 효과적인 부정성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세계에 대해 행위하고 참여하는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지요.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미시-파시즘은 자유를 향한 우리 욕망의 감소 같은 것이지요. 즉 이것은 불분명한 슬픔과 무능력으로서, 우리 영혼에 자리잡고 우리 삶의 활력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는 모두 현재적 맥락에서 이것을 통과해 가고 있는 중이지요.   

   

브렉시트 이후, 나는 어떤 영국친구로부터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메세지 중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난 혼란스럽고 의기소침함을 느껴.” 그리고 나는 생각했지요. “무엇이 부정성의 뛰어난 정의일까?” 바로 그것, 혼란과 의기소침. 그리고 얼마나 많이, 얼마나 많은 계기들을 우리는 부정적 효과의 그 의미를 겪게 되는 것인지. 다시 말해 여러분의 존재를 생성시키는 바로 그 조건들에 연루되는 여러분의 능력이 의시소침해진다는 것, 관계성의 결손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능력[권력]과의 관계는 시류(時流)의 불결함, 폭력, 비속성에 의해 으스러지고, 납작하게 되며, 잘게 쪼개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에 관한 끝없는 리스트를 만들 수 있지요. 그래서 이것이 시작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긍정의 윤리학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 윤리학은 이러한 문제들을 긍정의 방향으로 진척시키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들뢰즈가 생기적 유물론 철학에 대한 그의 작업을 할 때, 그가 어떤 사유의 형식에 대해, 맞습니다, 즉 비판적인 사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 내가 이전에 말했다시피 – 그것은 곧 진단[요법]이기도 해요. 그것은 우리가 먹고 살아 가는 체계의 부정성이 가진 과도함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는 방식입니다. 비판과 진단으로서 긍정의 윤리학은 혼란스럽고 의기소침해진 느낌의 약화과정 너머로 가는 실천적인 훈련과정인 것이지요. 혼란과 의기소침 가운데에서 여러분의 생의 능력은 우리가 지켜낼 수 없는 부정의 요인들의 다양성에 의해 잘게 쪼개지고, 멈춰지며, 중독되고, 모욕당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존재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통속적인 추론의 의례 같은 것으로 물러나며, 기존 사유의 규칙들의 설명에 머문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반복할 뿐입니다.      

Jacques Derrida(1930-2004)

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시류의 부정성을 처리해 나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정 정도의 중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잠시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봐요. 독, 면역력, 자기 면역력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것은 탁월하게 획기적인 개념들 중 하나에요. 여기서 여러분은 노선을 벗어나서 데리다이 파르마콘(pharmakon)으로 갈 수 있겠지요. 그건 괜찮은 일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또한] 여러분은 길을 벗어나서 어떤 상이한 방향으로 이를테면 에스포지토(Esposito)의 자기면역 담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겠지요. 그는 탁월한 이탈리아 생명정치학의 전통에 속해 있어요. 여기에는 아감벤(Agamben)도 있지만, 그는 에스포지토보다는 좀 낮은 수준이에요. 이들은 모두 상호작용과 대화가 가능하답니다. 

     

하지만 긍정의 윤리학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진정한 도전이 어떻게 전체적으로, 즉 독으로 오염되고 산성화된 바다에 의해, 후쿠시마 쓰나미라는 부정성에 의해 다가오게 되는가에 대해 강조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러한 것을 완강하게 시도하는 와중에, 그리고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잠재성의 역량을 정립하는 것, 다시 말해 ‘그래,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스’는 본질적인 것에 관한 어떤 정신 나간 기쁨의 수용이 아니라, 완강한 대척 지점이지요. 즉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매우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난 언제나 현재에 대해 예의 바릅니다. 특히 내가 그 현재의 정면을 걷어 찰 때 그러합니다.      


