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별과제의 아픈 추억과 함께
요즘 DAO에 대해 틈틈이 파보는 중인데, 사실 ‘탈중앙 분산화된 자율적인 조직’이라는 개념은 참 그럴싸하다.
소수가 커뮤니티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일원들이 자발적으로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커뮤니티 성장에 함께 기여를 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을 함께 나누는 이상적인 조직.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데 나도 여러 DAO에 참여하고 있지만(대부분은 내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 운영되나 지켜보며 소극적으로 함께 하는 수준), 정말 투표만 해도 그야말로 하는 사람만 한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많이 모인 조직일수록 일원 개개인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그 조직을 위해서 기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싶다.
굳이 DAO가 아니더라도, 사실 어느 조직이든 자신의 일처럼 희생하는 소수의 인원이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대부분은 방관자이거나, 열심히 하는 척(?)만 하거나, 자신에게 피해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적당히 거들거나 하지 않나.
여기서 대학교 시절 ‘조별과제’의 씁쓸한 추억이 떠오른다.
대부분 조별과제의 경험을 통해서 ‘하는 사람만 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한 교양수업이었다.
다양한 전공과 학년을 섞여서 조를 짰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특정 지역의 관광명소를 탐방해서 그것을 분석 어쩌구... 한 결과를 내는 것이 과제였다.
그러려면 지역을 정하고, 일자 특정 및 필요경비 산정, 비용 갹출, 봉고차 렌트, 탐방 순서 등등부터 해서 마지막 분석과 결과 리포트 작성까지 하나하나 함께 풀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 네이트 클럽(맞나?) 게시판을 만들고 조원들 모두 가입을 했다.
그런데 게시판 만들기부터 해서 결국은 학점 관리가 시급한 대학교 4학년 언니 오빠들이 총대 매기 시작.
당시 나는 불타는 연애 중이었고 학점에는 사실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남일 보듯 방관만 할 뿐이었다.
지역 탐방을 하는 날까지 조원들이 각자 할당된 조비도 내지 않은 상황. 조장 오빠의 얼굴에는 ‘시발’이라는 단어가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충주로 봉고차를 렌트해서 갔다. 운전은 조장 오빠가 끝까지 했고. 기분이 계속 안 좋았는지 난폭운전을 하는 통에 부들부들 떨면서 뒷자리에 앉아있었던 기억. 그 사이 차가 고장 나기도 해서 비용은 더 들게 생겼는데 조장 오빠와 일부 사람들이 사비로 일단은 계속 메꿔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나는 조비는 냈던 상태.
아무튼 난폭운전을 견뎌내며 충주를 다녀왔고, 그 이후 리포트를 낸 것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나는 손 놓고 ‘누군가 하겠지’ 생각했었던 듯하다. 그것도 그건데, 문제는 지역 탐방 시 갹출한 비용보다 실제 들어간 비용이 많아서 추가 비용을 갹출해야 하는 상황. 네이트 클럽 게시판에 조원들 5만 원씩 더 내라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미 다녀온 마당에 누가 자진해서 내겠나. 나도 그 글을 봤지만 그냥 별생각 없이 패스하고 지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렇게 학기가 끝나고 다음 해 3월 봄학기가 시작되었다. 히히덕거리며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어떤 덩치 큰 남자가 내 앞길을 막고 서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누군가 보니 작년 그 조장 오빠였다.
“야! 씨발 5만 원 내놔!!!”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죄책감에 근처 ATM기로 쪼르르 달려가서 마침 과외비를 받아서 넉넉했던 통장에서 5만 원을 출금해서 그 자리에서 채무를 이행했다.
한 대 처맞아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 속에서 등골이 오싹했다. 그만큼 그 조장 오빠는 조별과제를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
이렇게 나의 조별과제의 추억을 언급한 이유는, ‘탈중앙 분산화된 자율적인 조직’이 아직은 이상적인 개념이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다수의 방관자와 소수의 희생자 이 구조를 탈피해서 DAO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 동기를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이 것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 물론 인센티브가 해결 방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이라고 보기 어려워 보이고 말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직은 대부분 소수가 운영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소수는 자신의 희생을 보상받기 위해서 불투명하게 조직으로부터 유무형의 수익을 챙길 가능성도 있다. ‘내가 이 조직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투신했는데 이 정도쯤은 받아도 되는 것 아냐?’ 이런 심리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암암리에 횡령으로 볼 수 있는 행위도 하게 되고 그것이 한 번 시작하게 되면 또 무뎌지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투명하고 효과적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DAO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반드시 필요한 영역도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DAO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 동기를 어떻게 끌어올릴지에 대한 난제를 풀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건 어떻게 보면 쉽게 편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본능을 거스르는 부분이라서, 이 부분이 앞으로 어떻게 해결될지 나도 참 궁금하다.
그나저나 그 조장 오빠한테는 (소멸시효보다 훨씬 더 긴 20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