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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04. 2024

마리 아마추켈리-바르사크, <클레오의 세계>

소중했고, 여전히 귀중한

마리 아마추켈리-바르사크(Marie Amachoukeli-Barsacq), <클레오의 세계>

(Ama Gloria) - 소중했고, 여전히 귀중한     

인간이 겪는 첫 번째 우울증은 엄마와의 결별 내지는 분리에서 발병된다고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밝혔다. 그 이유는 우울증이란 내게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발병하는데, 인간에게 소중한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젖을 내어주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아이의 삶을 연장해주는 존재, 그래서 인간은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때, 또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극도로 침울해진다. 어머니가 제 곁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어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영상 등을 되짚어보거나, 혹시라도 그녀가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꿈에 침잠한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분리는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인간의 운명이요,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인간의 시야는 더 확장된다. 어머니가 모든 것을 보장해주던 시야로부터 내가 직접 세계에 참여해가는 진보, 그 여정을 마리 아마추켈리-바르사크가 <클레오의 세계>에서 고찰한다. 클레오에게 글로리아는 어머니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유모로서 아이의 모든 것으로, 그녀와의 애착 관계와 이별을 탐구하며 인류가 겪는 첫 번째 우울증을 되새김한다.     

  

1979년 파리 태생의 마리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조지아계 프랑스인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사뮤엘 테이, 클레어 베르거와 공동 연출한 <파티 걸>로 장편 데뷔 하였으며, 본 작품은 201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였다. <파티 걸>에서 바르사크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아이와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분명 여성은 독립된 주체다. 바르사크는 가부장제에서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전업주부보다, 스스로 돈을 벌며 경제권을 손에 쥐는 매춘부 여성이 훨씬 더 자유롭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그 여성은 자유로울 수 없는데, 가정주부가 되길 거부하는 여성이라 한들 가부장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그에 준하는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자신과 결별한 아이의 실망감이나 배신감이 크다는 것을 인지하여, 아이의 삶/자신의 삶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는데, 바르사크는 이젠 그 관계를 아이의 시점에서 펼쳐본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어머니를, 어머니는 아이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가 본 작품으로 연속하는 것은 ‘어머니-아이’라는 소재뿐만이 아니다. 형식도 포함하는데, 본 작품의 연출에선 '핸드 헬드'가 특히 눈에 띈다. 한 치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이로써 부드러움과 안정감을 창출하는 '스테디캠'에 <클레오의 세계>의 카메라는 올라타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가 위치한 곳은 불완전한 인간의 손으로, 그래서 스테디캠에 비해 몹시 흔들리고 피사체를 완전무결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이에 현실을 다급하게 뒤쫓는 ‘다큐멘터리’와 흡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이 감독의 전작 <파티 걸>과 단편 <데몰리션 파티>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그리고 해당 작품들을 클레어 베르거, 사뮤엘 테이와 공동 연출하였는데, 그들과 결별하고 처음 연출한 <클레오의 세계>에 이어지는 핸드 헬드는 동료들의 것이 아니라, 본인의 주체적이고 고유한 형식이라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젠 왜 핸드 헬드를 사용했는지 물어야 한다. 본 작품은 주인공 클레오의 시점에서 전개되기에, 핸드 헬드의 불완전한 촬영은 아이의 시야에 상응한다고 하겠다. 미숙한 팔과 다리, 어머니를 올려보기 위해 힘겹게 고개를 치켜세우는 아이의 낮은 시야에서 비롯되는 흔들림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핸드 헬드의 역할은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본 작품의 상황과 핸드 헬드의 속성이 서로 맞물리며, 주제 의식을 풍부하고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핸드 헬드로 촬영된 작품을 접한 감상자들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다. "어지러워요", "멀미가 날 것 같아요", "잘 안 보여요", "다급한 느낌이 들어요". 즉 핸드 헬드의 미적 특징은 쉽게 흐트러지고, 그저 스쳐지나가며, 이에 매우 흐리거나 혼탁하다. 이러한 핸드 헬드의 특성과 본 작품의 소재인 ‘유년기의 기억’이 맞물린다. 안정적인 유년기를 거친 인간에게 보호자를 향한 기억은 애틋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더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기억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성인이 되면 그저 잔상만 남는다. 그래서 보호자를 향한 애정 어린 기억은 흐릴 수밖에 없는데, 본 작품 속에서 핸드 헬드가 적극 사용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목욕을 해주려는 글로리아에게 장난을 치며 쉽게 붙잡히지 않으려는 클레오를 포착할 때, 산티아고를 향한 질투심이 폭발하여 글로리아의 곁에서 뛰쳐나갈 때, 마지막으로 그녀와 결별할 때 흔들림이 극심해진다. 소중한 줄 모르고 그녀의 곁에서 달아나고 멀어졌다. 그렇게 흐려짐을 자처했지만 돌이켜보니 내게 가장 소중했다. 그래서 이젠 존재하지도 않고 혼탁한 잔상만 남게 되었지만, 그것이라도 돌려보고 싶다.

