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폭염에 휘말린 작은 질문
본 리뷰는 작품의 내용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작중의 묘사나 연출 등에 대한 상징 또는 은유를 중점적으로 해석한다.
모든 것들이 연쇄 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켜,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 영화 '오펜하이머' 중에서
영화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필모그래피 중 이례적으로 실존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한 실화 기반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영화다.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영화가 지루하고 뻔한 작품이 되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 등을 연출하는 데에는 공을 들이기 쉽지만, 그 사실을 기반으로 감독 자신이 어떤 말을 관객들에게 건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투영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는 당연히 왜곡이 있어서는 안 되며, 감독 자신이 그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 역사를 통해 스스로 조명하고 싶은 어떤 구체적인 부분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창작과 새로운 세계를 선보이는 것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기조를 생각해 보면, 그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는 아직 어렵다. 다만, 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생애를 영화로 만드는 데에 있어 어떤 부분에 강한 조명을 비추고 있는지는 작품 내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본 리뷰에서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그가 작품 내에서 비추고 싶었던 역사적 사실 가운데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영화를 해석해 나갈 것을 일러두며 서두를 시작한다.
영화는 이글거리는 화염의 이미지와 함께 프로메테우스의 시놉시스로 시작한다.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주었고, 인간들은 불을 통해 번영을 이루게 되며 프로메테우스를 신봉하게 된다. 하지만 이 행각은 제우스에게 발각되어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자락에 사슬로 묶여 30,000년 동안 새들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당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는 신봉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지만, 신계에서는 반역자 또는 죄인으로 구분된다. 작중에서 오펜하이머가 과학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동반한 미국의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곧 소련의 내통자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되는 점. 또한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핵 무기의 개발을 통해 평화를 이룩해냈지만, 그에 준하는 파급력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케 한 점 등. 오펜하이머의 생애는 자신이 지키려는 신념에 의한 선택의 결과로, 극단적으로 양분된 결과를 얻게 된 프로메테우스의 서사와 닮아있다.
불안정한 선지자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영화인 만큼, 영화의 서막에 프로메테우스의 시놉시스를 넣은 점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이 된다.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이 전 세계에 보여준 위력은,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올 만큼 막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에는 학계와 역사적 당위성 등을 들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분명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외면하고, 핵 무기 개발을 포기했겠는가? 히틀러의 자살로 나치가 종식되지 않았다면? 소련이 먼저 핵 무기를 개발해 체제를 위협했다면? 일본이 약진을 멈추지 않아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면?
오펜하이머의 마케팅 자체가 '핵폭발'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보니, 핵분열/핵융합 또는 핵폭발에 관심 있는 관객들이 상당 부분 있었을 것이다. 끝내주는 폭발 장면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아간 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핵폭발'이라 할 수 있는, 또는 그에 준하는 폭발 장면은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원자폭탄. 즉, 핵폭발이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지닌 작품임에도 불구, 핵폭발에 대한 연출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핵폭발에 대한 일본의 범국민적인 트라우마 등 국제적인 정세에 대한 의식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 감독은 작품 내에서 핵폭발을 완전한 상징적 장치로만 사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 폭발의 연출은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거나, 끔찍한 파괴력에 대한 회의를 은유할 때 주로 쓰인다. 사람들이 폭발에 휘말리고,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그로 인해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등 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 폭발의 연출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히틀러의 자살로 인한 나치와의 대립 종식도,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에 대한 참상도, 그저 주변 인물에게 전해 듣거나 라디오 청취로 알게 되는 등, 물리적인 전쟁이 묘사될 만한 장면들을 아예 배제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작중에서 핵폭발이 연상되는 장면은 세 번이 나온다. 첫 번째는 오펜하이머가 핵실험장에서 처음으로 실제의 핵폭발을 마주했을 때. 두 번째는 일본 원폭 투하로 전쟁이 종식된 이후, 아직 가치판단을 마치지 못한 불안정한 오펜하이머가 어떤 무대에서 혼란스러운 채로 연설을 이어나갈 때, 세 번째는 청문회 심문 도중 수소폭탄 후속 개발의 찬반 유무로 로저 롭과 설전을 벌일 때 등이다.
