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r 13. 2024

파블로 베르헤르, <로봇 드림>

곡선이라는 꿈

파블로 베르헤르(Pablo Berger), <로봇 드림>(Robot Dreams) - 곡선이라는 꿈     

유성영화와 무성영화, 둘 다 '영화'라는 점은 같지만, 양자의 매체적 특성은 무척 상이하다. 청각이 결합됨으로써 발화, 곧 언어를 적극 활용하는 유성 영화는 연극, 뮤지컬, 문학 등과 유사성을 공유한다. 반면 청각이 전무한, 이로써 시각에만 몰두할 수 있는 무성영화는 회화, 조각, 사진 등에 운동을 부여한 형태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유성영화의 청각이 시각을 보조·설명하며, 이미지를 구체화함과 동시에 맥락을 축소시키는 측면이 있다면, 그래서 때론 청각이 시각을 규정하기에 이른다면, 무성영화의 시각은 청각이나 언어에 좌우되지 않아서 순수하고 독립적일 수 있다. 유성영화가 보편적인 오늘날에 무성영화의 순수성을 느껴보기 어렵지만, 이따금 그 시절의 향수를 향해 손을 뻗는 작품 및 영화감독이 있다. 작품으로는 <아티스트>, <트라이브>, <군다>, <카우> 등이 떠오르고, 감독으로는 도미니크 아벨&피오나 고든 콤비, 토마스 살바도르,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등이 대표적이다. 

1963년 발바오 태생의 스페인 영화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또한 오늘날에 무성영화를 계승하는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다.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라는 작품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베르헤르는, 해당 작품에서 현대 영화에 일반적인 청각과 색채를 전면 삭제한다. 언어를 약화함으로써 『백설공주』라는 원전에 종속되지 않는 시각적 자율성을 추구한다. 더욱이 색채까지 앗아감으로써 영화의 본질적인 순수한 운동이 스크린에서 요동치는데, 그 운동으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슬픔과 기쁨, 증오와 사랑 등이 어떤 부연설명도 없이, 오직 순수한 이미지 자체로만 제시되는데,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가 무성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으로 확장된다. 


대표적인 무성 애니메이션 예시로는 <오스왈도 래빗 시리즈>, <미키 마우스>, <실리 심포니> 등 디즈니 초창기 단편을 들 수 있고, 청각이 덧입혀지긴 했지만 <톰과 제리>, <루니툰> 역시 호들갑스럽고 박진감 넘치는 운동을 부각하며 무성 만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본 작품들은 대사 없이도 등장인물의 감정과 소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언어 대신 이미지와 운동의 연속으로 서사를 구성한다. 그런데 무성 애니메이션으로서 <로봇 드림>은 선조들과의 유사성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셀 기법으로 연출한 할리우드 황금기 애니메이션의 요란법석을 떠는 운동에 비해 디지털 기법으로 연출한 본 작품은 호들갑이 그리 크지 않다. 부드럽고 매끄럽긴 하지만 고전기 애니메이션의 요동치는 활발함을 느끼긴 어렵다. 작화에 있어서도 고도로 간소화·단순화되어, 오늘날 '카툰네트워크'나 '니켈로디언' 등의 채널에서 흔히 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후술하겠지만 이 '오늘날의 이미지'는 일련의 저주다. 그래서 베르헤르는 주인공 '도그'를 빌려 현대를 살아가는 가운데서 '과거의 이미지'를 꿈꾼다. 우리는 ‘꿈’에 현실에서 불발된 욕망을 투영하는 만큼, 현재가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지는 영화 중반부부터 도그와 '로봇'은 본격 드림을 꾼다. 그 꿈속에서 고전 만화가 오마주된다. 로봇의 꿈속에선 의인화된 꽃들이 긴 다리를 쭉 뻗고 화려한 군무를 선보이는데, 이는 디즈니 <실리 심포니> 시리즈 중 1932년 작 <꽃과 나무>(Flowers and Trees)를 연상케 한다. 딱딱한 사물들에게 부드럽고 유연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후 의인화된 그들을 춤추고 노래하게 만드는 ‘유연함’과 풍부한 ‘상상력’이 할리우드 황금기 만화의 특징 중 하나다.

