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다시 쓰는 프로이트의 다섯 시기
아이는 부모의 욕망이 집대성된 일생일대의 걸작이자 탁월한 피조물이다. 하지만 이는 오직 아버지만의 만족일 뿐, 아이 스스로는 공허하다. 그래서 자식은 아버지를 따라하면 결핍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 역시 피조물을 만들기로 다짐한다. 아버지의 훌륭한 피조물이었던 소년은 이제 타인의 몸을 통제하고 주물럭거리는 '의사'가 되어 '질료'를 물색한다. 그는 가장을 위해 고분고분 행동하는 '가정주부', 그녀가 잉태한 가장의 분신 '아이'를 결합시켜, 자신의 두 가지 욕망이 혼합된 최상의 피조물을 창조한다. 육체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이성애자 남성의 눈을 즐겁게, 정신은 아이로서 가장이 원하는 것을 차곡차곡 채워나갈 것이다. 하지만 가장에 의해 억압을 당하는 여성과 아이, 각기 갖던 결핍 또한 하나로 뭉쳐 '반항'의 강도 역시 두 배가 된다. 그 두 배의 반항을 제 인생을 되찾으려는 에너지로 소모하며, 스코틀랜드의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가여운 것들』을 이끈다. 본 소설은 여성과 아이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만드는 불가항력적인 가부장제를 탐구한 소설이다. 이를 구조주의, 아버지의 절대적인 법 등을 탐구하는 시네아스트,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영상화한다.
1973년 아테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현대 그리스 영화를 묶어내는 사조, ‘이상한 물결’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최근 할리우드로 이주한 그는 미국의 제작 시스템에 온전히 물들지 않고, 자신의 괴이한 연출과 탐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것, 또 바라는 것은 진정 자연스러운 것일까? 과연 내 몸에서 솔직하게 발원한 것일까? 란티모스는 이 질문에 NO라고 답한다. 그 이유는 그가 영화로써 탐구하는 '구조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란티모스는 인간의 행위가 주체적인 내부에서 발원하지 않고, 외부에서 기원했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한다. 초기작 <송곳니>에서 아버지는 보편적인 사회와 상반된, 이질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구성한다. 감상자의 눈에 그 세계는 대단히 괴이하지만, 소속된 내부의 구성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 일컬어진다. <알프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 질서에 의해 종속된 공동체, 개인의 삶을 고찰하며, <더 랍스터>에서는 구조에 의해 좌우되는 시선, 사랑, 감정을 탐구한다. 그의 영화는 감상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 진실이자 참일까, 시선을 바꾼다면 우리를 둘러싼 빽빽한 부조리가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구조를 탈출한다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란티모스는 이 질문에도 NO라고 답하며, 구조 바깥은 단지 또 다른 구조로 이어질 뿐이며, 절대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송곳니>에서 아버지는 구조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다. <알프스>에서 외재적 원리가 아니라 내재적 원리를 따랐을 때, 인간은 구조에서 축출 당한다. <더 랍스터>에서 어느 구조에도 속하기 싫어하는 인간이 등장하지만, 과연 인간이 구조에 의탁하지 않고 온전히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품고 극을 마무리한다.
이런 구조는 '폭력'으로 지탱되고, 이에 란티모스 연출은 늘 가학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정신에 의해 기계적으로 지배되는 육체를 가시화하기 위해 늘 상 '뻣뻣한 춤'이나 몸동작을 강조한다. 배우들이 기괴하고 어색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제 몸의 솔직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란티모스는 조종당하는 듯한, ‘목각인형’과도 같은 춤으로 주체성 박탈을 표현마며, 디렉팅 역시 로베르 브레송, 아키 카우리스마키, 짐 자무쉬처럼 무감하고 뻣뻣한 편이다. 이러한 가운데 진정 자유롭게 춤출 때, 그 춤사위는 광기이거나 미친 것처럼 보인다.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구조 내에서 자연스러운 행동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역전되는 것이다.
