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엔 몰랐는데 서른두 살엔 알게 됐다. 내가 여성이어서, 딸이어서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엄마는 자그마한 이불 가게를 시작했다. 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쯤부터 스물두 살쯤에 그만둔 것 같은데 어릴 땐 엄마 이불 가게에 놀러 가는 게 어찌나 좋던지. 왜냐하면 하루 종일 엄마 냄새를 맡고 옆에 꼭 붙어 있을 수 있는 기회여서다. 꼭 붙어 있는다는 건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는 게 아니어도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좋은 그런 거였다.
이웃 상인 아주머니들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엄마 가게에 자주 놀러 왔다. 집에서 싸 온 반찬을 꺼내 같이 밥을 먹기도 했고 지루한 시간을 커피 2, 크림 2, 설탕 2의 황금비율로 섞은 커피를 나눠 마시며 정을 쌓았다. 나는 아주 어릴 땐 엄마 가게에 자주 가 있을 수 없었는데 종종 놀러 나가 있으면 놀러 오는 분 중에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엄마한테 나를 두고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딸 중에 얘가 나중에 제일 잘 써먹을 거야. 엄마한테 엄청나게 잘할걸? 잘 키워~’그땐 너무 어렸고 내가 제일 예쁘다는 말쯤으로 해석했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도 아주머니는 나를 보면 반가워했고 역시 잊지 않고 엄마한테 똑같이 말하곤 했다.
‘아이고 잘 컸다. 얘가 제일 엄마한테 도움 될 거야. 그리고 시집도 잘 가서 형제 중에 가장 잘살아. 엄마 많이 도와주면서.’ 엄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미온한 태도로 일관했었다.
성인이 되고 경제활동을 시작한 뒤 아주머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때때로, 자주 엄마의 경제 상황을 도와야 했고 거절하고 싶을 땐 그깟 거로 엄마가 딸 눈치 보게 만드는 거 아니라고 엄마는 화를 내기도 했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아마 이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십 년 넘게 운영하던 이불 가게를 접고 음식업을 시작할 때 그릇 등의 작은 비품들을 들일 돈이 부족할 때도, 언니들의 대학 등록금이 부족할 때도, 뭔가 큰돈이 필요할 땐 나를 찾았다. ‘엄마가 나중에 결혼할 때 다 해줄게.’에 걸려들어 시작된 일이 나한텐 부담으로 다가왔고 예전 화장품 아주머니의 예언 아닌 예언 같은 이야기가 실행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했다.
우리나라엔 ‘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이 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시절에 여자는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고 열네 살에도 공장이나 가정부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잇는 일이 잦았다. 그런 관행(?)의 역사가 이어졌다고 하기엔 내가 겪었던 일의 연도를 떠올리면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이다. 엄마도 오죽 힘들고 답답하면 그랬을까 이제는 이해하지만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 불합리한 처우를 받았다고 기억한 데는 화장품 아주머니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엄마의 태도였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라고 한마디만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한테 들어간 내 수입의 일부가 지금에 와서 아깝게 느끼지 않을 거다. 어려웠던 우리 집에 나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냐고 웃으며 생색낼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