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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유 Metaphor Sep 24. 2023

절름발이와 꼽추의 말싸움

끝없는 고통의 저울질

- 허리 굽은 게 무슨 대수냐? 나는 제대로 걸어 다닐 수도 없다고!
- 절뚝거려도 걸어 다니는 게 어디야. 난 살아 평생 하늘 한 번 본 적이 없단 말이다!

- 아들 녀석과 함께 뛰어놀 수도 없는 그 기분을 네가 알아?
- 사랑하는 내 아내를 올려다볼 수도 없는 그 기분을 네가 알아?

- 아냐고!
- 아냐고!




불행에도 등수를 매긴다는 어느 노래 가사는 사실이었을까?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만큼 답답하고 슬픈 일도 없다. 어떤 일로 인해서든 나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든데, 상대가 그 일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또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한다면 어떨까?


네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냐.
난 더한 것도 겪었어.
넌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사람이 힘들어 죽겠다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불행히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주변에 만연하다.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명백하게 나보다 높은 위계에 있는 사람, 혹은 내가 굴복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 직장상사, 교수님, 혹은 애석하게도 당신의 부모나 친구일 수도 있다. 심지어 누군가에겐 당신이 그러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상대의 고통을 수치화한다. 사람의 머리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때문에, 상대방의 상황을 낱낱이 듣고 공감하는 것 대신에 상대적으로 쉽고 빠른 방편으로 자신의 경험을 그 옆에 나란히 세워 비교한다. 고통의 무게를 고기처럼 저울질하다니. 고통이라는 개념은 정말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있는 것일까? 남의 팔이 잘려도 내 손 끝 베인 게 제일 아프다는데, 그렇다면 팔이 잘린 사람 앞에서 내 베인 손 끝을 내미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




  두말할 것 없이 아프리카로 가보자. 2017년, 아프리카 중부에서는 2160만여 명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나이지리아 북동부, 남수단, 소말리에, 예멘. 4개 국가에서만 2천만 명 이상이 "파괴적인 식량 위기"를 겪고 있다고 유엔은 발표했다. 우리나라 인구가 약 5천만 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이며, 굳이 이런 통계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애잔한지 잦은 광고와 매체들을 통해 잘 인지하고 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갓난아기가 파리를 쫓아낼 힘도 없이 앙상한 뼈만 남은, 그런 모습들을 말이다.


  이제 2023년 오늘, 당신의 집으로 가보자. 당신은 요즘 우울하고 기력이 없다. 얼마 전 부모님이 좋지 않은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졌을 수도 있다. 친구와 크게 다투었을 수도 있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매일 마주치는 누군가가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소중한 사람이 아주 멀리 가버렸을 수도 있고, 열심히 준비해 오던 일을 그르쳤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애잔하고 잔혹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 저녁, 배가 고파 치킨을 시켜 먹었다.


  그래, 당신은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굶어 죽어갈 동안 아늑한 집에서 치킨이나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구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마당에 치킨을 배불리 먹었으니, 힘들다고 느낄 자격이 없는 것일까?




  CRPS라는 질병이 있다.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을 일컫는 이 질병은 쉽게 말해, 아주 작은 촉감도 칼로 찌르는 듯 극심한 통증으로 느끼는 희귀 질환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압력을 받는 엉덩이에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몸을 진정하기 위해 이불을 덮으면 이불이 살결에 닿는 부스럭거림 만으로도 끔찍한 비명을 질러야 할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 의학계에서는 '작열통.' 즉, 불에 타는 고통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으로 정의하곤 하는데, CRPS환자들은 이러한 고통을 매일같이 느끼기 때문에 아편이 포함된 마약성 진통제를 매일같이 달고 살지만 이 역시 잠시 뿐,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통증에 금세 혼절해 버린다.


  CRPS는 건장한 성인에게는 물론, 아무런 죄도 없는, 어리고 나약한, 순진하고 무구한 청소년들에게도 차별 없이 발병하는 원인 불명의 질환이다. 신체적 결함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살에 무언가 닿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다니. 더군다나 이들이 겪는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들은 알 길이 없다. 때문에 CRPS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 호기심에 이들을 고의로 건드리거나, 꾀병 취급하며 가해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꾀병'이라는 저급한 단어로 수식할 수 없는 막대한 고통이라고 해도, 그들의 고통을 거짓이라 생각하기란 애석하게도 너무나 간단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게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가 아프면 약을 먹고, 다리가 아프면 잠시 앉는다. 허리가 아프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목이 아프면 따뜻한 차를 데워 마신다. 그런데 자신이 그 어떤 짓을 해도 극복할 수 없는 통증이 있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하지만 당신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현관문을 열고, 조금 전 배달시킨 치킨을 받았다.


