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골웨이에서
아일랜드 골웨이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숙소에서 추천해 준 펍으로 향했다. 술은 (이제) 잘 못 마시지만 아일랜드에 왔으니 아이리시 펍은 가 봐야 할 것 같았고, 저녁 먹고 음악을 들으며 골웨이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생각해 볼 계획이었다.
펍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춥고 고요한 바깥과 완전히 다른 장르의 풍경이 펼쳐졌다. 일반 테이블부터 바 테이블까지 앉을 공간은커녕 서 있을 공간도 없이 빼곡했고, 잔뜩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데시벨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아니, 여기서 대체 어떻게 주문하고 자리를 잡아야 하지?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찌할 줄 모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 있던 그때,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곤니찌와, 니하오?'
또야?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걸로 대화를 차단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왼쪽에 있던 남자가 다가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두 번이나 뭐라고 한 거냐 물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남자가 하는 말,
'너 필리핀 사람 아니야?'
설마 방금 나한테 따갈로그어로 말한 건가? 갑자기 짜증이 솟구쳐 올라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펍에서 나왔다. 다시 주변이 고요해지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고 정신이 좀 돌아오자, 내가 너무 심했나? 그냥 아니라고 하고 한국에서 왔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1초 정도 들었지만,
아아니!
한두 번도 아니고 저런 것까지 어떻게 다 일일이 예의 있게 대꾸해 줘? 자기가, 어?곤니찌와, 니하오만 알든, 따갈로그어를 할 줄 알든 말든, 그걸 왜 아무 아시아인한테 하는 것이며 내가 그걸 왜 받아줘야 하냐고.
씩씩거리며 걷다가 그나마 좀 조용해 보이는 펍의 문 앞에 섰다. 안에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대충 아니까 그 문을 여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혼자 산 지도 혼자 여행다닌지도 너무 오래돼서, 이제 혼자 못 하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혼자서 아이리시 펍에 들어가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숨을 들이쉬고 문을 힘껏 열자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삼삼오오 짝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 한껏 고조된 분위기와 높은 데시벨의 웃음소리, 대화 소리. 혼자 온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나갈까 잠시 멈칫했지만, 손에 힘을 꽉 주고 성큼성큼 들어가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일랜드에 왔으니까 기네스를 마셔야 할 것 같았지만 골웨이에 있으니 ‘골웨이 페일 에일’ 생맥주를 시켰다. 최근에 술을 마실 일이 있으면 무알코올 맥주만 마시는데 뭔가 아이리시 펍에서 무알코올 맥주를 시키면 홀대받을 것 같은 느낌?
골웨이는 아일랜드 남서쪽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로 게일어로 ‘외국인들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곳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예전에 온라인으로 스페인어를 배운 선생님인 베아트리스가 당시 골웨이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가수들이 해외에서 버스킹하는 음악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에 나와서 좀 알려진 것 같고,. 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에드 시런의 노래 ’골웨이 걸‘의 그 골웨이로 알고 있을 듯하다.
대도시보다는 작고 조용한 곳에서 차분하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12월 30일의 골웨이는 어쩐지 좀 썰렁해 보였다. 여기에서 3일 동안 머물기로 한 선택이 잘 한 게 맞나?
아침에 일어나니 생리가 터졌다. 어제부터 기분이 좀 오락가락하더라니. 이번 달은 생리통도 당첨이다. 나에겐 날씨 요정이 있지만 최근 생리 요정이 가출해 여행 갈 때마다 생리가 겹친다.
나 지금 매우 짜증나고 컨디션 나쁘니 아무도 건드리지 마시오. 이런 표정을 장착하고 아침을 먹던 중 휴대폰에 알림이 왔다. ‘예약한 투어가 한 시간 후에 시작학합니다.’ 투어? 내일 아니었나? 얼른 확인해 보니 오늘이 맞다. 아직 씻지도 않았고 컨디션도 안 좋은데 하필 이런 날 투어라니.
그나마 출발 장소가 숙소 바로 앞이라 천만 다행이었다. 정신없이 준비해서 출발 장소로 뛰어가니 커다란 관광버스가 한 대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모허 절벽이었다.
모허 절벽은 해리포터를 포함해 수많은 영화와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아일랜드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모허 절벽으로 가는 중간 고인돌과 성도 방문하고 펍에 들러 점심 식사까지 한 후에 마지막으로 모허 절벽에 들르는 꽤 긴 코스의 여정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웠다. 겨울인데도 축축한 초록을 볼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시야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광활한 자연이 컨디션 난조로 꽉 막혀 있던 속을 뻥 뚫어 줬다. 모허절벽에 도착하니 해도 쫙 나고 바람도 멎어 둘러보기 딱 좋은 날씨다. 그래, 생리 요정이 쉬면 날씨 요정 너라도 열일해야겠지?
모허 절벽은 장장 8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 절벽으로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이 규모와 장엄한 풍경은 사진으로는 절대로 담을 수 없다. 여기서 두 시간 정도 자유 시간이 주어져 바다를 낀 산책로를 따라서 쭉 걸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골웨이로 돌아왔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중국 시안 거리 음식을 파는 식당에 들어가 뱡뱡면을 시켰다. 너무너무 맛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먹었다. (그리고 이틀 연속으로 이 식당에 출근함) 그래 이거지. 겨울에는 역시 아시아 누들이야.
맛있는 걸 먹고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가, 새해 전야라 그런가 전날 어딘가 썰렁해 보이던 골웨이 시내가 좀 달라 보인다. 길마다 반짝거리는 다른 모양의 조명도 예쁘고 곳곳에 활기가 넘쳤다.
전날 펍에서 음악 듣는 걸 실패했으니 다시 한번 펍에 들어가서 음악을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할까 했지만 첫 번째 펍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그냥 숙소로 갔다. 모두가 파티하러 나가고 텅 빈 숙소에 돌아와 10시부터 침대에 누웠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누군가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사람은 작게 ‘해피 뉴 이어’라고 인사했고 나도 잠결에 똑같이 ‘해피 뉴 이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