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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진철 Mar 22. 2020

디스 이즈 후지록

같이 북 치고 장구 치던 사이. 환과 나의 관계는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이 년 동안 같이 운동장에서 북을 치고 장구를 쳤다. 우리가 딱히 국악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 둘은 밴드부에 지원했다가 떨어졌고, 선배가 우리를 사물놀이 동아리로 꼬셨던 것이다. 동아리의 연중 가장 큰 이벤트는 오월의 체육대회 공연이었다. 삼십 분 동안 악기를 두드리며 뛰어다녀야 한다. 공연을 준비하는 사 월 동안에는 항상 땀에 절어있었다.


사월은 또 다른 의미에서 뜨거운 계절이었다. 여름 락페 라인업의 윤곽이 드러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고의 록페스티벌인 펜타포트의 헤드라이너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공연 연습 중 올해는 펜타에 누가 온다는 둥 얘기를 하다 보면 쉬는 시간은 순식간에 끝나 있었다. 스무 살이 되고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건 다른 무엇도 아니고 여름 펜타포트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작년 초, 오랜만에 환을 문래동 재즈바에서 만났다. 십 대를 넘기고 이십 대를 넘겨 우리는 어느새 삼십 대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락페에서 뛰어다니기보다 재즈페스티벌에서 드러눕는 체력 부족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날 공연이 좋아서였는지 우리는 조금 들떠서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어서 처음 다녀온 락페 얘기. 이후 우후죽순 다른 페스티벌들이 생겨났다가 싹 다 망해버린 얘기. 대세는 힙합이고 걔들이 돈을 쓸어 담는다는 얘기. 사물놀이가 아니라 힙합동아리에 갔어야 했다는 얘기.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후지록 얘기가 나왔다. 후지록은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의 록페스티벌이다. 문득 말을 던졌다. 아, 우리 올해 후지록 갈까. 친구가 대답했다. 아 좋지. 가자. 우리는 그 다음날 비행기와 티켓 모두를 끊었다.


몇 달이 흘러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초와는 달리 상황은 많이 변했다. 일본과의 관계가 극도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일본에 죽창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유니클로에서 옷을 사면 누군가 인터넷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일본에 여행을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잠깐 고민했지만 가기로 했다. 취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져 물으면 일본이 아니라 음악축제에 가는 겁니다 하고 웃어넘겼다.




후지록페스티벌은 후지산에서 열릴 것 같지만 뜬금없게도 니가타 현의 나에바 리조트에서 열린다. 한국으로 치면 용인쯤 될까.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 하나를 빌려 축제를 연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외진 곳에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밥 딜런, 켄드릭 라마, 시아 같은 뮤지션들이 헤드라이너로 찾아온다. 리조트가 있지만, 수 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삼박 사일 동안 캠핑하며 축제를 즐긴다.


이 캠핑이라는 것이 우리의 장벽이었다. 산속의 캠핑은 얼핏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고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락한 샤워와 화장실 사용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7월에 열리는 후지록은 지독한 태풍으로 악명이 높다. 태풍이 심한 해에는 밤중 텐트가 무너져 대피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이 고생길이야말로 우리가 올해 후지록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 살만 더 먹어도 이 고생을 못할 것 같다는 어떤 예감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었다.



도쿄에 내려 우리는 신칸센을 타고 니가타 현으로 이동했다.  자그마한 역 전체가 후지록 깃발로 뒤덮여 있었다. 리조트로 이동하는 셔틀버스에는 기나긴 대기줄이 펼쳐져 있었다. 다양한 국적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다섯 살 꼬마와 백발의 노인이 한 줄에서 후지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록페스티벌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후지록은 니가타 지역민들에게도 큰 축제다. 후지록 전야제에는 참관객 외에도 지역민들이 다 같이 모여 축제를 즐긴다. 전야제의 불꽃놀이는 모두의 여름 축제다.


기나긴 줄 때문인지 우리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야 공연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규모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캠핑장은 선착순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언덕배기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텐트 수령 줄도 꽤나 길어서 우리는 결국 어둑해진 시간에야 캠핑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나 샤워장 근처 자리는 이미 자리가 차서 우리는 애매한 언덕 부근으로 올라갔다. 다른 편에서는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전야제가 슬슬 시작하려나보다 생각하니 괜히 두근거렸다.


문제는 우리가 텐트 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다. 오는 길에 유튜브로 쓱 본 것이 전부였다. 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받은 텐트는 우리가 알던 그 무엇과도 달랐다. 잠깐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야제를 보러 갔는지 주변 텐트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저편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기사를 찾아보니 일본 방향으로 태풍이 오고 있었다. 댓글에서는 태풍이 일본을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아 이것이 매국노의 최후인가. 두두두두. 빗방울이 굵어질수록 내 마음도 쓸려가는 것 같았다. 야속한 텐트는 자꾸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우리는 어느새 비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버리고 싶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본부 지원사무소로 내려가 도움을 구했다. 타츠로 씨는 그곳의 스태프였다. 그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업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바꾸더니 장대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둑한 밤, 조명 아래는 비에 젖은 언덕이 축축하게 빛나고 있었다. 타츠로 씨는 텐트를 죽 둘러보더니 하나씩 하나씩 깃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거치자 텐트가 단단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텐트가 올라갈수록 그의 옷도 무겁게 젖어갔다. 텐트가 다 올라갔을 때에는 우리 모두 한바탕 거하게 빗물 샤워를 한 상태였다. 홀딱 젖은 그의 모습을 보니 고마운 마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그래도 그에게 다가가 고마움을 전하니 그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디스 이즈 후지록."


이렇게 태풍과 함께하는 게 진짜 후지록의 묘미라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에서 온 밴드 휴코(혁오였음)가 셋째 날 공연하는데 많이 기대된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사무소로 내려갔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우리는 전야제는 차치하고 바로 샤워장으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텐트에 누워 다시 기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누울 수 있게 됐구나. 페스티벌 내내 태풍은 계속되었다. 그 텐트는 이후 삼일 동안이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후지록에 간다고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지금 괜찮겠느냐고.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질문이었다. 지금 일본에서 괜찮겠느냐는 질문임과 동시에 지금 한국에서 괜찮겠느냐는 질문이었다. 후지록에 다녀오고 난 지금, 나는 질문을 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대답을 들려주고 싶다. 괜찮다고. 나는 잘 다녀왔다고. 후지록에서 본 공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곳의 음식은 어땠는지, 들이닥친 태풍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츠로 씨의 이야기를 꼭 같이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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