핵폭발은 오펜하이머의 가치 변화를 상징하는 장치다. 그의 가치가 변화하는 과정은 핵폭발에 견주어도 될 정도로 격정적이고 절박했다는 감독의 생각이 덧붙여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오펜하이머가 핵실험장에서 핵폭발을 관측할 때, 그는 자신의 입으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발음한다. 작품 초반에서 진 태트록과의 질펀한 배드신 도중, 그녀의 강권에 의해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고 그저 읊조렸을 뿐일 때와는 대조된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문장을 읽을 때는 훗날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암시될 뿐인 복선이었지만, 핵폭발의 위력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것이 현실이 되었음을 자각하는 상태다. 이후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고, 무대에서 승리 연설 같은 것을 할 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자신이 애국자인지 학살자인지 가치 판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반영으로 관객들의 형상이 일순간 일그러지며 마치 핵폭발에 휘말려 산화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청문회장에서 수소폭탄 후속 개발에 대한 찬반으로 로저 롭과 설전을 벌일 때, 다시 한번 핵폭발의 섬광 묘사가 일어난다. 이윽고 그는 완전한 가치 판단을 마친 채, 수소폭탄 개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흑백 화면과 컬러 화면의 혼용이다.
영화는 청문회장에서 심문 받는 오펜하이머를 컬러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때, 화면에는 자막으로 '1. Fission'이라는 소제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의 의장인 루이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를 처음 마주하는 장면을 흑백으로 보여주며, '2. Fusion'이라는 소제목이 등장한다.
'Fission'은 '핵분열'을 의미하며, 원자폭탄의 작동 원리인 핵분열. 즉, 오펜하이머를 상징한다.
'Fusion'은 '핵융합'을 의미하며, 수소폭탄의 작동 원리인 핵융합. 즉,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했던 루이스 스트로스를 상징한다.
마치 '메멘토'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각 인물의 서사를 각 인물의 주관적인 시점에서 동시에 전개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오펜하이머의 말로에는 결국 루이스 스트로스와의 전면 대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두 인물이 파국으로 치닫는 대립을 각각 핵분열과 핵융합의 상징으로 병치시킨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두 상징성의 대립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왜 루이스 스트로스의 시점만 흑백으로 연출했을까?
알다시피 영화에서 흑백 장면은 회상 또는 과거의 의미를 지닌 연출이다. 컬러 화면이 있기 이전에 흑백 영화가 성행하기도 했으며, 많은 영화 또는 애니메이션 등에서 회상 또는 과거의 장면에 흑백 화면 연출을 사용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루이스 스트로스의 시점이 흑백으로 연출된 까닭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회상 또는 과거의 장면에서만 흑백 화면 연출을 사용한다는 것은, 곧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올 때 다시 컬러 화면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흑백은 과거, 컬러는 현재.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업적과 도덕적 윤리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고 고통받으며 가치판단을 수정하려 하지만, 루이스 스트로스는 끝내 더 큰 파괴력을 얻기 위한 수소폭탄 개발이라는 활로에 뛰어든다. 감독이 생각한 우리의 현재. 즉, 컬러 화면은 오펜하이머 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이스 스트로스로 대변되는 더 막대한 힘과 파괴력으로 억지되는 평화보다는, 무엇이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진정한 방법인지 최소한 고민이라도 했던 오펜하이머 쪽에 우리의 현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 할만한 것은 단연 '연쇄반응'이다. '연쇄반응'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구 같은 것이다.
우라늄 235는 매우 무겁고 불안정한 원소이기 때문에, 중성자의 충돌로 인해 붕괴될 수 있다. 이때 함께 구성되어 있던 중성자 및 전자가 튕겨져나가며 우라늄 235는 질량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것이 원자력 발전의 기조이다. 우라늄 235에서 튕겨져나간 중성자가 또 다른 우라늄 235를 가격하고, 그 우라늄 235는 중성자를 방출하며 질량을 잃어버리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고, 또다시 중성자가 방출하며 다른 우라늄 235를 가격하고···. 그렇게 '연쇄반응'을 통해 막대한 열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이 연쇄반응으로 달구어진 연료봉으로 물을 데워 그 증기로 터빈을 돌리는 것이며, 핵탄두에는 바로 이 우라늄 235가 정제된 형태로 삽입되는 것이다.