부정성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긍정적 정념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 -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 은 긍정으로서의 비판을 구축하는 한 방법입니다. 실재로 그것은 ‘아니요’라고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관계를 끊고, 막아서는, 변화의 동력으로 적대적인 대면을 추구하는 변증법적인 ‘아니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로서의 ‘아니요’입니다. 들뢰즈가 말하길, ‘진정한 부정성’은 그의 『스피노자: 실천철학』(1988)의 놀라운 페이지들(이것은 무인도desert island[들뢰즈 사후 간행된 단편집-역자]에 수록된 텍스트에요)에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한 부정성은 판단의 체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폭군들의 체제, 군중의 체제, 성직자들과 판관들의 체제라는 겁니다. 슬픈 정념들은 아주 잘 공유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들뢰즈는 철학자들이 부정성으로부터 이익을 취하고, 그것을 서로 교환한다고 논증하지요. 자기 연민 속에서 모든 것에 관한 애도에 가담함으로써 말이지요. 그들은 모든 것이 잘못되고, 따라서 우리를 더더욱 절망시킵니다. 학부생들 중 아무도 그 첫 학기에 철학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들뢰즈에 따르면, 부정적인 것이나 슬픈 정념들을 취급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스피노자의 놀라운 구절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인간성의 도덕적 도착증이라는 수단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마찬가지로 인간성이 가진 슬픔에 대해 애석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 난 많은 젊은 학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요가나 명상 집단에 빠져 있어요. 그들은 아마도 우울한 신-인간주의자의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정념들 의 슬픔에는 상이한 정동 수준들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특별히 주제로 취하는 바는 ‘시체들을 먹고 사는’ 철학자들이에요. 들뢰즈는 이 주제를 너무나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슬픈 정념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시체를 먹고 다니는 걸식동물들(scavengers)이에요. 여기에는 물론 니체의 유산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들뢰즈는, 그의 유명한 편지, ‘신철학자들에 반대하여’(Against the New Philosophers)에서 그들을 시체애착증 사상가들(necrophilic thinkers)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재앙 안에서 흥청망청거리지요. 왜냐하면 그러한 재앙이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때문입니다. 즉 애도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말입니다. 그들은 개념적인 하이에나들이에요. 전혀 창조적이지도, 관대한 정신을 가지지도 않았지요.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비판 작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정성을 요청하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겁니다.    

  

내가 이전에 언급했던 그 복합적인 시간-연속체 구조 안에서 이 입장을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그들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르는 종말의 예언자들은 현재를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춘 것의 기록으로 환원하고, 이에 따라 그것의 풍요로운 복잡성을 축소하며 역능박탈감(the sense of disempowerment)을 증가시키지요. 이것은 이중적으로 부정적인 효과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이 복잡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작업한다면, 우리는 무력감을 가볍게 떨치고 잠재적인 것의 현행화에 집중할 겁니다.     

 

