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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15. 2024

카우타르 벤 하니야, <울파의 네 딸들>

거울아, 진실을 바라봐주오

카우타르 벤 하니야(Kaouther Ben Hania), <울파의 네 딸들>(Four Daughters) 

- 거울아, 진실을 바라봐주오     

오늘날 대다수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가부장적이긴 해도, 그 중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특히 더 여성에게 해롭다. 여러 가치 중 오직 ‘힘’을 숭상하는 무슬림 남성들은 약자인 여성, 노인, 유아를 위험에 빠트리고, 심지어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법으로 공식화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여성들이 있다. 두 가지 이유가 핵심적이다. 첫 번째 원인은 ‘민족주의’다. 이슬람 원리주의가 부흥한 여러 원인 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서구의 개입이다. 서구 식민주의에 맞서 전통과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이슬람 원리주의의 자양분이었다. 여기서 몇몇 여성들 역시 성별보다 민족 및 종교에 초점을 맞추어, 모국을 수호한다고 궤변을 펼치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찬동한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힘이 센 남성은 여성을 위협한다. 분명 여성에게 남성은 위험천만한 범죄자다. 그런데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여성에게 구원자는 마찬가지로 힘이 센 남성일 수 있다. 힘이 센 남성은 여성을 유린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그들이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는다. 이에 여성은 생존하고자 힘이 센 남성, 곧 가해자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라흐마'와 '고프란'이란 여성은 ISIS에 동조하여 현재 리비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그 과정을 <울파의 네 딸들>에서 상세하게 추적한다.      


1977년 시디부지드 출생의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튀니지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의 여성 혐오를 고발하는 영화를 픽션과 다큐멘터리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연출해왔다. 카우타르는 <튀니지의 샬라>, <미녀와 개자식들> 등의 작품에서 이슬람이 여성들의 몸을 조작·왜곡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분석해왔다. 무슬림 여성들은 성 해방을 원한다. 아무렇지 않게 살갗을 내놓은 상태로, 경쾌하고도 발랄하게 움직이고 싶다. 그러나 이 사실이 남성에게 발각되어선 안 된다. 가장들의 눈에 띈다면 제재를 당하거나, 여성의 몸부림을 남성이 원하는 데로 옥죄려는 손아귀에 붙잡힌다. 특히 남성은 주체적이지 않은, 그들을 위해 수동적이고 고분고분한 태도를 고수하는 여성을 원한다. 이에 남성은 법, 곧 이데올로기를 여성에게 결코 유리하게 설정하지 않는다. 그 법을 따르는 여성의 몸은 남성을 위해 식민화된다. 

즉 카우타르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식민화를 고발하는데, 이 작업은 젠더에만 그치지 않는다. 카우타르는 형식적으로는 철폐된 '식민주의'가 여전히 '자본주의'나 '인종에 관한 편견'에 의해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자이네브 헤이트 더 스노우>나 <피부를 판 남자>에서 중점적으로 탐구하는데, 서구 세계에서 중동, 백인에게 아랍인은 마땅한 돈을 내면 소유할 수 있는 사물쯤으로 여겨진다. 중동이나 아랍인이 '작품'으로서 이룬 성취는 작품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를 둘러싼 백인과 서구가 나눠 갖는다. 형식적으론 중동과 아랍인에게 서구 백인이 마땅한 보상을 지불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보상은 실제 가치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서구 백인이 수수료로서 더 많은 이득을 갈취한다. 즉 카우타르의 관심은 젠더, 국제관계, 인종 등 모든 방면에서 영향을 미치는 ‘식민주의’인데, 이러한 작업이 <울파의 네 딸들>에서 이어진다.

