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아빠가 어제 수능 시험을 보고 와서 느낀 점을 정리해 줄게. 말로 했더니 모두 이해하기 힘든 듯하고 아빠도 나중에는 까먹을 듯해서 글로 남긴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보면 도움이 되겠지?
첫 번째, 필기도구는 주는 걸 써야 해.
고사본부에서 컴퓨터용 사인펜과 샤프를 그냥 주더라. 다른 필기구는 연필만 가능해. 지우개와 수정테이프는 감독관이 가지고 있지만 따로 챙기는 편이 좋기는 하겠더라.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고 적혀있는 문구를 보니 신기하기는 해. 왜냐하면 아빠는 이제 이 샤프와 사인펜을 5번 더 받을 예정이니까. 수능 기념 굿즈 같아서 좋기는 하다.
두 번째, 아날로그 손목시계는 꼭 챙겨야 되겠더라.
교실 앞 벽에 보통 시계를 놔두잖아. 그런데 이번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 갑자기 멀쩡히 올려져 있던 시계가 사라졌더라고. 감독관에게 물어보니 뭐라는 줄 아니? "시계가 안 맞아서 치웠어요. 혹시 시간 궁금하시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알려드릴게요."결국 문제가 생겼지.1교시 국어 시간에 종료 10분 전 예비령을 들은 뒤 시간 체크를 제대로 못한 바람에 아빠는 세 문제나 답을 쓰지 못했단다. 이렇게 시험을 망하는 수도 있겠더라. 손목시계는 꼭 챙겨가자.
세 번째, 귀마개를 가져온 아이들이 제법 있더라고.
귀마개는 매시간 감독관에게 검사를 받으면 쓸 수 있게는 해줘. 하지만 평소에 고사장 수준의 소리에는 영향받지 않게 집중력을 키우는 편이 더 좋겠지? 이 정도로 소리에 예민하다면 평소에도 공부하기 힘들 테니깐.
네 번째, 전자기기는 내라고 할 때 제출만 잘하면 괜찮아
처음에 수험생 유의.사항에 보면 전자기기는 반입금지라는 말이 있어. 아빠도 처음에는 가져가면 안 되는 줄 알고 걱정을 많이 했거든. 그런데 안 가져온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 감독관들이 지퍼백에다 정성스럽게 이름과 수험번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여서 보관을 해줘. 가져오지 말라는 말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더라.
8시에 맡기고 17시에 돌려받았으니 9시간 동안 완벽한 디지털 디톡스가 되어서 뜻밖의 이득을 얻기도 했지.
다섯 번째, 물통은 하나 챙겨라.
생각보다 고사장이 건조해. 물통은 옆에 놔둘 수 있게 해 주니까 하나 챙겨놓으면 좋겠더라. 다만 화장실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아예 안 마시는 편이 낫고.
여섯 번째, 학생들이 재수하겠다는 마음이 이해돼.
아빠가 1교시 국어 시험 시간 체크를 못하면서 세 문제나 마킹을 못하고 답안지를 내고 나니 진짜 억울함이 차오르더라. 찍기라고 했으면 한 문제는 더 맞을 수도 있을 테고. 진짜 수험생이었다면 그게 대학의 당락을 나누는 점수가 될 수도 있잖아. 물론 어찌 보면 이런 미세한 부분은 운이고 그 또한 실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더없이 억울하게 느껴지지. 아빠 같은 사람도 아쉽게 느껴지는데너희들은 어떻겠냐 싶더라.
일곱 번째, 하지만 그렇다라도 재수는 안 돼.
만약에 수능시험만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 정시로 재수를 한다면 아마 지금보다 2배는 더 빡세게 공부해야 하는데 그런 의지가 있다면 고등학교 때 보여주면 더 좋지 않겠어? 지금 아빠가 수능시험을 미리 보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1년 뒤에 이 시험을 또 치른다면 무조건 잘 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우리 가족 시간과 돈 모두 소중한데 미리 마음을 다잡고 고등학교 때가 마지막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도전해 주기를 바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노력이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증명해 주면 좋겠어.
여덟 번째, OMR 카드에 '필적 확인란'에 꼭 글씨를 써야 해.
시험지에 적혀 있는 글씨를 답안지 직접 적는 방식이야. 매년 문구가 바뀌는데 올해는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였어. 이 문구를 답지를 받을 때마다 써야 해. 귀찮기는 한데 말은 참 멋있더라.
출처 : 고유 캘리그래피
올해 수능을 보고 나니까 이 정도의 깨달음이 나오네. 내년 이맘때쯤 또 편지 쓸게. 내년에는 영어시험에도 도전할 테니 그때는 더 할 말이 많아지겠구나. 이 시는 어제 썼어야 하는데 오늘 올린다. 내년에 수정해서 재탕하려고.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