신작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허용된 자연스러운 행동, 곧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행위는 오직 '투신자살' 뿐이었다고 란티모스는 ‘줌인’과 ‘컬러’를 빌려 가시화한다. 탄생도, 그 이후의 삶도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여자 빅토리아의 삶, 비로소 생의 끄트머리에 알피의 가학 행동과 제 뱃속에 있는 ‘괴물’한테서 멀어지고, 죽음이라는 자신의 염원에 가까워져 모든 색채를 회복한다. 물론 그 욕구가 가부장제라는 불온한 환경에서 비롯됐기에, 본성을 따른 죽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그릇된 욕구이긴 하지만. 외에도 영화 속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에 의해 성적 선택권을 박탈당한 매춘부, 하녀, ‘할례’ 당하는 아내 등으로, 그녀들의 행위는 남성의 눈에는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여성 자신의 눈에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수동적이다. 남성의 눈에는 만족스러워보일지 몰라도, 그녀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매춘부의 과하고도 흉한 ‘화장’이 남성에 의한 어색함과 괴이함의 증거다. 그런데 사회적 지위가 “여자가 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인 매춘부가 돈을 제 수중에 쥐고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그녀들 가운데 행동이 가장 자유로울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래서 컬러는 사라진다. 앞서 언급한 것을 토대로 해석한다면 컬러는 자신의 '역량'이다. 벨라가 제 삶을 스스로 개척해갈 때 공식처럼 컬러가 사용된다. 백스터가 빅토리아의 육체에 복중 태아의 뇌를 이식할 때도 컬러가 이어진다. 그 결합은 무한한 여지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더해서 ‘렌즈 플레어’가 뿜어져 나온다. 렌즈가 담지 못할 정도의 과잉 가능성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직후 영화는 '흑백'으로 돌변한다. 컬러와 비교해서 흑백은 결여이자 박탈이다. 현실에 오색찬란한 색채가 수놓아져 있는 이상, 흑백으로 촬영한 영상은 필연적으로 진실의 자격 미달이다. 이 흑백 속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빅토리아의 육체가 일으켜 세워진다. 또 제 뇌를 몸과 분리시켜달라고 말한 적 없는 아기의 두뇌가 빅토리아의 육체에 이식된다. 만약 영화 속 가득한 ‘키메라’ 자신들이 다른 육체를 직접 선망했다면, 능동적인 '진보'이기에 컬러로 포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벨라에 더해 조류와 포유류가 결합된 피조물들은 스스로 키메라가 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 ‘주체성’을 백스터에게 박탈당했기에 흑백에 담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탄생한 벨라 역시 백스터에 의해 바깥 활동이 철저하게 제한되고, ‘잠금장치’가 어마어마한 저택에 갇혀 산다. 그래서 란티모스의 카메라는 여성의 컬러를 되찾음과 동시에, 남성의 갈취 과정을 상세하게 해부한다.
흑백에 담긴 이들은 주체적인 '행동'을 빼앗겼다. 그래서 영화 시작부터 란티모스의 특징인 '기괴한 몸짓'이 이어진다. 빅토리아와 그녀의 아기, 모두 다 각자 지향하는, 또 적합한 몸동작이 있었을 지다. 그러나 백스터에 의해 성인 여성의 몸이 기괴하게 영유아의 '걸음마'를 수행한다. 동물 키메라들의 동작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타인에 의해 제한된 몸동작은 이토록 이상한 것이다. 물론 빅토리아를 기준으론 이상하지만, 벨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긴 하다. 더욱이 벨라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가며 성인 여성에 걸맞은 걸음걸이와 동작을 익혀간다. 그러나 그녀 곁엔 남자들이 있다. 함선에서 벨라는 노랫소리에 충동적으로 이끌려 즉흥적으로 춤을 춘다. 다소 난폭하고 야성적인 그 춤사위는 벨라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춤추기 전엔 덩컨이 소위 '예의'를 가르치며 행동을 정돈했고, 이후에는 '통상적인 춤사위'로 그녀의 분방함을 억제한다. 벨라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알피의 할례와 협박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검열된 동작은 감상자의 눈에 꽤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지배당하는 주체들이 그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잃었기에 의구심이 샘솟는다. 이들의 동작은 뻣뻣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배자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거나 정상적인 것이라며 감상자를 세뇌해온 것이 아닌가.
즉 어떤 자연스러움은 단지 익숙함의 결과다. 키메라가 되기 이전 동물들의 행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가부장제에 속하지 않은 여성의 주체적이고 당돌한 몸짓을 볼 수 있었더라면, 가부장제가 자연스럽다고 일컫는 불온한 규범을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 그것도 가부장제 내에서 가장인 남성들은 그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을 일삼는 벨라에게 늘 부리나케 달려와 검열한다. 백스터의 집, 벨라가 잠시 외출할 때 허용되는 어둡고 갑갑한 ‘마차’, 덩컨이 벨라를 통제하기 위해 가져온 ‘캐리어’, 이후 옮겨진 함선 모두 다 좁고 폐쇄적이며 외부는 단절된다. 물론 바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출하려고 하면 클로로포름에 의해 얌전하게 마취된다. 또 바깥으로 가는 '계단'이 끊겨 있거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지만 창밖은 망망대해라서 가능한 것은 죽음뿐이다.
