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어디에서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길에서 텐트를 치고 자다 오로라를 본 주인공 여성이 옷을 다 벗어던지고는 펑펑 울며 뛰어다니는 장면이.
그 장면을 보고 든 첫 번째 생각은 이랬다. '추울 텐데...' 영화에서 묘사된 날씨는 영하 20도는 될 듯했다. 동시에 어느 정도 납득도 됐다. 소리 내어 혼자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도 있으니까. 오로라라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우면 저렇게까지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눈앞에서 비현실적인 것을 마주할 때 느껴질 감정이.
이번 겨울 핀란드에 온 궁극적인 목표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북극권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적기는 10월에서 4월. 하지만 이 시기에 맞춰 북극권에 온다고 해도 아무 때나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늘은 빛 공해가 없이 어둡고 캄캄하고, 구름 없이 맑고 깨끗해야 한다. 오로라 지수가 높아도 구름이 많으면 보이지 않고, 오로라 지수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도 구름이 없다면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오로라를 보려면 삼 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다. 돈을 내고 오로라를 보기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는 오로라 헌팅도 있고.
내가 예약한 사리셀카의 호텔은 국립공원 앞에 있고 빛 공해가 적어서 숙소 바로 앞에서 오로라를 봤다는 리뷰가 많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3박 4일 동안 오로라를 기다릴 생각이다.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못 볼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어쩌면 못 볼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었다. 이참에 7일 후에야 해가 뜬다는 북극권의 어둠과 눈을 실컷 즐겨보지 뭐.
2023년의 마지막 날에는 오로라를 보지 못했고, 2024년의 첫날, 사우나 후 숙소 모닥불 파티를 한다고 해서 나가던 중이었다.
일행인 유가 하늘을 가리키며 저거 혹시 오로라 아니냐고 했다. 뭔가 희뿌연 선이 보였지만 구름 같아 보이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서 그 자리에 카메라를 대어보니 희미하게 연두색 줄이 비췄다. 뭐야, 진짜 오로라네?
오로라 지수가 낮아 이렇게 갑자기 오로라와 조우할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해 둘 다 어어어 하고 있는 사이, 희뿌연 선은 점점 커지고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 하늘을 휘감았다.
오로라는 실제로 보면 사진에서 보는 것만큼 색이 진하지 않아서 실망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색깔과 상관없이 하늘을 흐르는 오로라는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모닥불 파티고 뭐고 그 자리서 넋을 놓고 오로라가 흘러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내가 눈으로 보고 있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라 이걸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한참을 오로라를 쳐다보고 있다가 발끝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너무 추워서 모닥불 파티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모닥불에서 몸을 목이며 라플란드 지역에서 마시는 따뜻한 블랙커런트 주스를 한 잔 마시고, 혹시나 오로라가 사라질까 봐 또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지켜보기를 반복했다.
오로라는 더욱 커져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오로라를 처음 본 거지만, 이런 오로라를 쉽게 볼 수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잠시 후 오로라에 시큰둥하던 숙소 스태프들까지 다 나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핀란드에 사시는 분이 이런 오로라는 보기 힘든데 진짜 운이 좋았다고 했다.
뭔가 표현해 보고 싶은데 입밖에서 우와아아, 어떡해 어떡해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 영화에서 여자가 왜 영하 20도에 옷을 벗고 뛰쳐 나갔는지 온전히 이해가 갔다. 너무 황홀한 걸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새해 첫날, 이렇게 선명하고 커다란 오로라를 보다니 이 우주 에너지를 받아서 올해는 평소 때보다 조금 더 큰 용기를 내어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