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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Jan 19. 2024

헬싱키에 볼 게 없다는 분들께


헬싱키와 관련해 검색할 때마다 ' 수도치고 딱히 볼 게 없다', '하루만 둘러보면 충분하다'라고 하는 평을 심심찮게 봤다. 응? 나는 헬싱키에 7일 있었는데도 아직 못 보고 못 한 게 많은데? 물론 내가 천천히 다니는 편이고,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서 하루를 빨리 마무리한 것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헬싱키를 제대로 즐기기에 결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말하는 '볼 거'라는 게 뭘까?  여행 중간중간 가족들한테 사진을 보낼 때면, 엄마는 '예쁘다'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늘, ' 근데 핀란드는 별로 볼 게 없네.'라고 하셨다. 아니, 이 멋진 건축물과, 눈 덮인 호수와, 귀여운 산타 마을과 오로라의 사진을 보고도 핀란드는 볼 게 없다고? 


엄마나 위의 글을 쓴 사람들이 의미하는 '볼 거'란 아마도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파리의 에펠탑,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처럼 누가 봐도 탄성이 나오는 역사적 명소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확실히 헬싱키는 그런 명소는 적은 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헬싱키에는 멋진 실용주의 건축물과, 근사한 현대 미술관,  공부가 절로 될 것 같은 멋진 도서관과, 아름다운 호수, 그릇 러버들을 행복하게 해 줄 아라비아와 이딸라, 마리메꼬와 같은 디자인 브랜드, 재미난 중고 가게들, 그리고 사우나가 있다. '


‘볼 거'의 개념을 조금만 더 넓혀 본다면 헬싱키는  볼 것과 할 것이 넘쳐나는 곳이다. 특히 건축과 디자인,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면 헬싱키 여행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고 감히 단언해 본다. 



헬싱키 대학교 중앙 도서관


들어가자마자 천장의 창과 겹겹의 타원형으로 둘러 싸인 중앙홀이 눈을 확 사로잡았다. 각 층마다  커다랗게 난 통창을 마주 보며 무려 흔들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니 나도 창문 앞에 앉아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더 나아가 이런 도서관이 있는 학교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욕구까지!  타원형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계단조차도 아름답고 지하철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기까지 했다. 




핀란드에 와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이건 같은 북유럽 국가인 스웨덴과 덴마크에서도 마찬가지) 어디에서든 내가 영어로 말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게 영어로 말하지 않는 거였다. 


늘 핀란드어로 시작하고 내가 핀란드어를 못한다고 하면 바로 영어로 바꿔 친절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 사람들이 영어를 못 해서 그런 거냐 하면 절대로 아니다. 이 세 나라 사람들은 지금껏 가 본 어떤 나라의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했다. 


스페인에 살다 보면 식당이나 가게에서 나를 보자마자 영어로 응대를 하는 일이 한 번씩 있다. 그럴 때면 묘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내가 이 나라에 얼마나  살았건 말을 할 줄 알건 일순간에 '외국인' 또는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기분이. 


아니, 내가 얼굴은 아시아인이지만 스페인 사람이면 어쩌려고?  물론 스페인이 다른 유럽의 영국이나 프랑스만큼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만약 스페인에서 태어난 한국계 스페인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사회 구성원으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미국이나 호주, 영국만큼은 아니어도 북유럽 또한 이민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  분명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에 대해 학교나 직장에서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봤는데, 헬싱키 중앙 도서관 화장실 문에 붙어 있던 종이를 보고 납득이 갔다.



우리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지양합니다. 
누군가의 인종과 국적, 성적 지향, 성별, 종교, 사회 경제적 배경, 건강 상태 또는 능력에 대해 어떤 추측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일 수 있게 두세요. 




헬싱키 중앙 도서관(OODI)


헬싱키 중앙 도서관은 핀란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헬싱키 시가 국민들을 위한 선물로 지어진 도서관이다. 따라서 도서관의 시설과 관련하여 국민들의 의견이 모두 반영되었고 도서관 안에는 프리랜서들을 위한 작업 공간, 악기 연주실과 악기 대여 서비스, 3D 프린트, 의상 제작 도구들, 게임실에 사우나까지 갖추어진, 도서관을 넘어선 일종의 복합문화시설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다. 


워킹투어 가이드에 의하면  핀란드 사람들은 문맹률이 낮고 독서량이 많기로 유명한데, 자기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어떻게 빌리고 도서관을 사용하는지 알려줬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을 가까이하면서 큰 사람들에게 도서관을 선물로 주는 나라라니. 멋지다. 





워킹 투어에서 간 날은 휴관일이라 외관만 구경하고, 며칠 뒤 태블릿과 읽을 책을 챙겨서 다시 찾았다. 내부는 설명 들은 것처럼 옷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 게임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게임하는 아이들, 체스 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매우 시끄러웠다. 아이들을 위한 책도 정말 많고 보드 게임도 많이 있었다. 벽면 가득한 통창 앞에는 가족들과 함께 온 아이들이 도서관 내부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놀았다. 


여기 있는 악기들 모두 대여 가능하고 보드게임도 이렇게 많다



가져온 책을 읽으려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로 앞의 남자가 옆에 앉은 여자한테 계속해서 작업 걸고 있어 그것만 직관하다 왔네. (이 도서관에 정숙은 없다).  헬싱키 대학 도서관은 숨도 못 쉴 만큼 조용했는데 이렇게 시끄러워도 되는 도서관이 있다는 거에 다시 한번 놀랐다, 결국 집중이 안 돼 책 한 페이지 못 읽고  숙소로 돌아감... 아무튼 헬싱키에 간다면 반드시 가 볼 가치가 있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아카테미넨 서점과 무민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신 분이라면 헬싱키에서 식당을 하는 주인공 사치에가 일본인 관광객 미도리에게 다가가 대뜸 독수리 오형제의 가사를 아냐고 물었던 그 서점을 기억하실지도 모르겠다. 그 서점이 바로 헬싱키의 아카테미넨 서점이다. 핀란드의 우명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알바 알토가 설계한 서점으로 안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카페 알토'라는 카페도 있다. 