그래서 영화에선 때때로 ‘좁고 둥근 프레임’으로 축소되어 흡사 문고리로 훔쳐보듯 실내를 엿보는데, 이는 가장이 만들어낸 구조의 폐쇄성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유한한 공간에 갇힌 이들이 무한한 외부를 접하면 어지럽고 경이로우며 숭고한 감정을 느끼게 될 지다. 그래서 란티모스는 초현실적이라 말할 수 있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풍경, 혹은 영화에서 언급되는 ‘낭만주의’의 질풍노도 풍경을 구축하여,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모험을 떠난 여성의 세계 인식을 가시화한다. 또한 본 작품에서도 란티모스의 지문과도 같은 '광각렌즈'를 이용하여 구조 바깥의 광활함과 거대함, 어지러움을 가시화한다.
이 가부장제의 왕국엔 '폭력'이 만연하다.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가부장제의 지배 원동력이 폭력이다. 남성은 폭력을 이용해 피지배자를 제 욕망이란 목적에 맞게끔 개조한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폭력과 욕망은 반복되고, 이윽고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인 양 둔갑한다. 매춘부가 된 벨라가 처음에는 남성들을 ‘잔인하다’라고 표현하지만, 이내 곧 남성들의 저열함에 둔감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피해자는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다. 심지어 피해자성을 극복하고자 가부장제가 섭리인 세계에서 폭력을 답습하게 된다. 백스터도 외과 의사이자 학자였던 아버지의 희생양이다. 그의 얼굴 흉터와 더불어 기계 장치에 의존해야 하는 신체 기관을 통해 간접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가장의 폭력에 반감을 품기는커녕 폐쇄적인 환경에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며, 이후 벨라와 무수한 키메라들을 만들어낸다. 벨라 역시 집도용 칼을 들고 아버지로 여겨지는 백스터의 폭력성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한다. 그들에게 타인의 육체는 제 기분을 위한 '장난감'이고 폭력은 가부장제 내에서 합법적인 방법론이다.
하지만 본성은 그리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벨라는 가장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스크림을 갈구하고, 또 자위를 원한다. 가장의 통제에도 꺾이지 않고 자유를 추구하는 본성이 폭력의 두 번째 원인이며, 이는 '혁명'을 추동하는 힘이다. 벨라는 아버지를 모방함과 더불어, 제 욕구를 필사적으로 주장할 때 난폭하게 굴고, 맥스를 클로로포름으로 마취시킨다. 이후 그녀는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여행을 떠나며 구조 바깥을 잠시나마 만끽한다.
즉 저항하는 본성에 귀 기울일 때 가부장제에 의해 조작된 여성의 주체성을 복권할 수 있다. 남성의 구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통제가 쉬운 연약한 정신과 아름다운 육체를 결합한 피조물이 벨라였다. 그 창조물엔 조물주를 사랑해줄 목적이 각인되어 있다. 동시에 성인 여성의 육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어린 아이의 정신은 솔직하거니와 본성은 이성에 통제되지 않아서, 있는 힘껏 힘을 뿜어낼 수 있다. 전자를 위해 탄생한 벨라의 특징이 후자로 발현되며 여성의 주체성을 처음부터 다시 쓴다. 흑백으로 촬영된 시기의 벨라는 프로이트의 ‘성격 발달 단계’에서 초기 시기인 '구강기', '항문기'에 해당한다. 그녀는 입으로 쪽쪽거리거나, 용변 실수를 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또 백스터의 트림과 위액 방울을 보며 깔깔 웃는다. 여기까지는 성별 불문하고 어지간한 아기들이 성취할 수 있었던 욕망이다. 성별이나 환경을 불문하고 용변을 볼 수 있고 젖을 빨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흑백인 이유는 그녀가 실험체라는 목적으로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항문기가 끝나면 생식기 자극을 재미있어하는 '남근기'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가부장제가 개입하여 차별을 만든다. 남근을 숭배하는 가부장제에서 남아의 남근기는 대체로 옹호되며 꽤 만족스럽게 진행된다. 파리 매음굴에서 어느 한 성 매수범이 아들들에게 매춘을 ‘성교육’이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에서 남아의 남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유추가능하다. 반면 여아의 남근기는 "정숙하지 못하다"라는 언어로 구속된다. 즉 가부장제에 따라 자연스러운 욕구/자연스럽지 못한 욕구가 나뉘며, 이는 욕망에 주도적인 성별/수동적인 성별을 어려서부터 결정한다. 바람둥이인 덩컨은 비난받지 않는 반면, 난봉꾼 벨라는 상류사회의 예법이나 당대의 여성성을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악마’라고 비난받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여아는 이 불합리성에 저항하기 어려운 육체를 지녔다. 그런데 벨라는 성인 남성들도 그녀를 제어하는데 애를 먹을 정도로 억세다. 그래서 그녀는 방해받지 않고 '자위'를 즐기거나 맥스에게 ‘애무’를 시킨다. 이때 란티모스는 오르가즘을 느끼는 그녀의 '입'을 '줌인'하며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그녀는 제 '구멍의 쾌락'에 가까워지거나 그것을 거대하게 확장하며, 다시 쓰는 남근기에 만족한다. 이후 맥스의 청혼을 유예하고, 제 음문에 '불꽃놀이'를 일으키는 섹스 기술자 덩컨을 택하며 남근기를 만끽한다.