이에 더해 핸드 헬드는 '리얼리즘'을 가시화하는 대표적인 형식이다. 현실을 비추는 감독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형식이 바로 핸드 헬드인데, 인간의 미약한 발걸음이나 손 떨림을 반영하는 핸드 헬드가 그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역시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어떤 현실을 환기하는가? 첫 번째 현실은 그녀의 자전적이고도 개별적인 현실이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본 작품에 자전적인 유년기를 반영하였기에, 클레오의 아버지 역시 조지아계임을 환기하는 슬라브계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그런데 이 현실은 그녀 혼자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다. 다수의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이기에 그만큼 거시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래서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개별적인 기억뿐만 아니라, 다수의 인류가 공통적으로 느낄 보편적인 경험을 함께 환기하는데 그것은 보호자와의 애착 관계와 더불어, 후술할 '인종 문제'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보호자와의 애착 관계를 중점적으로 탐구한다. 혼자서 성장하지 않은, 누가 되었든 보호자가 제 곁에 있었던 인류는 핸드 헬드와 더불어 또 다른 형식에 제 경험이 투영된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그것이 '화면비'라고 말한다. 영화의 화면비는 매우 좁다. 영화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화면비 중 가장 협소한 4:3 화면비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영화는 갑갑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유년기란 보호자에 의해 승인된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제한에 의해서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클레오는 글로리아나 아빠가 학교에 도착해야지만 귀가할 수 있다. 그들 없이는 다른 세계로 초월할 수 없으며, 특히 아버지의 승인 없이는 카보베르데의 바닷가 풍경을 접할 수 없었다. 아무리 글로리아와 약속했더라도 말이다. 외에 시력이 좋지 않은 클레오는 글로리아의 조력으로 무언가를 보고 읽으며, 또 글로리아가 허용하지 않은 통화 내역 등은 접할 수 없다. 소재가 유사한 자비에 돌란의 <마미>에서도 좁은 화면비가 사용되었듯, 어머니가 잘 고르고 엄선한 것들로 즐비한, 그 이외의 것은 침투할 틈이 없는 폐쇄적인 세계에 아이들은 속해 있다. 이 화면비엔 많은 얼굴이 동시에 들어차기 어려운데,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얼굴만 들어차면 프레임이 빼곡해진다. 즉 자신의 얼굴과 보호자의 얼굴만으로 충분한 충만한 세계가 바로 클레오의 세계, 인간 유아의 시야다.

그러나 그 세계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거기서 확장되거나, 아니면 더 넓은 세계를 건립해간다. 어머니와의 분리되며 말이다. 클레오가 학교에 가서 또래들과 함께 '알'을 깨며, 어른의 조력 없이 베이킹을 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혼자서도 어떤 일을 척척해야만 하는 세계로 뛰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쉽게 적응되진 않는다. 여전히 그들은 많은 것이 미숙하고 서투르다. 클레오는 '구름사다리'를 혼자 타보려고 하지만 힘이 모자라서 떨어지고야 만다. 결국 손에 상처가 나고, 이를 치료해주는 것은 글로리아의 일이다. 외에도 씻기고 재우고 먹이는 일은 클레오 자력이 아니라 모두 글로리아의 업무다. 심지어 클레오의 시력검사조차 글로리아가 도와주니, 유모는 클레오의 모든 것을 보장하고, 이에 아이는 어머니에 준하는 보호자를 사랑한다. 아버지는 늦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보호자와 이별을 앞둔 아이의 시력은 약화된다. 이별이라는 거스르지 못할 사실을 흐리게 만들어 무언가를 대신 채워 넣고 그려본다. 여전히 클레오는 간난 아기이고, 이런 그녀를 글로리아가 정성스레 돌봐주는 따스한 순간을 ‘회화’로 수놓는다. 즉 영화가 클레오가 맞닥뜨려야 할 사실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사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클레오 우울증의 반영이다.     


