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불라 라사(Tabula rasa),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
최근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을 읽다가 배운 단어다. 태블릿이라는 단어의 어원이자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 경험론의 핵심 개념으로 로크는 실제 한 때 의사로 활동하며 많은 영유아를 직접 관찰하여 태어날 때 사람의 심성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 즉 타불라 라사와 같다고 했다.
과감하게 요가 ttc 코스를 신청했다. 지도자 과정이라니...... 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막상 신청서를 작성해 내려갈수록, 커리큘럼을 꼼꼼히 들여다볼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아직 못하는 아사나가 수두룩한데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닌가? 저질 체력인 내가 하루 8시간 수련을 할 수 있을까? 당장 푼돈이라도 벌어와야 할 이 시국에 이 큰돈을 나 자신에게 쓰는 건 무리수 아닌가?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새 해 지금 이 마음이 아니면 다음은 없을 거란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실제로 손을 떨며 거금을 내고 등록을 해버렸다.
환불도 안되니 이제 다른 수가 없다.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는 4월까지 성실하게 수련하며 체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로크가 말한 타불라 라사는 인간의 정신과 인식을 아우르는 심오한 개념일 테니 함부로 끌어와 붙이기가 민망하지만 무슨 주문처럼 되새겨본다.
과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실제 중도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빈 백지와도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출생 이후에 외부 세상의 감각적인 지각활동과 경험에 의해 서서히 마음이 형성되어 전체적인 지적 능력이 형성된다는' 로크의 타불라 라사를 믿고 싶다. 처음부터 타고난 요기니는 없고 경험을 통해 성숙해 가는 수련만 있을 뿐이라고.
타고나길 몸치인데 그만 포기할까 싶었던 순간들을 딛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이니까. 버겁기만 했던 우르드바다누라 아사나에서 아주 조금씩 가슴이 열리는 느낌을 찾아가고 있듯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머리 서기를 하면서 고요해지는 순간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아주 가끔 만나듯이, 매 순간 감각하고 경험하면서 백지 위에 아름다운 선을 그어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