      

본 작품에서 카우타르는 이데올로기-인간, 부모-자녀, 현실-영화의 관계를 '거울'에 빗대어 탐구한다. 일반적인 거울은 객관적으로, 단지 좌우만 뒤집힌 채로 현실을 따라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이념을, 자녀는 부모를, 영화는 현실을 모방한다. 영화 속 대사로도 거울의 본질적인 속성은 드러난다. 인간은 스스로 모든 행동 양식을 창조해내지 못한다. 자녀는 부모를 따라하고, 그 부모가 가르치는 것 역시 그들 부모한테서 배운 것이지 온전히 독립적으로 고안한 교육법이 아니다. 울파는 그 사실을 끊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는 거울이 참으로 해롭다고, 이슬람 세계라는 원형은 참으로 몹쓸 것이라고 카우타르는 말한다. 세대에 세대를 거쳐 내려온 모방은 현재 남겨진 세 여자의 곁에서, 딸이자 자매인 라흐마와 고프란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세계는 그녀들에게 어떤 모습을 재현하도록 강요하는가? 카우타르가 슬레이트를 들고 액션을 외치면 올파와 두 딸은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저속하게 여겨지는 음담패설부터 욕설까지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발화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일상에서 슬레이트를 든 사람들은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을 그녀들에게 주문하였다. 남성 경찰은 카우타르와 달리 그녀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자신의 무능함을 고발하는 여성의 입이 건방지고 자격 없다며 폭력을 사용해 그 입을 틀어막는다. 그들이 그녀들에게 허용하는 모습은 벤 알리를 노래와 춤으로 칭송하는 '고적대' 뿐이다. 오직 그런 원형만을 이슬람 세계의 여성들은 따라할 수 있었다. 이를 절반은 거부하면서도, 절반은 내면화된 울파 역시 딸들에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조신할 것을 당부 수준을 넘어, 강요하고 억압하였다. 

그래서 카우타르는 뒤집는다. 이념이 인간을, 부모가 자녀를,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도록, 또한 원형이 될 것들이 주체성과 진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록 말이다. 모방의 방향이 달라지고, 또 원형이 모범적이라면 충분히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 엄마와 언니들만 따라하다가, 보호소의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된 에야와 타이시르처럼 말이다. 거울이 따라하는 존재요 현실이 원형이라면, 전자에 배우가 있어야 하고 후자에 실존인물이 위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거울 속에 실존 인물 울파가 있고, 현실에 그녀를 연기하는 배우 헨드 사브리가 위치한다. 딸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라흐마와 고프란이 떠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입체적인 인물 울파와 달리, 그녀를 연기하는 헨드는 울파한테서 비교적 배울 점만을 따라한다. 물론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이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부정적인 면모도 몸으로써 기록할 수밖에 없지만, 헨드가 표상하는 울파가 과거를 반성하고 재탄생하도록 초반부에는 모범이 될 만한 모습을 부각한다. 그녀의 네 딸 역시 거울에 위치한 딸들은 현재 그녀 곁에 남아있는 에야와 타이시르요, 대신 라흐마와 고프란을 연기하기로 한 배우들이 현실에 위치한다. 라흐마와 고프란은 현재 수감되었기에 이들을 곧이곧대로 따라한다면 배우들은 존재해선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타르는 이들이 존재하게 만든다. 영화를 따라 이들이 언젠가 울파와 자매들 곁으로 돌아오도록 말이다. 또 에야와 타이시르 역시 거울을 거친 이후에 현실로 뛰쳐나온다. 애초부터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그 상태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듯, 혼탁한 거울에 머물던 이들이 화장을 마치고서야 현실로 나온다. 이로써 현실이 영화를, 실재가 배역을 따라하게 된다.     


그렇다면 현실이 모방해야 하는 거울 속에서 펼쳐지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입부, 카우타르는 부드럽게 어둠을 걷어내어,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세 여성, 울파와 에야, 타이시르를 드러낸다. 비로소 그녀들이 보이게 되지만, 여전히 그녀들은 절반쯤 가려있다. 구조물에 가리거나, 그녀들이 속해 있는 거울에 립스틱이 묻어 매우 흐리다. 이로써 그녀들은 잘 안 보인다. 물론 이들은 튀니지 내에서 나름 유명 인사다. 라흐마와 고프란이 ISIS에 합류한 이후, 남은 가족들도 함께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어, 사람들의 시선에 꽤 많이 노출되었다. 카우타르는 이들이 언론을 탔던 당시의 보도 영상도 인서트한다. 그러나 보도되던 당시와 현재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고, 또 외부에 드러나지 않고 검열된 진실도 있기 마련이다. 그 사실들이 거울로써 비춰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어둠과 립스틱이 방해한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거울이 비추지 못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울파는 딸들이 2차 성징을 겪자, 여자의 몸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라며 살갗을 드러내거나 카메라로 촬영할 것을 엄하게 금지하였다. 만약 그 뜻을 어긴다면 폭언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딸들은 엄마와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하는 부속품 정도로 여겨졌다. 또 에야와 타이시르가 말하길, 이슬람 세계에서 남자들은 여성을 본인들의 통제 하에 가둔다. 그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보이지 않게 되고, 그 통제를 따르는 이들도 답답한 히잡을 쓰게 되기에 보일 수 없다. 영화 속 표현 ‘검은 덩어리’로 전락한다. 이렇게 남성에 의해 여성의 진실이 어둠 속에 파묻힌다면, 남성은 본인이 어둠 속에 감출 것을 결정할 수 있다. 위셈을 연기하는 남자배우가 울파의 연인을 연기할 땐 흔쾌히 응하지만, 딸들을 성 착취하는 장면은 고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로써 남성의 해악은 어둠 속에 감춰진다.  

