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시코기 Feb 19. 2021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이다> 2013,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




수녀원에서 홀로 자란 ‘안나’는 서원식 전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에 대해 알게 된다. 어렵게 만난 이모는 쌀쌀맞기만 하지만 ‘안나’가 유태인이라는 것과 본명이 ‘이다’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한다. 혼란스러운 감정도 잠시, 부모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그녀는 이모와 함께 숨겨진 비밀을 밝히기 위해 동행을 시작한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 "이다(Ida)"는 안나의 본명이다. 안나는 서원식 전에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모에게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된다. 자신의 실제 이름이 "이다(Ida)"라는 것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이모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다. 쌀쌀맞은 이모의 태도와 그녀가 전하는 정보에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싶어진 안나는 이모와 함께 그 흔적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이다"라는 한 이름의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다(안나)와 완다 두 명이라 할 수 있다. 안나는 부모에 대해 알아가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진실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그러나 안나가 부모에 대한 진실에 점점 다가갈수록 완다는 잊고 싶던 과거의 기억을 점차 떠올리며 그것에 잠식되어간다. 두 사람의 동행은 안나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임과 동시에 그녀의 이모 완다가 자신의 과거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과정이다.


수녀원의 제한적인 정보와 환경 속에서 격리되다시피 살아오던 안나에게 바깥세상은 신기하기만 하다. 안나는 바깥세상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진다. 수녀원 측의 배려로 서원식을 앞두고 직접 완다를 찾아가지만 이모 완다는 그녀를 쌀쌀맞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이모는 안나가 유대인이라는 것과 그녀의 실제 이름과 부모의 이름,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주고는 그녀를 수녀원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첫 만남부터 비밀로 싸여있던 완다는 안나가 수녀원에서 그녀에 대해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자 안나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 판사인 완다는 법정 재판 중에 생각이 잠기더니 이다를 데리러 버스터미널로 가고, 이때부터 그녀의 태도는 상반되게 온화해진다. 이다를 보고 마주하기 힘들던 과거를 떠올려서일 수도,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때문일 수도, 혹은 온전히 이다에게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계기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나 함께 서로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안나 가족의 죽음은 1941년 독일의 폴란드 점령  당시 폴란드 민간인들이 유대인 수백여 명을 죽였던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측해보건대 안나의 부모와 함께 죽은 어린 남자아이는 아마도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과거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죽은 가족들의 유골을 마주한다. 완다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스탈린 정부 하의 폴란드 공산당원이 되어 살아남았고, 안나는 갓난아이라 유대인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 가족을 죽인 남자는 무덤을 판 구멍에 앉아 죄의식을 보이긴 하지만 끝까지 이들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않고 집에서 계속 살게 되는 조건으로 유골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거래를 했을 뿐이다. 완다는 아들의 유골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녀는 자신이 판사로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저질렀던 과거의 행보를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반면 이다의 선택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엔딩씬을 그녀의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씬은 무척 독특하다. 내내 정적이던 카메라는 엔딩씬에서 급작스럽게 흔들린다. 감독은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이다의 모습을 핸드헬드로 잡는다. 핸드헬드 자체가 특별한 연출기법은 아니다. 다만 앞선 모든 장면에서 감독이 유지해오던 연출 방식과는 상반되게 끝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씬은 특별해진다. <이다>는 여백을 통해 스토리텔링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의 연출 특징이기도 하다. 차기작 <콜드 워>에서도 이어지는 4:3의 풀 프레임 화면비와 흑백의 이미지, 헤드룸을 많이 남기며 전통적인 미장센을 깨는 과감한 시도까지 그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고, 그는 형식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이 아닌 사이드에 위치하고 카메라는 여백이 많이 보이도록 대상을 비춘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세상의 구석으로 내몰린 느낌까지도 든다. 이 점을 <이다>에서 <콜드 워>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화 속 시대 배경과 연결 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와 운명이 반기지 않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인물들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다시 엔딩씬으로 돌아와서,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의 표정이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의지의 분위기가 엔딩씬 전체를, 관객을 압도시킨다. 안나는 어쩌면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 길을 비로소 시작하는 건지도. 지금까지 살아온 '안나'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든, 새롭게 알게 된 '이다'로서의 삶을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가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딘가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의지와 발길에 달렸다. 이다는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8065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남은, 살아갈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