오마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도그의 꿈에서 '아이스크림 트럭'이 지나가는데, 운전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이스크림 상인'의 디자인은 본 작품의 동물, 로봇 디자인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이질적이다.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부터 뾰족뾰족한 조형성까지, 고전 만화에 등장하던 빌런의 전형이다. 이는 <로봇 드림>처럼 고전 애니메이션을 향한 헌사를 흠뻑 드러낸 넷플릭스 시리즈, <컵 헤드쇼!>에서도 등장하는 디자인이다. 이 아이스크림 상인이 지나가며 눈사람에게 생명이 부여된다. 앞서 언급한 특징과 동일하다. 이후 도그는 의인화된 눈사람과 여가를 즐기는데, 눈사람의 행동에서도 고전기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도그와 눈사람은 볼링장에 갔는데, 도그 및 다른 동물들과 달리 눈사람은 볼링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둥그런 자기 머리를 쏙 떼서 핀을 모두 쓰러뜨린 이후에, 다시 제 머리를 몸통과 이어 붙인다. '떼었다 붙이기' 역시 고전 만화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연출로, 그 당시 만화의 폭력성이 아주 가학적임에도 불구하고 악역을 제외하고선 등장인물이 온전히 사망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들이 아무리 끔찍한 폭행을 당해서 몸이 절단 나더라도, 뚝 떨어진 다리, 손, 꼬리 등을 재조립하며 익살스럽게 부활한다. 볼링장에서 눈사람은 바로 이 ‘재생력’을 공유한다.     


즉 의미가 다소 모호한, 단지 형식적 즐거움에 그치는 듯한 아이스크림 트럭을 제외하면, <로봇 드림>이 고전성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호의적이다. 베르헤르가 겪지 못한 잃어버린 과거엔 흥겨운 노래와 춤 등 사멸해선 안 될 유연한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무성 애니메이션의 특징인 재생력은 관절을 마음대로 구부리고 부위를 재조립할 수 있는 '곡선'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영화 속 오늘날엔 바로 이 곡선이 부재하고 '직선'이 만연하여, 무성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같은 운동감을 느껴보기 어렵다. 곡선과 직선은 두 점 사이를 이어내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곡선은 두 점 사이를 잇는 방식이 구불구불 무한대인 반면, 직선은 두 점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을 수 있는 한 개의 선이다. 그래서 곡선은 무수한 변수와 오차가 가득한 반면, 직선은 곡선의 우회나 여유로움이 허용되지 않는다. 직선에게 곡선은 다름이 아닌 '틀림'이요 입력 오류다. 

분명 직선은 최적화, 경제성, 계산 가능성 등에 상응한다. 그런데 이 대가로 우린 직선의 따분함을 감내해야 한다. 직선으로 가득한 <로봇 드림>의 도입부는 분명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불만족스러울 게 없다. 직선으로 빼곡 반듯한 집에서 도그는 배고프면 먹고, 심심하면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며, 더러우면 청소를 한다. 삶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지만 문제는 아주 따분하다. 베르헤르는 차가 다리를 지나가는 딱딱한 소음, 리모컨이나 게임기를 두드리는 삭막한 소리를 부각한다. 이렇게 권태로운 이유는 직선이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예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루함과 흥미를 판가름하는 기준인 감각은 '힘'이다. 그래서 처음 느낀 감각은 새롭고 짜릿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면 힘에 익숙해져 둔감해지고 질리게 된다. 특히나 '다른 힘'을 허용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정형화된 힘만 허용하는 직선적인 세계에서 지루함은 더 급속도로 닥쳐올 것이다. 리모컨, 게임기, 자동차 모두 다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며, 심지어 자동차는 떨어진 두 공간을 잇는 가장 효율적인 공간인 ‘다리’만을 횡단하니 말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시민들은 다양한 동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 고양이, 말부터 시작해서, 다소 낯선 코끼리, 콘도르, 오리너구리, 멧돼지, 펠리컨, 호랑이, 치타, 원숭이 등 아주 다양한 동물종이 공존한다. 분명 똑같은 환경에 살아가는 동물들, 그럼에도 이들의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그 세계가 변수로 가득한 자연이 아니라 가변성이 일련 통제된 도시이긴 해도, 아주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베르헤르는 사계절의 흐름을 영화에 반영하고, 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각각의 지역-할렘가, 차이나 타운-을 부각한다. 즉 아무리 세계가 하나라고 한들, 그 하나가 아주 가변적이기에,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어야 하지만, 정작 시민들의 태도는 정반대다. 동물들은 상대를 다름이 아니라 틀리다고 곁눈질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거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이들은 몹시 바빠 보인다. 아마도 그들 자신의 직업적 목적이 있을 것인데, 이에 유용하지 않거나 방해한다고 일컬어지는 타인을 날카롭게 째려본다. 뿐만 아니라 도그의 집은 다중 잠금장치로 잠겨서 쉽게 현관문을 열 수 없는데, 그 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은 도그의 목적에 부합하는 택배가 도착했을 때요,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문은 다시 닫힌다. 이 '문'은 도그의 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 해수욕장이 폐쇄되는데 도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규정한 목적 외의 개방은 허용되지 않는다. 도그가 원하는 개방은 이종 간 우정으로서, 정작 합법적으로 문이 열렸을 때 로봇은 사라지고 없다. 할로윈 행사도 마찬가지로 어른들은 사탕을 주고, 아이들은 사탕을 받는 역할에만 단단히 얽매여 있다. 이 목적을 효율적으로 관통하는 직선 외 곡선의 반응은 감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그는 외롭다.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에서 오직 곁에 남는 것은 일방적으로 지시·명령내릴 수 있는 사물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정의 대상은 로봇일 수밖에 없다.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다 보니 우정이나 사랑은 너무나 쉽게 불발하고, 제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친구란 오직 우정이란 목적에 따라 탄생한 발명품인 로봇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직선적인 사상과 영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화 속 동물들의 형태가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구불구불하고 둥글둥글한 곡선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곡선으로 이뤄진 생물들은 딱딱하고 계산적인 이성으로 작동되는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따르고 싶으며, 베르헤르는 직선을 깨트리는 곡선의 무궁무진한 가변성을 순수 이미지로 부각한다. 도그가 로봇을 조립하는 과정을 창밖 너머의 비둘기들이 구경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도그와 비둘기의 태도는 상반된다. 도그는 광고를 보고 로봇을 샀다. 그렇기에 광고를 시청한 다수의 외로운 시민들이 동시에 로봇을 구매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금쯤 설명서를 따라 똑같이 로봇을 조립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행동엔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반면, 비둘기는 조립이 끝난 로봇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달아난다. 직선이 천편일률이라면, 곡선은 예기치 못한 천차만별이다. 