이러한 사실들이 어둠 속에 덮여있기에 빛으로 씻기고 밝혀 발굴하고, 그렇게 포착한 것들을 거울로서 영화에 심어놓아 현실이 모방하게 만든다. 본래 에야와 타이시르는 수수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 립스틱을 칠하고 제 몸을 치장한다. 현실에선 여성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거치고 이를 실제에서 다시금 모방하며 그녀들은 섹슈얼리티와 신체의 자유를 되찾는다. 남성의 경우 수갑을 차고 철창에 수감된 위셈의 모습을 잇는다. 울파에게 제압당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전남편은 덤이다. 

이는 카우타르가 '편집'으로 필히 드러내고 이어내는 숏, 반면 까다롭게 잘라내는 숏의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울파는 남자 없이, 미혼모 밑에서 아주 잘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가부장제는 그런 사실이 영 달갑지 않다. 남성을 필요치 않는 강인한 여성들의 존재는 거짓으로 점철된 연약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들의 집에 침입한다. 괴롭히고 안전을 흉흉하게 만들어 결국 울파는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주장하는 누군가와 결혼하였고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이러한 울파의 역사 중 일반적으로 현실에 알려져 있는 것은 어머니로서 울파다. 이와 달리 카우타르는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끼리 꿋꿋하게 생존해 온 울파의 진술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결혼 이후 처녀혈이 묻은 침대 시트가 아니라, 울파가 제압한 남편의 피가 묻은 시트를 당당하게 포착한다.      


더해서 카우타르는 남성들의 폭행을 숏으로 구체화하지 않는다. 네 자매의 친부는 딸들, 그 중에서도 고프란에게 성추행과 가정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다 아랍의 봄 이후 울파는 그를 정리하고 위셈과 사귀었는데, 그 또한 네 자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어주기는커녕 친밀한 가면을 벗고 성적으로 유린했다. 카우타르는 그 현장을 이미지로 굳이 재구성하지 않는다. 단지 인터뷰 수준으로만 언급하며 끔찍한 과거를 현재에 행동으로 따라하지 않게끔 처리한다. 영화, 곧 거울을 현실의 안티테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신 필히 이어내는 것은 에야와 타이시르가 그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영화로써 심판하는 장면이다. 남배우는 그 숏들이 불편한지 자리를 이탈하지만, 에야와 타이시르는 필히 해당 숏을 넣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냐하면 강인한 여성들이 거울 속에 담겨야만, 착취되는 여성들로 가득한 현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 아무리 현실이 거울을 따라하려 해도, 거울은 결국에는 허상에 그치지 않을까, 그 거짓은 현실에 어떤 효력도 지니지 못하는 게 아닐까? 분명 따라 하기 전까지는 그런 의문이 들 수 있었다. 실존 인물인 울파와 그녀를 따라하려는 헨드가 엄격하게 분리되는 초반부의 시퀀스는 의심을 증폭한다. 울파와 헨드는 숏을 나누어 각각 사용한다. 프레임에 함께 속하려 하지 않는데, 마치 울파가 속한 현실/헨드가 속한 영화의 차원이 다르다는 듯, 여전히 울파는 울파/헨드는 헨드라는 듯 말이다. 그러다가 슬슬 헨드가 울파와 동화된다. 그 과정에서 거울이 여러 개로 분화된다. 아직 온전하게 울파와 동화되기 이전, 또한 헨드 자신을 잃기 이전의 정체성이 '분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거울은 그녀 자신을 반영함과 동시에 타인을 따라하려는 과정을 가시화한다. 이후 온전하게 울파에게 몰입한 헨드는 더는 울파와 다른 숏에 위치하지 않는다. 그녀와 공통된 숏에 위치하여 실제 헨드가 어떠하든, 남성을 제압할 수 있는 강인한 여성을 온 감정을 다해 현실에서 수행한다. 고프란과 라흐마와 달리, 대역이 필요하지 않은 울파한테도 배우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테다. 끔찍한 사건을 차마 재현하고 싶지 않은 울파를 보호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여성들보다 더 수동적이었던 이전 세대의 여성들이 따라해 보도록 말이다. 

