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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롤로 Sep 09. 2024

다음 달에는 회사 대신 경주에 있기로 했다

퇴사한 직장인의 경주 여행기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언제까지 이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제 막 이직의 황금기라 불리는 4년차에 접어든 나도 마찬가지였고. 과도한 업무량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관리가 점점 힘에 부칠 때쯤, 팀의 리더가 부재하게 됐다. 하필 마음 속의 마지노선이던 입사 1년 11개월때에. 당시 팀의 상황 상, 함께했던 리더가 떠나면 내 거취가 불명확해지는 타이밍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리더와 함께 나가고 싶었지만 2년이라는 마지노선이 나를 붙잡았고 결국 2년을 조금 넘겨 다른 팀에서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처음 이 회사에 합류했을 때에는 3년은 기본이고 4년 이상도 다닐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가 하고 싶은 직무를 중고 신입으로 경험하게 된 소중한 기회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정말 좋았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좋지만 내가 하고 싶은 업무가 주어지진 않았다. 물론 어느 회사를 가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참아야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20% 하기 위해 나머지 리소스 80%를 다른 일에 쏟아야하는 건 견디기 쉽지 않더라. 디폴트로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 업무가 있는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더 해보겠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어려웠다. '다른 곳 가도 다 똑같아. 이만한 회사가 어디있겠어?' 라고 체념섞인 합리화를 하다가도, 불현듯 내 명함을 보면 다른 회사로 옮길 때 내게 이 직무에 알맞은 역량이 준비되어 있을까 걱정도 쌓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던 내 마음에 결정이 선 건 생각보다 평범한 트리거였다. 바로 다른 회사의 JD. 그럼 이직에 성공한 것이냐 물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진 않다. 타사 JD를 보면서 2년 전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그리고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그 달의 마지막 날에 퇴사 의사를 전했다.


1차 리더와 2차 리더에게 의견을 전한 후 내게 3주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업무 인계를 준비하면서도 새로운 프로젝트의 기초 작업까지 준비해두고 나가야하는 상황. 팀의 리소스가 없는 상태라는 걸 알기에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마음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고 가고 싶으니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업무상으로는 퇴사를 말하기 전과 후가 큰 차이 없어 보였으나 퇴근길에 찾아보는 검색어가 달라졌다. 평소라면 유튜브를 보거나 채용 어플을 켜 JD를 샅샅이 훑었을 텐데, 이제 숙박 예약 어플을 켜거나 지도에 저장해 둔 여행지를 살펴보게 되더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 달라진 내 행동을 깨달았을 때 퇴사한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단양에 가고 싶었다. 작년에 결혼한 아는 언니가 남편될 사람과 당일치기로 단양을 다녀왔는데 참 예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마침 가을에 단양이 인기 여행지로 손꼽힌다는 말에 여러 코스를 살펴보았지만 혼자 여행을 가기에는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추천 여행지도 대체로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 갈법한 코스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곳이 경주였다.


올여름 주변 지인들이 하나같이 다들 경주월드에 다녀왔다. 수영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여 다음엔 나도 가봐야지 싶었지만 마음 한 켠에 '퇴사하기 전에 가볼 수 있을까? 거리가 너무 먼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에는 씁쓸했지만 퇴사를 결심한 지금은 정말 탁월한 여행지였다. 선선한 가을 정취에 꼭 맞는 지역 이미지와 기차나 버스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접근성, 먹거리가 즐비한 황리단길과 산책하듯 보기 좋은 문화재들까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바로 실행하는 편이라 결정이 선 후 바로 기차표와 숙소를 확정했다.


여행이 2주 정도 남은 지금, 다음 달이었던 여행이 벌써 이번 달로 바뀌었다. 여전히 얼마 후 이 시간에는 익숙한 회사의 내 자리가 아닌, 낯선 도시의 어딘가를 거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커지는 중이다. 선택에 후회 없겠냐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던 시기도 있었지만 더이상은 아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나를 믿고 또 이렇게 선택하게 된 그 과정을 믿는다.


그래서 다음 달에는, 아니 이번 달에는 회사 대신 경주에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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