그 감정은 짜릿하고 별나지만 그리 생산적이거나 유익하진 않아 보인다. 이성은 로봇을 조립하여 생명력을 부여하는 반면, 그 옆에서 놀라 자빠지는 감성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무수한 곡선으로 표현된 감성적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울 뿐, 그 이상의 이득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도그의 삶은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딱히 부족할 게 없다. 그런데 아무리 게임기를 두들기고 TV를 돌려봐도 지겨움을 몰아낼 수 없으니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봤다. 거기서 계획 외의 것을 보여주지 않는, 이로써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는 TV에서 접할 수 없는 '연인'들을 목격했다. 이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도그는 단지 외로워서, 또 부러워서 로봇을 구매했을 것이다. 이후 로봇과 함께 여가를 즐길 때 곡선이 둥그렇게 오므라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그저 해방감이나 짜릿함을 만끽할 뿐인 춤을 춘다. 또 구불구불한 다리를 무려 8개나 가진 문어가 드럼을 연주하고, 관절을 이리저리 꺾을 수 있는 개들이 스트릿 댄스를 춘다. 이들과 마주했을 때, 눈과 귀가 탁 트이는 생경하고 신선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그 뿐이다. 

하지만 감성은 이성적인 이득보다 우선하는 '삶'을 불러온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성을 동원해서 로봇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등장하는 라스칼 역시 처참하게 망가진 로봇을 동정하면서 그에게 적합한 기관을 이성으로 고민하며 생명력을 부여했다. 로봇이 해변에 방치되었을 당시, 바다 너머에서 어미 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거기서 태어난 세 마리의 새끼 중 한 마리가 유약했는데, 그 새끼 새에게 마음을 뺏긴 로봇은 조류의 언어와 활동을 이성으로 이해하여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게끔 조력했다. 감정, 그 중에서도 대상이 내 곁에서 떠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랑', 반대로 대상과 이별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이성을 작동하며 무언가를 창조하고 불러온다. 그 무언가가 바로 삶이다.      


그 감정은 언제나 나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이 자신한테만 머물러있을 때 사랑은 상호 동등하게 맺는 '연합적인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상대를 해해도 좋은 '나르시시즘'에 그치고, 이로써 감정은 더하기가 아닌 빼기로 전락한다. 로봇은 모든 동물의 행위를 이해하고 모방함으로써 각자가 따라 해도 좋은 모범이 되는 존재라고 정신적으로 '지지'해준다. 뿐만 아니라 로봇의 완력이 강해서 도그의 손을 아프게 하자 재빨리 힘의 세기를 조절한다. 로봇은 도그와 자신의 다름을 인지하며 상대에게 헌신적이다. 이 다름은 분명 까다롭고 머리 아픈 일이다. 내가 먹을 핫도그를 상대에게 내어주고, 게임을 져주기도 해야 한다. 도그가 멀리서 지켜본 젖소와 순록 커플 역시 종의 차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보완하고 지지하며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또한 집밖으로 나가거나 서로의 공간으로 향하며 더 다양한 경험을 확장한다. 그 이해는 무성만화, 곧 언어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공감에서 비롯한다.   

