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우린 자꾸 뒤돌아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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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윤회론에 따르면 우리에겐 어떤 형태로든 전생이 존재했고, 현생은 전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번뇌나 업을 풀기 위해 펼쳐져있다. 바로 그 윤회를 ‘이민자’들은 살아서 겪는다. 분명 이민을 가기 전 사용했던 언어가 있고, 익숙했던 생활습관도 있다. 하지만 이민을 선택함으로써 친숙했던 일상은 마치 전생인 양 까마득해졌고, 과거와 상반된 현생을 친밀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도 이민을 가면서 포기하고 등졌던 그 업들이 이민자의 뇌리에 번뇌처럼 차오르고, 결국엔 눈에 밟혀 '연어'처럼 회귀하듯 기억의 여로를 떠난다. 그렇게 돌아본 기억을 셀린 송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회고한다.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 ‘송능한’과 화가였던 어머니에 의해 두 차례의 이민을 가야 했던 셀린 송은 그 과정에서 포기해야만 했던 ‘첫 사랑’과 성인이 되어 재회한 사적인 경험을 영상화한다.
셀린 송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펼쳐낼 색채를 가늠하게 해주는 '단편'은 없다. 단·장편 종합해서 그녀의 데뷔작이 <패스트 라이브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로서 그녀의 색채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아예 전무하진 않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셀린 송, 자신을 투영한 배역이 '각본'을 쓰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그녀는 아마존 프라임 오리지널 드라마 <시간의 수레바퀴>의 에피소드 1화, 8화에 각본가로 참여하였다. 비록 셀린 송만의 오리지널 각본은 아니지만, 그녀의 지론과 색채는 분명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가장 먼저 '시간론'이다. 그녀가 쓴 각본에선 시간을 대하는 남과 여의 태도가 매우 상이하다. 이는 사회, 문화적인 성 관행·역할을 의미하는 '젠더'에 따른 차이로, 가부장제로 지탱되어 온 역사 속에서 남성은 '과거'를 따른다. 항상 남자들에겐 '선조'를 닮았다는 말이 따라다니며, 남성으로서 후광을 현재에 이어오려 한다. 더해서 '조상'의 역사를 기반으로 앞날을 예견하며, 남성 조상들을 숭배한다. 그러나 여성은 다르다. 남성과 달리 과거의 유산은 여성에겐 좋은 것을 물려주지 않는다. 이로써 여성은 과거를 거부하고, '진취적인 야심'을 품고 가부장제를 '반성'하며 새로운 시간을 개척한다.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셀린 송의 색채는 시간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하는 '관계론' 또한 반영되어 있다. 그녀들은 머리를 땋는 의식을 거쳐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멀리 있어도 모두가 함께 있다"라고 느낀다. 이후 서로는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가면서까지 상대를 구출하는 이타심을 발휘한다. 그것이 셀린 송이 생각하는 우정이나 사랑인 것이다. 너를 나처럼, 나를 너처럼 생각하기.
마지막으로 셀린 송의 '이민' 경험 또한 작품에 반영된다. 부모에 의한 이민이긴 했지만 그녀 또한 캐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그곳에서만 가능한 커다란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녹록치 않았나니, 새로운 이름을 얻고, 낯선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이처럼 <시간의 수레바퀴>에서도 특정 공동체, 집단에 진입, 소속되기 위해서 견뎌야 하는 의식의 '고통'을 부각한다. 그것은 사람을 낯설고도 두렵게 만들지만, 이내 곧 적응하며 공동체에 속하게 되고,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발전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셀린 송은 시간론부터 풀어헤친다. 가장 보이지 않게 된 시간을 영화로써 재현하는 당위성, 곧 회고의 이유에 답한다. 업과 번뇌가 자꾸 현재 우리의 의식을 건드리는 이유는, 지금 여기가 매우 불만족스럽고 권태롭기 때문이다. 도입부, 어린 12살의 나영(문승아)은 모종의 이유로 울고 있다. 어린 나영은 홀로 참여하고 헤쳐 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은 거대한 세상이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자꾸 울거나 용변 실수를 했다고 한다. 이후 이민까지 가게 된 나영은 '영어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원하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거니와, 그나마 괜찮은 이름은 동생이 채갔다. 즉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그 나영이 좋아하는 어린 해성(임승민)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소년은 소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첫 사랑 나영이 이민을 가게 되었고, 어리고 유약한 자신은 어른들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 당시의 소년은 입을 꾹 다문다. 불가해한 세상 속에서 무능력한 자신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즉 12살의 그들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 때문에 침울해한다.