작품 초반, 핵분열에 대한 이론을 완성한 오펜하이머는 동료 과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쇄반응'에 대한 우려를 나눈다. 상술했던 우라늄 235는 핵탄두에 삽입되어 연쇄반응을 일으킬 것인데, 이 연쇄반응이 핵폭발에서 그치지 않고 공기 중 혹은 세상 모든 만물과 연쇄반응을 일으켜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해당 의문에 동료 과학자는 그럴 확률은 '0에 가깝다'라고 대답하지만, 오펜하이머는 '0이 아니라 0에 가까운 것이냐'라며 그 미약한 가능성에 우려를 표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직전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건넸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지며 '연쇄반응'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모든 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었죠.
그게, 이미 일어난 것 같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오펜하이머의 낙담을 들은 아인슈타인은 분노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등을 진다.
여기에는 원자폭탄 내부에서 일어나는 연쇄반응. 즉, 그 막대한 파괴력에 희생될 생명들에 대한 낙담도 있지만,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대변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및 강력한 억지력에 대한 욕구를 두고 벌어지는 이권 다툼 등, 사람 간의 분쟁과 이념 간의 대립, 나아가 전 세계의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회적 연쇄반응에 대한 낙담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0에 가까운' 가능성은 묵살된 채 연구는 진행되었고, 원자폭탄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세계와 이념의 대립 및 사회적인 '멸망'은 그 좁은 가능성을 뚫고 현실이 되어버린 것. 결국 세상이 멸망할 가능성은 0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한편,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의 산물인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에게 분개하며 등을 돌리는 은유적 표현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영화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짜인 이야기다. 때문에 실화 기반의 영화가 겪는 불편함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다. 서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닐스 보어, 리처드 파인만,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 저명하고 방대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인물들의 설명까지는 자세하지 못했으며,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어야만 등장인물들의 대립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적잖아 있었다. 또한 감독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적 사실의 진행을 위해 지루하고 따분한 구간이 일부 존재하기도 하며, 원자폭탄의 폭발력을 매개로 한 블록버스터식 연출이 아니었기에 상업영화와도 거리가 있다 할 수 있겠다. 작품의 특성상 감독의 역량이 드러나기 어렵기 때문에, '놀란의 상상력'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 있겠다.
다만, 인물 간의 이념 및 가치관의 대립에 많은 힘을 주고 연출하고 있기에, 생각해 볼 거리와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선호할만하다.
전작이었던 '테넷'은 실제로 다분한 과학적 지식을 요구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지만, '오펜하이머'는 결국 선형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는 영화이며, 작중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이므로 사전 혹은 사후에 지식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마음 편하게 관람해도 좋다. 다만, 감독이 조명하고 싶은 부분과 힘을 준 연출 등에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결국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 '오펜하이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호확증파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쉽게 말해 동귀어진으로, 핵을 보유한 적국이 핵 전력을 필두로 선제공격을 해온다면, 그 상대국 또한 핵 전력을 이용해 보복할 수 있다는 공멸의 개념이다. 역시 소련이 존재하던 미/소 양극체제 시대에 탄생한 개념으로, 더욱 강력한 힘만이 전쟁 억지력을 갖는다는 무자비한 논리라 할 수 있다. 반면, 오펜하이머가 말년에 취한 자세. 즉, 상호확증파괴의 위협을 통한 전쟁 억지력이 아닌, 비무장과 비살상을 기반으로 세계의 평화를 일구어낼 수 있을까? 피가 아닌 것으로 쓰이는 이념의 화합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놀란은 작중에서 오펜하이머를 결코 미화하지 않았다. 그는 여지없이 혼란스러운 파괴자이며, 일그러진 선지자로 그려진다. 영화의 서두를 빌려, 한 번 더 당신에게 묻겠다. 프로메테우스는 선지자인가? 아니면 죄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