이 작업은 ‘우리’라는 구성체에서 시작하지요. ‘우리’는 잃어버린 민중, 즉 관계와 가치의 긍정적 양태들을 상호-구축함으로써 저항의 공통원인을 품어 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집합적 실행(praxis)이지, 어떤 개별적인 심리적 기질이 아니에요. 이것은 잠재적-긍정을 현행화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다른 주체, 즉 ‘잃어버린 민중’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긍정의 윤리학에 의해 지탱되는 내재성의 평면에 있지요.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이 대담을 탈-심리학화하고,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여기 동반하는 정동들을 탈-심리학화할 필요가 있어요. 사실상 우리는 주체도 더불어 탈-심리학화하고, 그것을 집단적 배치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들뢰즈는 그 모든 다수자-영역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독려하지요. 그는 겹겹의(multiple)  전/후[탈]/너머-정체성 구성체들, 다시 말해 배치들(assemblages)을 선호합니다. 그것은 인지 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 안에서 힘든 작업이지요. 몇몇 심각한 개념적 전환들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페이스북 세대라면, 또는 만약 페이스북 세대(‘좋아요’와 ‘아니오’의 세대)를 가르친다면, 그 정체성은 강박적인 소비주의와 소유욕 강한 개인주의로 가득찬 기표로서, 여러분과 마주보며 주시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자아-지표적(Ego-indexed) 원리들은 스피노자가 개념화했던 관계들과 정동들의 지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일하고 가장 거대한 장애물입니다. 정동과 정서는 감정이 아니에요. 정동은 관계과 생성의 집합적, 공동적, 횡단적 블록들입니다. 즉 존재하기를 멈추기, 생성으로 출현하기, 연속하는 흐름들에서 경계들을 조율하기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블록들은 횡단적이며 집합적이고 횡단적 주체성들의 상호-구축을 목표로 합니다. 현대 과학은 주체성이 이런 전망을 지지하지요. 즉 우리는 유전학과 신경과학으로부터 우리가 확장된 정신들이며 분배된 의식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과학이 그것을 안다면, 철학이 마찬가지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무엇이 잘못일까요? 우리는 어째서 어떤 사상가류와 어떤 제도적 협력으로서 단일한 자기성, 즉 상황적인 개인에 정착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암시적인 휴머니즘과 맹목적인 인간중심주의는 인간학이 오늘날의 인류세에 신용을 잃어버린 이유중 일부입니다. 이런 내적 가정들은 의문에 부쳐지고 토론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이 포스트휴먼 연구의 과제이고, 인문학을 갱신하기 위해 신-스피노자주의적 전제 위에 세워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체 체계는 인간중심주의적 개인들이 부적합하다는 것, 우리가 그러한 틀 너머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탈-심리학화함으로써 긍정성과 부정성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스피노자, 들뢰즈와 더불어 자유로운 개별 실체들을 바라보지 않는 어떤 보편집단[우주] 안에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세계로 개방되는 존재론적 능력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생성의 과정 중에 있음에 속하는 흔적으로 현재를 취하기 위해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의 기록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스처들은 집합적 실행이며 우리는 더불어 부정성에 대응하면서, 그것을 재작업하고, 변형하며, 재형성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 안에서 개별적 자기성(self)은 하나의 장애이지, 장점이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긍정의 편이란 통합하고 연결하는 집합적 태도인 것이지요.     