그러나 남근기의 벨라가 세상이나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은 오직 음문의 만족뿐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그 이상의 중요한 것들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기의 쾌감을 느끼기 위해 가부장제에 매몰되어 있는 남자를 불러와 다른 영역에서의 불의를 자처한다. 분명 덩컨은 성관계에 있어선 벨라를 만족시킨다. 그것이 곧 이성애자 남자의 쾌락과도 직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의 영역에선 남근기 여성의 '분방한 언어'를, 자신이 보고 듣기 좋은 언어로 교정한다. 그럼에도 남근기가 꽤 만족스러운 벨라는 심미적인 감각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온전히 좋은 것인가? 란티모스는 본 작품의 심미성을 경계한다. 경이로운 런던 브리지 아래엔 쓰레기와 죽은 물고기가 널브러져 있고, 아름다운 리스본의 뒷골목엔 불화가 가득하며, 미식 이후엔 구토가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본 작품의 심미성이 19세기라는 시대상에 맞지 않거니와 리스본, 파리, 런던의 고증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즉 아름다움, 그것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선 원 존재를 수정하는 폭력이 동반되며, 지배자 남성을 필요로 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욕망도 매한가지다.
다행히도 인간의 인생은 남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근기가 끝나면 '잠복기' 내지는 '잠재기'가 이어진다. 이 시기에 인간의 시야는 남근과 음문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젠 제 본성과 몸을 철저하게 괄시하고, 외부만 극단적으로 응시·관찰한다. 자신의 욕구보다는 우정과 친교가 더 소중해지는 시기가 생식기의 본능이 의식 너머로 잠복하는 잠재기다. 이 때 벨라가 사용하는 언어, 곧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도 180도 달라진다. 본래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기를 한 대 쥐어박으려던 벨라, 이젠 알렉산드리아의 무수한 아기들이 아사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자 눈물을 흘리고 덩컨이 가진 돈을 모조리 기부하려다 탕진한다. 물론 남성은 여성의 잠재기 역시 통제한다. 외부와 고립된 폐쇄적인 환경으로 데려가고, 친구가 된 마사를 살해하려 하거나, 벨라가 읽는 책을 바다에 내던져버린다. 그 이후 제안하는 것은 ‘결혼’, 곧 남성에게의 집중이다. 이 또한 가부장제가 극심하던 현실과 별 차이가 없다. 남아에게는 풍부한 교육이 제공되던 반면, 여아에겐 오직 남성을 위한 기술을 배우도록 장려하였으니 말이다. 벨라는 이 또한 뒤집으며 독서와 토론으로 성장해간다. 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이 백인 남성만 바라볼 것을 요구받던 서구 가부장제로부터 흑인 해리와 친교를 맺어 세계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마사를 통해 철학을 깨우치며,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지성인으로 성장한다. 이를 방해하는 남성은 여성의 자립을 가로막는 것이다.