라흐만과 고프란의 대역도 마찬가지다. 배우들은 에야와 타이시르와 함께 자매들끼리 함께 부르던 아카펠라에 참여한다. 그녀들은 화음을 넣고 함께 웃으며 심지어 똑같은 가사를 동시에 부르는데, 시각적으로는 라흐마와 고프란의 대역/에야와 타이시르가 위치한 숏이 나뉠지언정, 청각으로는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다. 대역은 그렇게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충실한 대체물이 되어가는 것이요, 그들과 대면한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 역시 허구가 아니다. 라흐마와 고프란이 진짜로 돌아온 것만 같은 복합적인 감정, 라흐마가 니캅을 썼을 때 실제 딸에게 잘못을 한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반응 등이 그렇다.    

  

즉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로서 가부장제에 의해 검열된 진실을 기록한다. 현실에서 남자들이 모욕적인 단어들로 여성을 규정했다면, 이에 반발하여 남성들의 입을 부드럽게 교정하려던 울파의 시도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본 작품은 픽션이 아니다. 그래서 남성으로 인해 현실에 음식이 없었고 자매들이 풍족한 척 상상해야 했다면, 그 현장을 기록하는 것도 의무다. 픽션이라면 ISIS에 합류한 라흐마와 고프란의 서사를 수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큐멘터리는 그 사실을 왜곡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여성 혐오를 축약하더라도, 라흐마와 고프란이 부재한 숏들은 언급되어야 하고, 심지어 보기 괴롭더라도 구체화되어야 한다. 울파가 큰 딸들에게 가한 폭력도 그렇다. 헨드가 울파를 막 모방할 때는 비교적 긍정적인 것만 따라했지만, 다큐멘터리이기에 원하는 것만 취합해서 재현하거나 기록할 순 없다. 고스족 의상을 즐겨 입던 고프란을 죽일 듯이 때려잡던 울파, 이후 고프란이 이슬람 원리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죽음 체험을 하거나, 신실하지 못한 제 몸을 채찍질하였다. 그 여파가 라흐마한테로 내려갔다. 이렇게 고프란과 라흐마는 여성이 자유를 추구하면, 자신들보다 강자인 보호자나 남성에 의해 처벌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고프란과 라흐마는 히잡, 것도 온 몸을 칭칭 감는 니캅을 입으며 남성들이 원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띠었고, 심지어 ISIS에도 합류한 것이다. 엄마보다 강한 이들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카우타르는 라흐마와 고프란의 부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기에, 그 현재를 이루는 과거를 차마 축약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담아내는 것은 과거와 결별하고 현재로 도약하고자 반성하는 울파의 모습이다. 또한 울파의 대역은 있지만, 에야와 타이시르의 대역은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울파의 긍정적인 모습을 따라해야 할 여성은 있지만, 에야와 타이시르 세대의 여성들은 주체적인 원형을 굳이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 현재의 여성들은 충분히 각성하고 있기에 그녀들의 대역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곧 남성이 더럽힌 탁한 거울이 비추지 않던 것이자, 카우타르가 현실에 비추고자 하는 거울이다. 즉 카우타르는 다큐멘터리의 역할이 현실의 거울로서 엄정한 재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거울이 현실을 역으로 비출 수 있다는 기능에 주목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은폐된 정의로운 사실들을 거울 속에 열심히 수집한다. 진실과 비전, 그것이 카우타르가 생각하는 거울의 역할이며, 또한 여성이 나아가야 할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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