긍정의 긍정이라는 것은 세계에 참여하고 관계하는 우리의 능력을 층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축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증강시킵니다. 우리는 증강(enhancement)을 관건적으로 바라봐야 해요.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이미 이 개념과 실천을 포괄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인간 의식의 컴퓨터-기반 확장이라는 실리콘벨리 이데올로기의 노선을 따라 인간 능력 증강의 기획에 투자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사실상 증강은 그 운동의 중심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을 소환합니다. 이들은 인간 지능의 증강이말로 미래의 모습이라고 믿지요. 우리 두뇌의 문제는 우리가 창조해 내고 있는 정보적, 전산적 네트워크에 비해 너무 느리다는 것입니다. 이 신경 결함의 해법은 우리의 인지적 능력을 증강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획은 초-지능(super-intelligence)이라고 불리워지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이 세운 ‘인간성의 미래를 위한 협회’에서 연구 중이지요. 이 협회는 포스트-휴먼적인 연구작업을 찾아 다니는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내가 제안하고 있는 증강이란 윤리적인 것이고, 당신의 관계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을 계발하는 것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즉 부정성이란 당신을 축소시키는 것이고, 사소하게 만들며, 당신이 생성의 과정에 진입하는데 무능력하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우리의 교육에 속하는 부정적 권력들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언제나 여러분들을 부적합하고, 무지하고, 멍청하다고 느끼게 하는 분과 학제로서의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지요.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나쁘게 차려 입은 여자아이[남장 한 여자 아이-역주]라면, 마찬가지로 c에 속한다면 더 그러하다는 겁니다. 철학은 거인적인 협박 기계(gigantic intimidation machine)로서의 철학은 여러분들이 현재이 생생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결코 여러분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지요. 부정성이란 우리 자신의 연구직에 있어서 표준적인 실천이며, 질투, 경쟁 그리고 불신과 같은 부정적 정동들을 되돌려 주는 제도적 실천들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인문학의 중심에서 부정성의 숭배의식을 지원하기 위해 강력하게 격려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잘라 내는 우리 일을 가지는 것이지요. 우리의 제도적 실천 안에 어떤 즐거운 문화를 집어 넣는 것, 그것은 단지 심리학적인 상태로서만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능력들을 증가시키는 일종의 실행과 같은 것이지요. 긍정적 가치들의 사회적 구축을 핵심적으로 시행하는 역능의 행동학으로서 윤리학은 과정 중의 부정성에 의해 잠재적인 것을 현행화하는 방식을 집합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확실히 이러한 시행 중에 함정들과 도전들이 막대하게 존재합니다. 이 논증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은 정확히 증강이,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오염된 개념이 아닌가라는 의심이지요. 들뢰즈과 가타리에 따르면 더 발전된 자본주의의 구조는 그 체계가 삶/생명이 그것이 필요로 하는 자본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잘 이해해 왔던 것처럼 존재합니다.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주의를 요했던 지점이 우리에게 어떤 정치철학을 준 곳에 있다고 봐요. 그 정치철학은 선진 자본주의를 어떤 체계, 즉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유전적이고 정보적 코드를 유일한 자본으로 이해하는 체계로 독해하지요. 1972년의 맹아적 텍스트, 즉 『앙띠오이디푸스』의 첫 번째 절들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거기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경제의 금융화에 대한 첫 번째 분석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것의 산업적 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상품성, 즉 신용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으로 대체하게 되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막대한 부채를 생산하는지에 대한 것이지요. 최근 라짜라토(Lazzarato)와 같은 철학자는 부채의 실재성에 관해 완벽한 정치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일찍이 그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때가 68년 5월 이후였습니다. 당시 자본주의는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휘어졌고[굴복했고] 적응했지요. 제조업의 종말은 신용, 즉 빚이라는 신-자유 시대를 열어 놓았습니다. 선진 자본주의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어요. 그보다 그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원천들 – 인간과 비인간 둘 모두 –을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서 먹어치우는 탐욕스러운 체계이지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금융화와 자본화가 앞다투어 함께 작동하는 체계는 푸코가 전망했던 생명-정치적 기획 너머로 나아가면서, 닉 로즈(Nick Rose)가 적절하게 밝힌 바, 삶 자체의 충만한 정치학을 전개하지요. 또는 멜린다 쿠퍼(Melinda Cooper)를 인용하자면, 그것은 잉여로서의 삶/생명이라는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당연하게도 증강은 인지적 선진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참조 사항이며 경제적 실천입니다. 그런데 로마 트레 대학을 제외하고는 이를 연구하는 대학이 없어요. 다른 대학들은 우리가 붙잡을 필요가 있는 이 자본에서, 삶/생명의 힘, 생명의 자기제작적 힘에 투여하지 않고 있지요. 만약 우리가 모든 생명체들이 유전코드들을 통제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수요들, 시장들, 여러 부수적인 분야들에 맞추어 공급하기 위해, 또는 필요하다면 무엇인든지 공급하기 위해 조작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학자로서 그리고 과학을 하는 여성으로서 나는 우리 기술들의 진보를 열망합니다. 즉 유전공학, 나노기술, 줄기세포 연구, 신경과학은 오늘날 대학 연구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연구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본을 생산합니다만, 그런데 뭘 하기 위해서일까요? 진보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간의 신경 증강을 포함하여, 삶/생명의 자본화가 겨냥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4차 산업 혁명과 여섯 번째 멸종기(Sixth Extinction) 사이, 삶/생명이 자본화라는 이러한 실천들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인지 자본주의는 긍정에 대한 우리의 대화와 긍정적 가치들을 창조하려는 우리의 집합적 실천들을 이행시키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후 맥락에 해당되지요. 이것은 들뢰즈의 철학에 복잡성이라는 또 다른 층을 부가합니다. 즉 가타리가 1970년대에 ‘자유 라디오 방송국’ 진행자였을 때 도입했던 기술적 층위가 그것입니다. 그는 가타리-들뢰즈 듀엣에서 기술자였지요. 그는 중간에서 매개역할을 하면서, 일반 생태론을 미디어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새롭게 갱신할 필요가 있지만, 기초는 거기 있어요. 우리는 복잡한 사회 체계들의 핵심에 그 개념을 옮겨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식 영화 이론가들의 세대가 도전적으로 작업한 것에 의존할 수 있고, 영화 연구의 장을 신경과학과 생명발생과학과 접촉하도록 하지요. 이것은 모두 인지 자본주의 안에 속합니다. 그는 우리의 생산과 소비의 힘을 가속하기 위해 인간을 증강시키길 원하지요. 지구적 환경은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합성생물학, 이를테면 합성 육류의 생산을 운영해 온 그러한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공 햄버거는 2년 전에 이미 생산되었지요. 우리 인간은 심지어 더 이상 자연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에요. 즉 우리는 그것을 재창조하게 될 겁니다.      