그런데 클레오의 심리와 내면이 투영된 애니메이션은 마냥 유치하지 않다. 꽤 성숙한 측면도 있는데, 바로 글로리아가 클레오에게 이별을 통보한 순간 카보베르데로 돌아가는 유모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파도를 만나 돌아가는데 애를 먹지 않을지, 꽤 성숙하게 글로리아의 시야를 염려해본다. 즉 보호자와 서서히 거리를 두는 연령대의 아이들은 양가적인 마음을 품는다. 이제 클레오는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산티아고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글로리아는 이웃들에게 수프를 대접하는데, 이를 함께 도울 수 있는 상태로 클레오는 거듭난다. 또한 카보베르데에 막 도착 했을 때, 받기만 하던 클레오가 글로리아의 가족들에게 ‘선물’을 건넨다. 아버지가 카보베르데에 가는 것이 빈말이라고 하자 반항하기도 하고, 비록 아버지가 져주는 것이긴 하지만 팔씨름으로 어른을 이겨먹는다. 이런 클레오는 이별을 부정하지 않는다. 떠나야 하는 글로리아를 향해 어리광을 부리거나 보채지도 않고, 제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역시 꽤 성숙하게 받아들이니 말이다.

동시에 아이는 펑펑 운다. 그리고 이별했지만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아무리 대지에서 바다로 뛰어들며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은 미숙하다. 또 아기로 돌아가는 것이 편하다. 빽빽 울어대는 산티아고는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하며, 곤히 잠든 글로리아를 깨우고 자신을 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클레오는 산티아고를 질투한다. 글로리아를 위하는 마음도 있지만, 자신은 영원히 응석받이이고 싶다. 자는 동안 용변을 실수하면 누군가가 치워줄 수 있는 그 소중하고도 안락한 순간이 그리운 것이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이 심리를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클레오는 학교에 다닌다. 여기서 클레오는 '롱숏'에 담긴다. 학교뿐만 아니라 카보베르데에서도 글로리아 없이, 또래들과 놀 때는 롱숏으로 촬영된다. 롱숏에는 클레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아이들이 함께 속해있고, 여기서 클레오는 자신만 생각하는 고집쟁이나 응석받이일 수 없다. 친구들과 협동해서 반죽을 하고, 축구를 풀어나간다. 이런 와중에 클레오가 집으로 돌아가면 글로리아가 있고, 그녀 곁에서 클레오의 얼굴은 ‘클로즈업’되며 프레임 한가득 채워지고 안정적으로 포착된다. 보호자와 분리된 클레오는 '공동체' 속에서 작아지고 흐릿해지는 반면, 보호자 곁에서 클레오는 자신을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되찾는다. 그 보호자는 때로 프레임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가 구분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는 게 당연하다, 글로리아가 클레오의 눈이자 손이요 다리이므로. 그런 와중 클레오가 속한 숏에서 글로리아가 떠나가고, 양자의 숏이 '분리'된다. 이제 클레오는 두렵다. 내게 헌신하는 존재는 사라지고, 내가 롱숏에 속해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 그 불편함과 어색함, 낯섦과 조우하기 싫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응석을 누군가가 받아줬다면, 다시금 보호자의 곁으로 유약하게 돌아가 버렸다면 지금의 성인들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냉정한 편집'을 고수한다. 산티아고에게 나쁜 짓을 하려던 클레오가 적발된 이후, 소녀는 홧김에 바다 속으로 다이빙한다. 이전까진 클레오가 어려서 불가능하리라 다들 생각했다. 이후 애니메이션으로 연결되는데, 클레오는 자력으로 헤엄쳐서 나오기는커녕 ‘거대한 고래’, 곧 보호자가 자신을 구출해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의 클레오는 깊게 잠기지도 않았고 곁엔 고래도 없다. 자력으로 헤엄쳐서 대지로 충분히 나오는 현실을 이어내며, 마주하기 싫더라도 성장으로 연결돼야 함을 역설한다. 돌아보면 연인이 사라져버리는,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 이야기’가 연상되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글로리아가 클레오를 딸처럼 여기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아이는 파리로 돌아가야 하며,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젠 자신과 일거수일투족 밀착해있을 수 없다. 손자를 낳은 페르난다, 바깥으로 나도는 세자르처럼 클레오도 그렇게 커가는 것이 필연이다. 그래서 글로리아는 눈물을 훔치며 공항으로 돌아가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반면, 클레오는 비행기로 향하는 도중 뒤를 돌아본다. 거기서 감독은 클레오가 보고 싶은, 글로리아가 우는 모습을 이어내지 않는다. 대신 '암흑'을 펼쳐내며 그대로 영화를 끝내고 크레딧을 올릴 뿐이다. 아이가 원하는 편집은 성장의 ‘컷’이자 어머니의 이어짐이겠지만, 인류의 필연은 그 반대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인간의 운명을 형식에 묵묵히 반영할 뿐이다.      