이후 12년이 더 흘러서 24살이 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12살이 더 좋아 보일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20대 초반이 된 남자 해성(유태오)은 자연스레 징병된다. 이후 아서(존 마가로)와 구 나영, 현 노라(그레타 리)에게 회고하나니, 군대에선 상관의 일을 대신 해야 해서 항상 제 일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다. 즉 군대 자체도 자신이 원치 않았던 일인데, 그 안에서조차 해성의 주체성을 위한 일말의 자리도 타협할 수 없었다. 제대 후에도 해성의 삶은 순탄하게 풀리지 않는다. 그는 결혼을 인생 계획에 두지만, 서로 좋아하는 감정 이상의 경제적인 ‘조건’을 따져 물어야 하는 한국식 결혼 문화, 제도로 인해 소극적으로 위축된다.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국가인 미국에 사는 노라도 마찬가지다.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 이민을 간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던 12세의 소녀는 24살이 되자 '퓰리처상'으로 목표를 낮췄다. 심지어 36세의 노라는 퓰리처상조차 바라지 않고 있다. 또 마음은 끌리지만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해성이 아니라, 레지던시에서 우연히 만나 현실적인 조건이나 취향이 일치하는 아서와 결혼한다. 감상자는 노라와 아서의 결혼 생활을 지켜보며 '좋은 감정'을 느끼기가 어렵다. 아마 노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의 프레임에 같이 머물러도 아서는 게임에 정신이 팔려서 노라의 도착을 인지하지 못하고, 또 다른 프레임에선 자꾸만 아서가 화면 바깥으로 이탈하여 노라는 외롭게 홀로 놓이니 말이다. 이와 달리 해성은 기껏 영상 통화만 하더라도 그녀가 외롭거나 소외되지 않게끔 알뜰살뜰 세심하게 챙긴다. 그러나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또 다시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져야 한다.
불만족스러운 현재, 달콤한 과거라는 두 가지 시간성이 본 작품의 연출을 좌우하는데, 자아와 꿈을 무디게 만드는 '현재성'은 영화에서 반복되는 '트래블링 숏'과 '운송수단'을 상징으로 삼아 가시화한다. 트래블링 숏과 운송 수단은 계속 움직인다. 결코 멈추지 않는 이들의 운동이 한사코 전진하는 현재와 같다. 그 운동에 특징이 있다면 카메라는 인물의 발걸음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움직인다는 것, 그래서 피사체를 촬영한다는 본분을 잊고 포착하던 인물을 놓치게 된다는 점이다. 또 운송수단은 인물을 머금고 프레임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즉 트래블링 숏과 운송 수단은 감상자가 알고 있던 피사체를 지워내면서 이동하는데, 그것이 자아를 변형시키는 현재의 힘과 같다.
이는 영화에서 주로 회고할 때 사용되는 ‘틸트’ 및 ‘패닝’과 크게 상반된다. 트래블링 숏은 시작 지점을 월등하게 추월하지만, 틸트나 패닝은 카메라가 정박해있는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와서 처음이 어땠는지를 환기한다. 즉 현재는 한때 존재 했던 것, 분명 봤던 것을 앗아간다. 그래서 트래블링 숏과 운송수단은 있던 것을 소멸시켜 '공백'을 불러오고, 이로써 영화 속 인물들의 '헤드룸'을 크게 키운다. 유의미한 것들이 모조리 빠져나가 ‘적막’과 ‘공허’가 대신 들어차는 것이다. 또 현재는 내게 좋은 것은 앗아가고, 대신 내게 좋지 않은 것들을 가져다놓기도 한다. 그것이 이민을 결정한 식구들이기도 하고,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해성의 친구들이기도 하며, 사랑 대신 택해야 하는 회의실 등이다. 이렇게 현재가 불러온 것들이 북적거리는 숏에서 과거에 규정된 그들의 자아나 개성은 약화된다. 즉 현재는 자신이라 믿었던 것들을 줄곧 파괴한다.