달리 말해, 인지 자본주의 안에서 수행되는 일반적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순전한 이익을 목표로 하지요. 그리고 우리 대학들은 그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동일한 대학들이 신-자유주의적 재조직화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학은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지요. 우리는 비판이론이 필요하지 않아요. 왜냐구요? 앞서의 논의에 따르면, 이러한 옛날의 학제들은 인간(Man)이라는 관념을 가지는 바, 그것이 너무 낡아서 우리 시대의 상당한 과학적 발견들을 따라갈 가망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동료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 난 이 내용을 『포스트휴먼』에도 썼습니다 -. “당신들은 단지 인간이라고 간주되는 것에 관한 낡은 관념만을 가지고 있어. 당신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를 믿고 있지. 당신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지?” 인간은 시효가 지났고,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 위에 세워진 인문학도 끝난 겁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긍정성(the affirmative)에 대한 논의를 교차시킬 필요가 있는 컨텍스트입니다. 이것은 생명발생학적이고 정보적인 중재, 곧 이중적 중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방어하고자 하는 바로 그 비판 이론의 전통에 대한 공격도 있지요. 이런 매우 평이한 비판이 놓치고 있는 것은 비판적 인문학이 적어도 니체 이래로 인간의 죽음과 인간의 위기에 대해 사유해 왔다는 그 사실입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특별히 인간의 죽음에 대해 쓰지요. 거기서 그는 철학이 휴머니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지식과 권력의 분석을 전개합니다. 애석하게도 푸코는 너무 일찍 죽었고, 그의 저작은 미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문제에 매달렸고 탁월한 작품을 성취하지요.     


68년 5월 이후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은 미래 자본주의의 변화양태를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가타리는 두 권짜리 대작을 썼습니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1987)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생명에 관한 지식, 즉 자본으로서의 삶/생명의 코드들을 얻습니다. 이 체계는 무슨 짓이든 하지요. 이 코드들은 미래를 모든 방면에서 채무상태로 만들 것입니다. 나는 독일연방은행이 브렉시트의 실패에 대한 채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10년거치 채권이 브렉시트에 관한 부정적 결과에 대해 발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채권에 대한 채권, 또 그 채권에 대한 채권들 ... 이러한 상궤를 벗어난 체계는 무슨 짓이든 할 기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괴물을 눈여겨 보다가 말하지요. “나는 당신이 무엇에 걸려 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이 뒤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삶/생명, 즉 횡단적으로 우리 모두와 연결하는 그것.”     