이렇게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인간이 눈물을 머금고 지나와야만 했던, 그렇게 서서히 뇌리에서 잊힌 소중한 기억을 환기한다. 동시에 우리나라 관객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인종 문제를 환기한다. 클레오와 그녀의 아버지는 슬라브계이긴 하지만 파리에 거주하는 '백인'인 반면, 그들을 조력하는 유모 글로리아는 카보베르데 출신의 '흑인'이다. 그리고 유색인종 여성이 백인 아이를 돌보는 일은 서구 세계에서 보편적이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의 자전적인 경험에선 클레오가 암으로 어머니를 잃어서 유모를 고용하지만, 굳이 어머니와 물리적으로 이별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가족 형태로의 분화 및 가정주부로 눌러앉길 원치 않는 주체적인 여성 등 사회 풍조의 변화로 인해 어머니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유색인종 여성들의 손길을 빌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럽의 경우 식민 지배를 겪었던 아프리카의 여성들이 유모로 많이 고용된다. 그녀들은 선택권도 약하다. 유럽이 모든 것을 수탈해간 자국, 심지어 여전히 가부장적인 고국에서는 돈을 벌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보호자 역할을 대신하는 유색인종 유모들에게 정당한 값이 돌아가는가? 글로리아는 클레오의 상처를 보듬으며 그야말로 성심성의껏 양육한다. 클레오는 암으로 요절한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그녀에겐 페르난다, 세자르 두 자녀가 있는데 장녀인 페르난다는 이른 나이에 아이를 갖고 미혼모가 되었으며, 세자르는 글로리아에게 불만이 많은 눈치다. 애착 관계도 없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가정이 붕괴되는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 서구인들이 맡기 싫어하는 궂은일을 유색인종 여성들이 떠안았지만, 유모에게 돌아온 대가는 희생을 치료하기에 넉넉지 않다. 세자르와 글로리아의 관계는 쉽게 개선되지 않고, 그녀가 파리에서 번 돈으로 지으려 했던 호텔은 영화에서 끝끝내 완공되지 못한다. 유색인종의 희생으로 파리는 아픔에도 번영하는 반면, 카보베르데는 영영 낙후된 상태로 방치된다. 그래서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글로리아의 마지막 대사를 "사랑했다는 걸 기억해줘"로 처리한다. 유년기에는 유모에게 많은 것을 내어줄 정도로 희생을 정당하게 평가하지만, 점차 성장해가며 그 희생을 평가절하 한다. 그런데 이 희생이 없었다면 백인들은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 희생을 기억하고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즉 만국의 감상자에게 본 작품은 성장해가며 잊어버린 애틋하고 따스한 감정을 환기하지만, 서구에 국한해서 본다면 유색인종 유모들이 겪는 처우를 함께 환기한다.      


정리하며, 어렸을 때 1.33:1 화면비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어느 새 어른이 되어 1.88:1 내지는 2.39:1 화면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인류는 더 많은 것을 품게 되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했던 세계로부터, 많은 것들이 더 소중해진 세계로 뛰어넘었다. 이런 와중에 내게 가장 소중했던, 4:3 화면비를 가득 채우던 어머니란 존재는 서서히 잊혀 간다. 아마추켈리-바르사크는 바로 이 망각된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의 삶에는 부재할지 몰라도,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삶 또한 보장하지 않았을, 인류에게 가장 근본적인 기억이자 첫 번째 우울증을 말이다. 아이 영화이지만 어른들에게 더 큰 울림을 선사하는 작품, 잔뜩 높아져있던 우리의 시야를 낮춰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 동시에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백인 아이-유색인종 유모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클레오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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