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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Feb 02. 2021

살아남은, 살아갈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 2019, 버르너바시 토트 감독





부모가 행방불명된 소녀 ‘클라라(아비겔 소크)’는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의사 ‘알도(카롤리 하이덕)’를 만나 나이를 뛰어넘는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딸과 아버지처럼 서로를 돌보며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삶의 따뜻함을 다시 맛본다. 하지만 스탈린 지배 하의 경직된 헝가리 사회는 둘의 관계를 예의 주시한다.




*개봉 전에 배급사 알토미디어(주) 측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로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홀로코스트로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알도의 삶은 무기력하다. 그가 집도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담아낸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아이의 생명력이나 탄생의 기쁨 보다도 그의 무료한 일상과 건조한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날 알도는 검진을 받기 위해 찾아온 클라라를 만난다. 몸에 별 이상이 없어 그는 별다른 처방 없이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런데 클라라는 그를 보러 다시 병원에 찾아오고,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집에까지 들어간다. 할머니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며 투덜대면서도 순간순간 씁쓸하면서도 슬픈 표정을 짓는 소녀, 이것이 알도와 그녀의 첫 만남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한마디 하자 얼굴을 붉히던 클라라는 차를 따르려는 알도의 허리를 붙잡고 그를 안는다. 이때 카메라는 알도를 안는 클라라를 보여준 뒤 알도의 표정을 보여주고 롱숏으로 둘을 함께 보인다. 알도의 무력한 일상에 클라라가 들어왔다. 클라라 또한 마찬가지다. 집에 바래다주고 떠나려는 알도에게 클라라는 주방에서처럼 해도(안아도) 되냐고 묻고 알도에게 안긴다. 이때 카메라는 둘을 부감 숏으로 잡는다. 부모의 부재로 외로웠을 클라라 또한 처음 만났지만 비슷한 아픔을 가진 알도를 알아보고 순식간에 마음을 연다.


알도는 그녀의 삶이 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그녀를 돕는다.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무언가를 먹이고,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선의를 가지고 실천한 행동은 그 과정에서 그의 일상 또한 바꾼다. 클라라 덕분에 그의 일상엔 점점 생기와 웃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둘의 서로에의 연대와 치유의 과정을 사려 깊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이전의 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홀로코스트의 현재성에 집중한 반면, 이 영화는 사건이 벌어진 뒤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을 겪어온 두 사람이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고통스럽거나 내내 무겁게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친밀해질수록 극의 분위기는 호전되고, 중간중간 펼쳐지는 크고 작은 위기 상황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고 진실되게 만든다. 사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힘을 전적으로 믿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순수하고도 농밀한 사랑 자체의 치유력이다. 둘의 관계를 오해하고 예의 주시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이들을 예의 주시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의 곁을 지킨다.




두 사람의 나이차 때문에 주변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오해하는 이들 또한 더러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끝까지 순수하게 남는다. 일부 장면으로 유추해봤을 때 클라라가 알도에게 순간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알도 또한 잠시 흔들렸을 수는 있다. 알도는 이 점을 미리 눈치채고 어느 순간부터 클라라와 거리를 둔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곁에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알도는 클라라가 또래 이성을 만나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을 장려하고, 자신 또한 마음에 둔 여성과 만남을 주선한다.


3년 후 다시 만났을 때, 둘의 관계는 이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서로의 짝과 함께 클라라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마치 하나의 대가족처럼 보인다. 클라라 부모의 빈자리도, 알도의 처와 아이들의 빈자리도 여전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또 하나의 가족에 가깝다. 그리고 이들은 라디오 음성을 통해 스탈린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이 소식에 감정이 복받쳐 오른 알도는 클라라와 염화수소 얘기를 했을 때처럼 조용히 화장실로 가 감정을 쏟아낸다. 클라라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문 앞에서 알도를 기다린다. 괜찮냐는 클라라의 물음에 알도가 답한다. "늘 거짓말이지." 클라라가 농담조로 답한다. "저도 화장실 좀 쓰려고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다.


상실의 구멍은 지나온 시간과 함께, 소중한 이들과 함께 서서히 메꿔졌다. 빈틈없이 촘촘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서로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갈 정도는 말이다. 알도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클라라도 이어서 돌아온다. "이 자리에 없는 그리운 이들을 위해 건배하자" 할머니가 건배사를 말하고 모두가 함께 잔을 든다. 먼저 간 사람들을 보냈지만 그들을 잊지는 않는다. 그들을 보내고 우리는 살아남았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잔을 부딪히며 함께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 온화하고 따뜻하다. 마지막 씬에서, 클라라는 버스 안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차창의 햇살이 그녀의 얼굴로 따스하게 내리쬔다. 사랑과 연대, 위로의 순수한 감정을 담아낸 이 영화가 직간접적으로 상실을 겪고 살아남은, 하루하루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을 모든 사람들에게 잔잔하고도 묵직한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영화는 사랑의 힘을 믿어보고 싶게 만드는, 지금을 살아가는데 위로를 얻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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