생기적 신-유물론은 삶/생명이 어떤 자기제작적 체계(autopoietic system)라는 것을 스피노자 독해를 통해 알아 챕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를 참조하여 -  유기체로부터 기술체에 이르기까지 자기제작성을 확장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저항하기 위해 그리고 대안을 창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적합성, 즉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들의 내재성의 삶/생명-철학을 통해 자본주의에 관해 생산하는 명료하고 냉정한 분석은 결코 비판가들이 논박하는 바와 같은 복종의 형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확히 적대적인 양식이지요. 만약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과 삶/생명의 정치학에 관한 그들의 지도제작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동일한 전제로부터 출발해서, 상이한 목표들과 방향들에서 그것들을 취하는 어떤 저항적 실천을 발전시킬 필요성에 직면하지요.      


이것이 결정적인 프로그램이 긍정의 윤리학과 긍정적인 횡단적 배치에 관한 정치학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출현하는 그 지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처럼 보이나요? 그와 같은 체계 안에서 생성의 과정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따르도록 하고 대안적인 생성의 패턴들을 구축하도록 하는 가능한 행위의 여지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것을 살필 여러 길들을 취할 수 있어요. 우리 자신의 실천들로부터 몇 가지 예시들을 가져온다면, 어떤 공동적인 것들(commons),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공동성을 따르는 것이지요! 하트와 네그리의 코뮌주의(Communalism), 디지털 공동성, 도시에 기반한 공동성, 공동성들의 다층성, 디니털과 실재. 배치가 일어나는 다른 지역이 있지요. 즉 포스트-식민주의와 환경인문학, 디지털 휴머니즘, 토착 인식론들이 서로 접속합니다. 포스트-식민주의적 디지털 인문학, 토착민의 탈-식민주의적 토지 소유권,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매개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토지 소유권에 대해 말하고, 활동가들, 미디어 민중, 철학자들 등등을 보유하는 배치들의 깨끗한 조건에 대해 말합니다. 난 브리티쉬 컬럼비아(British Columbia)에 관한 몇몇 예를 소개했었지요. 이것은 아주 특이한 배치에요. 여기에는 여러분들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심에 시민 사회에서 형성된 지식 기구들이 있지요. 이 체계들에는 조직 부서, 기술공학, 서로 매우 다른 세계관을 가진 토착적 인구들 그리고 자기 몫을 하는 대학들이 속합니다.       


여러분들이 집합적 배치의 원형이라고 부를 법한 것의 다종다양한 예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잠재적인 것들의 현행화의 방향에서 움직이지요. 몇몇은 잘 수립된 배치물들이 있는데, 내 정치적 습성이기 때문에 내가 선호하는 것은 주변적인 것들의 동맹이지요. 내가 진심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퀴어, 포스트-휴먼적인 잃어버린 민중들입니다. 즉 여성들, 페미니스트들, LGQBT, 동물, 불법 이민지들, 장애인들 뿐 아니라 비-인간 행위주체들, 이를테면 먼지, 플라스틱, 죽은 곤충들 그리고 지구-타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횡단적 배치체들로서, ‘인간’(Man)의 파괴적 권력에 맞서 연합되지요. 하지만 당황하진 마세요.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은 다수적 주체 – 인간 – 에 대한 해방의 선택지도 제공합니다. 이때 주체는 일자, 백인, 남자, 이성애자, 도시거주자, 표준어 사용자, 여자와 아이를 소유한 자들이지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기술합니다. 그는 여타 다른 것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여성/동물/아이 등등 되기. 만약 위치들을 이동할 준비가 되고 의식화라는 고된 작업을 할 준비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경멸적인 차이의 변증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어요. 실천이란 특권이나 그것의 결핍의 조건들,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더 좋은 것에 대한 적합한 이해들을 전개시키는 데 놓여 있지요. 페미니스트, 포스트-식민주의와 인종 이론들은 부당한 특권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지요.      


