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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Jan 11. 2021

명확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깊이

<걸> 2018, 루카스 돈트 감독





15살 '라라'(빅토르 폴스터)는 남자의 몸을 갖고 태어났으나 여자가 되길 바란다. 또 한 가지 꿈은 '발레리나'가 되는 것. 라라는 호르몬 치료와 발레를 병행하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기 위한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간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5살의 비교적 어린 나이지만 라라는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는 여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여성이 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동시에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발레 학교에서 레슨을 받는다. 학교를 옮겨 새로운 학교에서 새 출발을 꿈꾸고, 발레 수업 또한 시작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그가 가야 할 길은 쉽지만은 않다. 다른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연마한 발레 기술을 15살에 시작하려니 굳어있는 몸의 관절과 근육들이 말썽이고, 잔뜩 감긴 테이프 아래 발에는 연습 과정에서 생긴 멍 자국이 가득하다.


주변 환경 또한 녹록지 않다.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등교한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 선생님은 라라가 눈을 감도록 시키고 반 여학생들에게 라라가 여자 화장실을 쓰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거수투표를 한다. 학교, 발레학교의 주변인들은 얼핏 보면 그를 차별 없이 대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언행과 시선에는 차별적인 태도가 미묘하게 묻어난다. 발레 학교의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탈의실과 화장실을 같이 쓰며 그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들의 몸은 봤으면서 왜 네 몸은 못 보여주냐며 라라에게 아랫도리의 성기를 보여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이런 무의식(혹은 의식) 중에 차별을 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트랜지션 중인 사람이 겪을 만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신체적으로 변화를 겪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주변인들의 이런 따가운 관심은 라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라를 힘들게 하는 건 라라의 신체 자체다. 라라는 트랜지션을 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아빠와 함께 그 과정을 밟아간다. 수술을 위해서 호르몬 요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상황에서 눈에 띄게 달라지는 신체적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라라를 초조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몸선과 여성성이 강조되는 발레에서 신체는 가장 필수적이고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라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능력을 증명해 보이려 노력하지만, 호르몬 요법과 강도 높은 연습이 겹쳐지면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고야 만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보다 훨씬 큰 문제는 라라의 내면에 있다. 그 자신이 자신의 몸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심 갈등은 라라와 외부세계 간이 아닌 라라와 그의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라라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몸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피지만, 성기가 있는 부분은 절대로 보지 않는다. 특수 속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할 때 성기 부위에 테이프를 붙여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샤워를 할 때도 속옷을 입고 하며 성기를 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바람과 현실 간의 괴리 속에 라라는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런 라라의 얼굴과 몸을 카메라로 따라가며 변화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라라의 감정은 관객에게로 공유되고, 관객은 라라의 내면에 간접적으로 동화된다. 이 영화가 발레를 묘사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발레라는 춤 자체보다도 그녀의 신체와 내면에 초점을 맞춰, 발레의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들을 강조하기보다 반복적인 안무를 행하는 라라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이 영화가 보이는 발레 동작들은 하나의 무용이라기보다 동작의 반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동작을 수행하는 라라의 모습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나 공연 전날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연습하던 라라가 연습실을 빠져나와 쓰러지기 전까지의 모습을 타이트하게 보여주는 씬은 반복되는 안무를 통해 관객을 답답하게 만듦과 동시에 반복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에 좌절하며 고통받는 그의 내면을 체감하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제71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주목할만한 시선 부문)과 황금카메라상을 수상을 포함해 유수 영화제 수상경력이 다수 있어 훌륭하게 평가되는 영화지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출품 당시에는 미국의 트랜스젠더 비평가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으며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트랜스젠더 배우들의 입지 자체가 제한적인 환경에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 젠더 배우를 캐스팅한 것과 성기를 포함한 라라의 신체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를 조성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은 단순히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나, 후자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실제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루카스 돈트 감독은 18세 당시 우연히 읽게 된 기사를 통해 그를 알게 됐고, 그 내용에 대해 영화를 구상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처음엔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것을 거부하던 노라 몽세쿠흐는 감독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 이 영화의 제작 허가를 포함해 영화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최종 단계까지 약 9년간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그는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영화 속 라라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영화의 시선과 방식에 대한 비판은 자칫 영화 속 이야기의 본래 주인공인 노라 몽세쿠흐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 인물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여타 영화들과 다른, 뛰어난 영화가 되는 지점은 오히려 바로 이 주인공의 내면과 신체를 바라보는 집요하고도 분명한 시선에 있다. <로렌스 애니웨이>(2012), <어바웃 레이>(2015), <대니쉬 걸>(2015)과 같은 최근의 트랜스젠더 캐릭터 중심 영화들은 트랜스젠더 캐릭터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캐릭터 곁의 가족과 연인 같은 중요한 존재에 함께 초점을 맞추거나 그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판타스틱 우먼>(2017)과 같은 예외의 영화도 있는데, 이 영화가 호평을 받은 지점은 <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많은 영화들이 관객에게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를 소수자 곁에 배치시켜 관객의 공감대를 끌어내려 하는 반면, 이 영화 <걸>은 영화의 모든 초점이 라라의 관점에 맞춰져 있다. 그의 곁에는 그를 든든히 지지하는 아빠라는 존재가 있지만 아빠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라라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돕는 존재일 뿐 이 영화의 서사를 끌고 가는 인물은 아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존재는 라라이며, 영화는 그런 그의 내면의 변화를 세밀하게 뒤쫓는다.

라라의 마지막 선택은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의 잘잘못은 중요치 않다. 자신의 신체에 해를 가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은 관객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진정 봐야 할 것은 그 과정에서 그가 느끼는 고통과 인내의 순간들일 것이다. 병원 침대에 앉아 유리창을 바라보는 라라의 얼굴이 반사되는 씬은 마치 라라가 마치 카메라 렌즈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응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지켜본 관객들에게 라라 본인이, 감독이, 영화가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이런 삶을 봤는데 당신은 어떻게 느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지.


바로 이어지는 마지막 씬에서, 라라는 사뭇 달라진 헤어스타일에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어딘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불안정하고 고통받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라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렇게 부정하던 자신의 신체를 이제는 받아들였을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스치는 중에 우리의 눈에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보이는 건 확신에 찬 듯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며, 그 속에서 은은하게 보이는 희망이다.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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