반면 도그는 로봇을 몰랐다. 구매자들 다수는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도구’로서 로봇을 구매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쾌고감수능력이 탑재되어 있는, 이로써 존중받아야 하는 로봇을 구매자는 정녕 헤아리지 못했다. 바닷물이 몸체에 닿은 로봇은 녹슬었으며, 또 도그는 로봇이 연료로 작동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 무지의 결과로 로봇은 쓸쓸한 해변에 덩그러니 방치된다. 이후 로봇은 움직이진 못해도 눈을 끔뻑거릴 순 있다.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살아있는, 이로써 쾌고감수능력을 존중받아야 할 대상을 다들 착취한다. 토끼 부대는 제 나룻배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 로봇의 다리를 절단한다. 이들 중 사령관은 특히 더 자기중심적이다. 제 목적을 위해 로봇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 부하들을 마음대로 부린다. 이후 금속을 탐지하는 원숭이가 나타난다. 그는 금속을 주워서 돈을 벌기 때문에, 아주 커다란 금속 덩어리인 로봇을 고물상에 팔아먹고, 이후 악어에 의해 로봇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고 파괴된다.      


제 안에 갇힌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더 나아가선 자신까지 파괴한다. 반면 자신 너머로 확장한 감정은 서로를 돕는다. 그래서 감정을 서로가 공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수단 ‘공중전화’의 선이 끊김으로써 로봇을 구출할 수 있는, 더하기의 가능성이 불발된다. 두 공간, 여러 타인을 연결해주는 통로의 ‘폐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로봇은 꿈을 꾼다. 토끼들이 자신에게 연료를 충전해주기를, 즉 제 감정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이타심이 회복되기를 말이다. 로봇의 꿈을 연결하는 편집은 영화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후 도그가 꾸는 꿈 역시 마찬가지요, 이들 모두가 ‘악몽’으로 꿈을 마무리하며 현실로 내려올 때도 편집은 동일하다. 이는 이타심을 꿈꿀 수밖에 없는 ‘필연’, 그럼에도 꿈이 아닌 비참한 현실에 살아야 하는 이중적인 운명을 반영한다. 우리는 이타심으로 가득한 현장을 현실과 분리된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매끄럽고 개연적으로 연결된 차원으로 여겨 항상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이타심을 촉구하는 꿈은 상대를 위함과 동시에 자기를 위한다. 반면 나르시스트로 가득한 현장에선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나르시스트는 자기의 감정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보다 우월하기를, 내가 외롭기에 상대가 늘 곁에 붙어 있어주기를 말이다. 도그가 새 친구를 찾기 위해 방문한 스키장에서 개미핥기들은 서툰 도그를 무시한다. 개미핥기에게 도그는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도구다. 결국 도그가 크게 다쳐 깁스를 하는 파국을 낳는다. 이후 도그는 진정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오리를 만난다. 오리는 개미핥기와 달리 난폭하지도 않고, 펭귄처럼 무심하지도 않다. 연 날리기와 낚시를 잘 못하는 도그를 돕는다. 그런데 오리는 불현듯 유럽으로 떠나 연락이 되지 않고, 도그는 그에게 집착한다. 상대에게 의존하면 의존하는 만큼 행복하고 즐겁지만, 그 대상이 사라지면 그만큼의 고통과 불행이 찾아오는 법이다. 만약 후자가 싫어서 도그가 오리를 붙잡았더라면, 개미핥기와 마찬가지의 파국을 낳았을 것이다. 이는 로봇의 마지막 꿈에서도 드러난다. 로봇이 제 감정만을 중시하며 도그와 재회한다면, 현재의 친구 라스칼과 도그의 친구인 새로운 로봇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로봇의 꿈이 다른 누군가에겐 악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저 지긋이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도그가 눈사람에게 눈, 코, 입을 달아주고 모자와 목도리를 내어줬을 때 생명력이 부여되며, 그 눈사람 덕분에 도그도 즐거운 경험을 만끽한다. 또 도그는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풀어주거나, 두 번 실수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로봇에게 바닷물에 튀지 않게끔 조심한다. 라스칼은 로봇을 새롭게 조립하고, 심지어 값비싸 보이는 '황금 다리'까지 선물하며, 로봇 역시 라스칼의 노동을 도와 서로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즉 나의 목적을 다른 존재에게 강요하지 아니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타협하며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결말에서 로봇은 도그의 눈에 띄지 않고, 단지 멀리서 그가 좋아하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September>를 들려줄 뿐이다. 단지 도그가 행복하길 바라며 기억하고 응원하며 지지하는 로봇은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낳는다. 이성도 이 때 사용되어야 한다. 나만의 감정에 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닿기 위해서 새의 언어를 입모양으로 이해하고 상대에게 적합한 방법론을 탐구해야 한다. 이성과 감성, 직선과 곡선의 탐구를 오늘날의 애니메이션과 고전 만화를 대비하며 풀어내는 베르헤르, 끝끝내 감성과 곡선을 우선하였을 때, 아기 새는 날아오르고, 로봇은 새 생명을 선물 받으며, 외로운 사람들은 구원되어 삶이 채워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가여운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