그렇게 소중했던 나는 기억, 곧 '전생'으로 전락한다. 12살까지는 나영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노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녀처럼, 이후 36살의 해성에게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현재는 한때 존재했던 자아를 전생으로 전락시킨다. 지금의 존재를 흡사 탈피, 변태시키며 말이다. 문제는 그 현재의 변신을 주체는 바라지 않았기에, 현재가 앗아간 전생에서야 말로 “내가 가장 나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전생엔 내게 좋은 ‘사랑’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무엇을 좋게 하는가? 영화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내가 공격을 받을 때, 이로써 자신이 침해될 때 발생한다. 특히 나영은 12살에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다. 이런 와중에 해성은 나영에게 '울지 마'라며 위로해준다. 또 함께 데이트하며 불쾌함을 제거하고, 대신 내 영혼이 충만해지는 기쁨과 즐거움을 대신 채워 넣어준다. 이후 24세에 재회했을 때, 해성은 노라에게 “밥은 먹었어?”랄지, “피곤하지 않아?”라며 계속 걱정해준다.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성은 노라가 가장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끔 성심성의껏 신경 쓴다. 또 재회할 때마다 해성은 노라에게 "지금은 무슨 상을 받고 싶어?"라고 물어본다. 비록 노라는 커리어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세월 속에서 야망을 차츰 축소시켜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느끼는 와중에, 해성은 노라의 기를 다시 살려준다.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조건 응원하며,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 말해주며 지지한다. 즉 전생에 내재한 사랑은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었고, 소중하다고 북돋아주었다.
연인의 세심한 손길이 닿으며 영혼이 충만해지는 바로 그 순간, 이들의 텅 비어 있던 헤드룸에 서로가 채워진다. 36살에 재회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간접적으론 24세에 줌으로 재회했을 때, 만족스러운 얼굴이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또 재회한 연인들은 현재에 참여할 때와 마찬가지로 운송수단에 올라탄다. 하지만 홀로 운송수단에 탔을 때와 달리,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져도 연인들의 얼굴이 연이어진다. 서로의 시선은 사랑하는 상대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하며 노력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카메라를 단단히 고정시켜서 초상을 잘 보이게 보존하거나, 또 상대를 행여나 놓칠세라 시선, 곧 카메라로 열심히 따라다닌다. 다만 추월하지 않고 말이다. 이 같은 연인들의 힘은 아주 거대하다. 도입부에서 노라가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계는 내가 스스로를 낯설게 만들 정도로 모든 것을 약탈한다. 그 압도적인 힘은, 때때로 서울이나 뉴욕 등을 숭고하고도 경이롭게 포착한 '익스트림 롱숏'으로 가시화된다. 거기서 사람은 모래알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장일 정도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을 티끌 하나, 먼지 한 톨로 만드는 불가해한 세상 속에서 연인들의 사랑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상대의 얼굴이 상실되지 못하게끔 수호한다. 설령 잊힌다 한들 가까이서 구체적으로 바라보며 세심하게 소중한 얼굴을 기억한다. 이로써 두 연인은 서로의 얼굴을 커다랗게, ‘줌인’하거나 '클로즈업'한다. 또 36세의 노라와 해성이 재회했을 때, '롱테이크'가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12살, 24살의 그들이 좋았던 순간을 현재가 '컷'으로 가위질하고 대신 다른 것들을 이어 붙인다면, 소중한 서로를 보존하는 사랑은 롱테이크로 길게 지속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시간 자체는 너무나도 짧은 ‘찰나’다. 사랑마저 순식간에 과거로 전락하고, 나를 식게 만드는 현재가 또다시 엄습한다. 사랑을 잃어버린 연인들은 현재에 달콤한 기억을 재현해보려 안달이다. 멀리 있어서 잊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난다. 그래서 프레임에 공존하지 못하고, 리버스 숏으로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지 못하더라도, 셀린 송은 미국-중국이란 머나먼 거리에 위치한 두 사람이 담긴 숏을 전후에 붙이고 교차하여 멀지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가시화한다. 영화에서 인용하는 '인연'처럼, 등장인물들은 기어코 만나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영화의 편집이 점지한다.