천장에 자연광이 들어오는 커다랗고 특이하게 각이진  창과, 모든 연령층을 고려했다는 입구의 3단계 손잡이가 인상적인 곳이다. 


여기서 의문! 그런데  키를 고려해서 손잡이를 만들었다면 모든 문에 있어야지 왜 바깥문에만 있고 안쪽에는 없을까? 그리고 정말 모든 연령층을 고려하는 목적이라면 그냥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로 일자형 손잡이가 더 낫지 않나? 궁금....



무민의 나라답게 서점 한 코너가 모두 무민! 


한국에서 무민 아이템이 인기를 끌 때도 무민을 특별히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핀란드 여행을 앞두고  밀리의 서재에서 1954~1956년에 연재된 무민 만화책을 읽었다. 막연히 어린이용 만화책이 아닐까 한 내 예상을 완전히 깨고 무민 가족들의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뭐지? 이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병맛 서사는? 근데 재미있어! 



왼쪽은 무민 영문판 코너, 오른쪽은 내가 읽은 무민 코믹 핀란드어 버전



무민 캐릭터의 서사를 이해하자 전에는 감흥이  없었던 캐릭터들에 애정이 생기고 하나하나 다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무민 마마! 


내가 읽었던 무민 만화책을 사고 싶었는데 핀란드어 버전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그림이 마음에 든 '누가 토플을 위로해 주지?'그림책을 샀다. (헬싱키 시내 곳곳에 무민숍이 있고 거기에서도 무만 그림책과 동화책을 살 수 있는데 이 서점이 조금 더 쌌다. )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 서점에서 산 그림책을 읽었다. 소심하고 용기 없는 외톨이 토플이 바닷가에 떠내려 온 미플의 쪽지를 보고 용기를 내서 세상으로 나미플을 만나는 내용인데 읽고 뭉클..... 일러스트도 너무 마음에 든다






알바 알토 하우스 & 알바 알토 아뜰리에



앞서  여러 번 언급한 알바 알토는 핀란드의  실용주의 건축가이자 집집마다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이케아 스툴의 오리지널 버전, Artek의 스툴 60을 만든 가구 디자이너이다. 핀란드 어디에 가도 아르텍의 의자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엘싱키의 두 번째 숙소였던 Holtel Helka의 로비와 객실 또한 모두 아르텍의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왼쪽이 아르텍의 스툴. 가격 200유로. 오른쪽은 이케아 스툴, 9.9유로. 출처 핀터레스트



헬싱키 외곽에는 알바 알토와 마찬가지로 건축가였던 그의 첫 번째 부인 아이노 알토가 살았던 집과 이뜰리에가  있고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하우스 투어는 30유로, 아뜰리에는 20유로. 둘 다 입장권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처음에는 하우스만 하려다 결국 둘 다 했고, 결과적으로 아뜰리에게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안 갔다면 후회할 뻔했다.  



알바 알토 하우스


들어가자마자  거실의 커다란 일자 통창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오른쪽에는  건축 사무소를 따로 만들기 전까지 사무소로 사용했던 작업 공간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나무 발도 그렇고, 수납함도 그렇고 뭔가 일본스러운 느낌이 많이 난다고 생각했더니 알바 알토가 일본 대사 부부와 친해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가 본 적은 없다고. 




알토의 집은 아르텍의 심플하고 모던한 가구와 조명, 그리고 알토가 여행 중에 가지고 왔다는 화려한 의자와 이국적인 소품들이 조화로웠다. 건물 밖에서는 작은 창문만 하나 있어 눈에 띄지 않지만 집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뜰을 향한 커다란 창으로 개방감을 주는 구조로 프라이버시를 지켰다는 구조 또한 아름다웠다.


30분 정도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머지 30분은 천천히 집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후에 근처에 있는 알바 알토 아뜰리에로 향했다. 헬싱키 외곽에 있어서 시내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고즈넉해 걷는 맛이 있는 동네였다. 



알바 알토 아뜰리에


투어는 제일 아래층, 현재는 알바 알토 재단에서 실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작고 아기자기한 부엌부터 시작했고 가이드의 말대로 위로 올라갈수록 공간이 점점 더 크고 화려해졌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도 건물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배치한 자연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창이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공간에 벽 위쪽으로 길게 난 창문은 종일 햇빛이 구석구석 건물 안을 비출 수 있도록 해가 지고 뜨는 방향과 빛이 부딪혀 굴절되는 각도까지 계산되어 설계되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직사광선이 비치는 책상이 있는데  그건 인턴이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어느 나라나 똑같다 싶어 빵 터졌다.


해가 가득 들어오는 여름만큼 느낌이 안 날까 걱정했는데 눈이 내려 창밖으로 날리는 눈발과 실내의 조명이 어우러져 여름과는 또 다를 겨울의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소 직원들의 공간에서 나오면 알토의 사무실이 나오는데 오른쪽에 돔 모양으로 길게 난 창문과 실내 테라스에 화려하게 설치되어 있는 다양한 모양의 조명에 입이 벌어졌다. 눈에 쌓여 살 보이지는 않지만 창 바깥으로  원형 극장이 있는데 거기서 프로젝터로 영화를 상영해 직원들과 함께 모여 영화를 보곤 했다고.

어디에나 자연광이 들어오게 창문을 낸 알바 알토의 건축물울 보며 건물에서 창이 갖는 존재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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