이후 벨라는 영화를 감상하는 18세 이상의 우리와 동일한, '생식기'로 진입한다. 내재성과 외재성을 극단적으로 오가던 남근기와 잠재기는 조화를 이뤄, 이젠 벨라의 말처럼 ‘돈과 섹스’ 둘 다 원한다. 이 만족과 성취를 가부장제에서 어떤 성별이 쟁취하였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부조리에 잠식되지 않고자 벨라는 돈을 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경제의 기준을 '남근'으로 세운다. 영화에서 남근이 즐거워하면 소비해도 좋은 것으로 일컬어져 가격이 높게 책정된다. 더욱이 남자들이 돈을 버는 과정은 늘 즐겁다. 덩컨의 ‘도박’에 더해, 백스터는 ‘재미’ 때문에 업을 이어간다. 반면 여성의 일은 가사 노동이 되었든 매춘이 되었든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프림의 구겨진 표정을 보라. 또한 벨라가 알렉산드리아에 돈을 기부하려 할 때, 여성의 경제적 판단을 중간에서 남자들이 방해한다. 그녀들이 돈을 쓸 수 있는 대상은 섹스 이후 여성에게만 남는 책임인 스와이니 부인의 손자, ‘아기’ 뿐이다. 즉 경제의 판단 기준은 여성이 세우지 못하거니와, 여성의 소비를 남성이 가로채고 약탈한다. 하지만 란티모스는 여성의 좌절과 수동성을 끊어낸다. 벨라는 매춘 과정에 자신이 원하는 퀴즈와 아로마 오일을 첨가해 좀 더 즐거워한다. 또 란티모스는 편집을 이용해서 일과가 끝난 벨라가 '해부학 교실'에 다니는 장면을 이어낸다. 투아네트 역시 노동에 있어선 가부장제에 순응할지언정, 그 이후엔 레즈비언 성교를 즐기며 오르가즘을 만끽하거나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소비로써 실천한다.
남성 및 가부장제 옹호자들은 이 매춘부들을 모욕하고 비난한다. 가부장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여성의 권력과 경제력을 다시금 빼앗기 위함이다. 그러나 벨라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 남근에 의해 좌우되는 자신을 거부하고, 제 음문이 가리키는 맥스에게 다시 먼저 청혼하여 결혼한다. 벨라는 남근이 기준이 되는 사회 통념까지 뒤집는다. 물론 최후의 방해물이 남아있다. 바로 '법'이다. 현재 그녀는 벨라로서 새로이 태어났지만, 법은 여전히 빅토리아라고 그녀를 규정하고 알피와 혼인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초반부의 백스터가 벨라의 의사와 무관한 그녀의 결혼 및 외출을 제한하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장면에서도, 그녀들의 인생이 남성들의 법에 의해 억지로 좌우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법이 제 기분에 따라 갈매기를 죽이고, 벨라의 부재에 펠리시티를 만들어내는 남성의 욕망을 비호하며, 겨우 주체적으로 거듭난 여성을 다시 새장 속에 가두려 한다.
그러나 란티모스는 최후까지 여자의 진실을 줌인한다. 빅토리아와 태아가 결합한 존재가 벨라임을 깨닫는 순간, 이후 해부학자인 그녀의 욕망만을 철저히 따를 때 그녀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줌인이 아니더라도 벨라가 영화 내에서 다가가는 것은 알피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다.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알피의 협박에 다가서진 않는다. 이후 백스터의 저택을 다스리는 벨라, 곧 '가모장제'가 펼쳐진다.
즉 란티모스는 자신의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가여운 것들』을 재해석하며, 가부장제라는 구조에 의한 여성의 역사를 해부한다. 중간 지점, 튀르키예 지배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를 그려 넣는 것은 국가 관계로 확장된 가부장제가 여성뿐만 아니라 자국 역시 위협했다고 판단한 것이랴. 즉 가부장제는 성별의 문제를 넘어 모두의 존엄과 관련한 불의다. 다만 이 가부장제 이후를 펼쳐내는 결말은 찬반양론이 갈릴 것이다. 키메라로 전락한 알피의 모습은 결국 벨라가 백스터를 일부 답습한다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 장면은 분명 통쾌하지만 가부장제의 생명 경시를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혁명이나 대안이 되진 못한다. 물론 관점을 조금 비틀어서, 란티모스는 그 결말을 애초에 전부 긍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결말처럼 구조 바깥은 없거나, 구조는 아무리 노쇠해도 이어지거나, 사멸한 구조 이후엔 또 다른 구조가 이어질 뿐이라고, 그 구조는 필연적으로 구조의 욕망을 구성원들에게 세뇌할 것이라 체념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 속에서 벨라의 가모장제가 가부장제에 비해 훨씬 인도적이고 평화롭다는 점을 의의이자 타협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하는 알피를 제외하고는, 모든 구성원이 그들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풍경이 컬러로 펼쳐지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