그런데 그 운명을 현재가 방해하니, 이로써 사랑은 36살에 12살, 24세의 순간을 되짚어보며 거슬러 올라오는 '플래시 포워드'요, 그렇게 헤집는 당시에도 사랑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플래시 포워드하는 와중에 또 다시 '플래시백' 하는 ‘이중 회고’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더 먼 과거를 곱씹는 영화의 형식은 극도로 불완전해진다. 24세에 이들은 직접 서울-뉴욕을 오갈 수 없으니, '화상 통화'로 간접적으로 만난다. 이때 송출이 너무나 조악해서 자꾸 프레임이 끊긴다. 매끄럽고도 절대적으로 이어지는 운동이 현재라면, 지금을 거슬러 과거의 인연을 간접적으로 만날 때는 현재의 흐름을 끊고 멈춰야 하기에 어색한 부동이 부각된다. 더욱이 우리는 불만족스러운 현재에 대한 반발로 과거를 회고하나니, 여러 기억 중에서도 좋았거나 강렬했던 순간만을 ‘편식’한다. 선호하는 순간이 담긴 맥락에는 나쁜 과정이나 결과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는 모두 삭제한다. 그래서 과거를 회고하는 편집은 드문드문하다. 오직 나 자신이 보존된 순간만, 내게 중요한 파편만을 연결한다. 또 널따란 1.88:1 화면비가 형성하는 프레임을 거부하고, 그 안에 속해있는 ‘좁다란 노트북 프레임’에 전생이 있다. 그래서 현재는 무수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반면, 과거는 제한적이고 협소하다.
노라는 이 좁다란 프레임에 만족하지 않기에, 또 더 광대한 곳으로 흘러가고자 이민을 결심했었다. 즉 과거는 잠시의 위안일 뿐, 절대적으로 만족스럽거나 완전하지 못하다. 또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멈춰있는 기억으로 향하더라도, 현재에 육체가 묶인 우리는 시간을 전면 거스를 수 없다. 이에 전생과 잠시 조우한 우리는 현생으로 돌아오지만, 그 현재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우니 우리는 다시 전생과 조우할 그 날만을 기대한다. 결말에서 해성과 노라가 아예 작별하지 않고, 재회를 고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로써 과거와 현재를 영영 순환하는 인간의 심리는 36살의 해성과 노라가 재회했던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와 같다. 이와 유사한 트래블링 숏 또한 24세의 노라가 12세의 해성을 회고할 때 발생하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회전은 끝이 없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오롯이 속하지 못하는 인간은 두 차원을 그저 끝없이 오갈 뿐이기에, 필연적으로 짧은 사랑의 순간을 무한하게 '구간 반복'하며 돌려보는 셈이기에.
이렇게 셀린 송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 속에서의 삶을 윤회에 빗댄다. 매 순간마다 윤회하는 셈인 우리는 항상 전생을 궁금해 하며 길을 되돌아간다. 이 ‘그리움’의 정서는 떠날 수밖에 없었거나, 새로운 것을 누리기 위해 기존의 것을 파격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던, 이로써 과거의 삶이 더더욱 전생처럼 아득한 '이민자'에게서 도드라진다. 셀린 송은 이민자들이 빠지게 되는 자욱한 향수를 ‘35mm 필름’을 활용하여 오래된 앨범을 펼쳐 보는 듯한 아스라한 질감으로 구현한다. 다만 타이틀을 ‘전생’이라고 붙일 정도로 야심만만하게 불교적 관점을 내세우지만, 정작 '대사' 정도로만 소비된 윤회라는 소재가 매우 아쉽다. 윤회를 내용과 형식으로 적극 탐구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비교해서 소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나, 이를 연출로 승화하는 힘이 다소 밋밋하다. 또한 ‘이방인이 된 한국인’이나 ‘한국계 이민자’로서 대한민국이나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충분히 신선하거나 그리울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감각이 생경할 수 있으나, 그 미감을 한국의 관객한테도 온전하게 설득했냐고 묻는다면 다소 의문이 든다. 즉 형식으로써 전생 여행의 당위성을 전부 설득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