  그래, CRPS로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보고도 아늑한 집에서 치킨이나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구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고통 속에 울부짖는 마당에 치킨을 배불리 먹었으니, 힘들다고 느낄 자격이 없는 것일까?




  그러니까, 아무튼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실존하지만, 타인에게 그것은 절대 전달되지 않는다.


  지구 어딘가에서 기아로 허덕이는 아이들이 굶어 죽든, 누군가 불치병에 결려 비명을 지르든, 심지어 길을 가다 눈앞에 사람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든, 그들의 고통보다는 당신의 베인 손 끝이 제일 아플 수밖에 없다. 삶의 주체는 당신이고, 당신 이외의 존재가 느끼는 고통은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고통은 상대적이라는 말이 된다. 절대적 고통이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상술했던 CRPS 같은 극단적인 예시를 들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없음은 너무도 쉽게 설명된다. 당신의 친구가 눈앞에서 의자에 묶인 채 전기고문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더라도, 사실 당신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 다만 그 친구와의 관계와 추억, 함께했던 시간들의 무게가 그 친구의 소중함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광경을 차마 눈 뜨고 못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가 겪고 있는, 전류가 온몸에 흐르는 통증은 당신에게 절대, 절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끝내, 타인의 고통은 절대로 내게, 그리고 내 고통은 절대로 타인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고로 내가 얼마나 아픈지 상대도 알 수 없고, 상대가 얼마나 아픈지 나도 알 수 없다. 사람의 감각질(퀄리아)은 서로 공유되는 것이 아니어서, 고통의 원리나 감각을 설명하는 것 만으로는 고통을 전달할 수 없고, 하물며 내가 보고 있는 빨간색이 상대에게도 똑같은 빨간색인지 조차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럴 것이라 믿고, 유추하고, 공감할 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고통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도 결과는 똑같다는 것이다. 같은 조건을 놓고 만족과 불만족을 느끼는 설화 형식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니, 반이나 남았니, 하는 얘기들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현실적인 조건이 비슷하다면, 우리는 무조건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야 할까?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연봉이 높다고 해서, 그들보다 반드시 행복할 거라는 보장이 있나? 그들의 양친이 모두 살아계신다고 해서, 편모가정인 나보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연인이 있다고 해서, 연인이 없는 나보다 반드시 삶이 풍요로울 것인가?


  이런 일반론적인 사고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다양성을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나보다 연봉이 높은 그 친구는 사실 남몰래 집에 매달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고 있을 지도, 양친이 모두 살아계신 그 친구의 가정은 사실 가정폭력과 부모의 고압적인 태도로 가정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연인이 있는 그 친구는 사실 마음의 병이 있는 연인으로 인해 끔찍이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일관적이지 않다. 각자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환경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 행복과 고통은 천차만별로 다양해진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설명할 때에도 조심을 기해야 한다. 상대를 설득하는 수단으로 내세울 것이 내 고통뿐이라면, 대화는 은근슬쩍 언쟁으로 변해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타인의 행복과 고통의 등락을 받아들이는 데에 인색하다. 나보다 잘 된 사람에게 축하를 건네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보다 불행해진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삶 속에서 아픔을 겪는다. 상처 없이 자라난 나무는 없다. 아무리 밝고 활달한 사람이라도, 아름답고 멋져 인기가 많은 사람도, 부족함 없을 것만 같은 금수저 도련님에게도 말 못 할 상처 하나쯤은 분명 있게 마련이다. 당신은 지금 고통스러워할 자격이 있으며, 같은 이유로 상대에게도 아파할 자격이 있다. 결국 그것들은 내게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이 내게 전달되고 있다는 착각의 부산물로써 열등감과 자격지심 등이 피어날 뿐이리라.


  그러니 무의미한 저울질은 관두자. 내 경험을 상대의 경험 옆에 나란히 세우지 말자. 상대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정답으로 내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자. 내가 느낀 고통이 상대에게도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순간, 상대와 나 사이에는 어떤 길이 열린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무수히 많은, 그동안 닫혀 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 서로의 고통이 실존하고 있음을 믿는 것. 절름발이와 꼽추는 사실,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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