이제는 퀴어적인 배치들은 오래된 것이에요. 그것은 나의 정치문화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페미니즘 과학소설,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으로 거슬러 올라 가지요. 여기서는 앞서 언급된 횡단적 배치에 외계 생물과 다른 행성의 생명체를 포함시킵니다. 이러한 동맹은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오늘날의 묵시록적 시간에 기념비들을 끌어 모읍니다. 이때에는 탈출하고자 하는, 모두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지요. 이것은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기술한 인류학적 엑소더스(exodus)과 가깝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이 그러한 욕망을 가지며, 자본편승적인 체계의 바깥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경애하는 프란체스카 페란도(Francesca Ferrando)도 외계 생명체, 디스토피아적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그녀의 저작에서 우주적 탈출들에 대한 이 논점을 설명하지요. 좋습니다. 하지만 난 지구인입니다. 이 세계에 속하기도 하지요.    

       

나의 근원적인 내재성은 이들이 말하는 출발 지점, 즉 바로 여기 지금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이 지점은 국지적 정치학에 관한 것으로서, 내가 거주하게 된 아주 작은 지역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나는 되돌아 온 탈출민이 되는 과정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현재를 우리가 생성의 과정에 있다는 것의 증거로 재발명하고, 아마도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춘 것에 관한 기록으로서 현재로부터 다소 거리를 만들어 내지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공간, 다소간의 비-인간적 공간은 우리가 부정성의 하중을 대안적인 것들의 가능성에 관한 집합적 긍정으로 변형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범주들로부터 탈출하고자 원하는 것에 [욕망을] 재투여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우리를 이탈시키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특정한 종류의 삶/생명,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곳, 교차하는 많은 유목적 경로들로부터 나온 지속가능성의 실마리를 구축했던 곳에서 야기되는 특정한 삶의 편린들을 개척함으로써 얻게 되는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다양한 균열들과 잃어버린 연결지점들과 교류하지요. 하지만 우리들 중 몇몇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상황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살(flesh)과 집의 틀에 대해 놀라운 것을 말하지요. 그리고 살이 얼마나 연약한지 말하지는 않지만 ‘살은 부드럽다’라고 하면서 보호가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들뢰즈가 그것이 틀짓기를 요구한다는 점, 즉 살이 어떤 뼈대의 보호를 요구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봐요. 나는 비판 이론, 다시 말해 비판 철학으로서의 《들뢰즈 연구》를 이러한 사유가 가능한 틀작업으로 생각하고 싶군요. 우리는 이를 통해 인지 자본주의의 탈영토화하는 속도의 중심에 – 준안정적인 – 항구적인 장소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감속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정적인 구별지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 그리고 생성의 과정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긍정을 향해 집합적 도약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부족해 하고, 하지 않았던 것, 즉 현재의 발생적 힘의 긍정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가지지 않은 것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에 관한 고전적 정의이지요. 그리고 나는 이것을 긍정적 가치들과 사랑에 빠지는 어떤 집합체의 방향으로 밀어 붙일 겁니다. 만약 현재의 조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미래로부터 그 에너지를 빌어올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신장하고자 하는 정동(affect, 촉발)이지요. 즉 그것이 우리에게 주이지게 될 생성의 윤리이자 정치학입니다. 그 외에 무엇이 하나의 정치학을 가짐에 있어서 필요할까요? 이것 외에 무엇이 말입니다. 우리의 위치들에 관한 적합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 어떤 집합적 인지 안에서 생성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말이지요. ‘그외의 다른 것이 되는’ 생성의 패턴들은 동일성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나아가기이며, 다양성입니다. 그 패턴들은 살아 갈만한, 지속가능하고 ‘예스’라고 긍정할 만한 바로 여기 지금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수렴되지요. 그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랑, 세계에 대한 사랑이며, 혼란함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조차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긍정적 가치들이 당혹스럽게 다가오는 때에 이르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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