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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y 04. 2023

갑자기 바뀐 순례길 분위기

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밤 12시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코 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뒤늦게 돌아온 순례자 둘이 코골이로 돌림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다들 잠이 깬 모양이다. 속으로 욕하는 소리가 공기로 전해진다.


2시간이나 잤을까? 휴대폰으로 6시가 된 걸 확인한 후 짐을 싸 들고 공용 공간으로 나왔다. 곧이어 사라, 아나 주이, 인마와 루이스까지 줄줄이 나왔는데 다들 눈이 퀭하다. 누군가 잘 잤냐고 묻는 말에 말 없이 오고 가는 다 알지 않냐는 눈빛.




Day 3.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
레돈델라(Redondela)에서 폰테베드라(Pontevedra)까지
19.6km

잠을 잘 못 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순례길 세 번째 날 시작.


덥지도 춥지도 않고 햇빛이 살짝 가려진 딱 걷기 좋은 날인데, 길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길 위의 순례자 수가 갑자기 두 배 이상 늘었다.  레돈델라에서 포르투갈 내륙길과 해안길이 합쳐져서 그런 듯하다. 


앞뒤로 열댓 명이 걷고 있어 꼭 줄 서서 행렬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무리로 걷는 사람들이 많아 너무 시끄럽다. 좀 조용하게 걷고 싶어서 걸음을 늦춰 몇 팀이나 앞으로 보냈는지 모르겠다. 


놀라운 건 프랑스길에는 이것보다 사람이 더 많다고....? 


그리고, 이 길에서 사람들 인사 안 한다고 툴툴거리기는 했어도 어제까지는 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았는데, 이제는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많아져서 어쩔 수 없는 건가?  두 걸음 걸을 때마다 '부엔 까미노'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오늘 길은 참 예쁘다. 종종  공사하는 길을 지나기도 했지만 숲길이 많이 나왔다. 



 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소리 시원하고, 들판을 가득 메운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들꽃에 눈이 즐겁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떠다니는 꽃향기까지, 다 순례길의 반가운 동행들이다. 


순례길의 동행은 또 있다. 


앉아서 지나가는 순례자 구경 중인 소들도 있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누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디어를 낸 걸까? 순례자의 신발을 색칠해서 만든 화살표. 노란 신발은 산티아고 방향, 파란 신발은 반대 방향. 



이렇게 좋은 순례길이지만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마을이 나오지 않을 때는 정말 괴롭다. 중간에 들른 마을에서 커피를 마셨더니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다음 마을은 나오지 않고, 자연 화장실을 이용하기에는 길 위에 눈에 너무 많다. 


화장실은 가고 싶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질 때쯤 인마와 루이스를 마주쳤다. 두 사람 걸음 속도가 너무 빨라서 중간에 몇 번이나 둘을 먼저 보낼까 했다. 그런데 틈도 주지 않고 인마가 계속 한국에 대해서 질문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고, 용을 쓰며 따라 걷다 보니까 목적지 폰테베드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예약한 알베르게는 내가 예약한 곳 바로 옆이었는데, 문 앞에서 오늘 아침 제일 먼저 나가서 이미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씻고 빨래까지 끝마친 사라와, 막 체크인 한 아나와 주이를 마주쳤다. 


우연찮게도 예약한 곳이 다 같은 알베르게라니! 나만 다른 곳이긴 했지만 바로 앞이라서 어쨌든 같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


도착 후 루틴인 샤워와 손빨래를 마쳐 놓고 사라를 만나서 마을 구경에 나섰다. 



폰테베드라는 갈리시아 자치지역의 폰테베드라 주의 주도여서 그런지 마을이라기에는 소도시에 가까웠다. 폰테베드라가 주도이기는 하지만 인구는 비고가 더 많단다. 갈리시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다음으로 역사유적이 풍부하다는데 확실히 잘 보존된 중세 도시 느낌이 물씬 났다. 



이 골목 저 골목  걸어 보고, 로컬 디자인 숍도 구경하고, 근사한 작은 서점도 들어가고, 잠시 순례자 신분을 잊고 관광객이 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책도 읽고 자전거도 타되 두 개를 동시에 하지는 마세요


어느 서점에서 본 귀여운 포스터


출발 시간: 8시 

도착 시간: 14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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