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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07. 2024

마테오 가로네, <이오 카피타노>

'다정함'이라는 꿈

마테오 가로네(Matteo Garrone), <이오 카피타노>(Io capitano) 

- '다정함'이라는 꿈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 위치한 세네갈은 인접한 이웃 국가들에 비해 경제 사정이 꽤 괜찮은 실정이다. 그러나 거시적인 수치 너머, 실제 세네갈 국민들은 빈부 격차와 청년 실업에 허덕이며 절망을 체감하고 있다. 준비된 청년들에겐 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애초에 열악한 교육 제도로 경쟁력을 갖춘 청년들을 많이 양성하지도 못한다. 또한 빈부 격차로 인해 세네갈의 청년들은 청소년기부터 교육을 포기하고 일용직 취업을 선택하는 사례가 많기에, 이로써 향후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일말의 기회조차 놓친다. 이 두 문제가 세네갈의 괜찮아 보이는 경제 수준에도 불구하고 '난민'을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청년들은 세네갈의 전망을 어둡게 여겨 '유럽 드림'을 꾼다. 좀 더 괜찮은 일자리와 기회가 지중해만 넘으면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낙관에 빠져 사하라 사막과 지중해에서 헛되게 목숨을 잃은 난민들의 숫자가 처참하리만큼 많다. 심지어 이들의 존재는 쉽게 잊히곤 하는데, 마테오 가로네는 신작 <이오 카피타노>에서 바로 이 세네갈 난민의 삶을 추적 및 기록한다.      


1968년 로마 태생의 마테오 가로네는 파올로 소렌티노와 함께 칸 영화제가 사랑하는 21세기 이탈리아 시네아스트다. 이 둘은 굵직굵직한 국제 영화제의 사랑을 받고 동시대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얼굴이지만, 작가로서 정체성은 서로 아주 판이하다. 소렌티노가 '페데리코 펠리니'를 계승하며 거룩한 형식과 웅장한 운동을 스크린에 선보인다면, 가로네는 거칠고 황량한 '네오리얼리즘' 전통을 이어받아 스크린에 현실을 매개한다. 설령 <테일 오브 테일즈>나 <피노키오>처럼 판타지 장르로 선회한다 한들,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환상적인 우화를 펼쳐보이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아나크로니즘과 마술적 리얼리즘을 계승한다. 또 소렌티노의 영화 배경이 이탈리아의 경제·정치적 중심지인 '북부'라면, 가로네는 낙후된 '남부' 이탈리아에서 황량한 현실, 주로 '마피아' 문제를 꼬집는다. 

가로네는 보통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날 것의 초상과 풍경을 재현한다. 가로네는 남부 이탈리아의 열악한 치안이 왜 개선되지 못하는지 분석하는데, 그 이유가 '폭력을 두둔하는 가부장제'와 현실을 외면하고 '가상'으로 도피하는 태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를 탐구하는 작품으론 <고모라>와 <도그맨>이 대표적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마피아들은 정치권을 장악한다. 그래서 폭력이 사회 전반에 만연되다 못해 '합법화'되었고, 인간의 관계는 강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예속하는 것이 ‘정상’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아이들, 특히 소년들은 성인 남성의 폭력성을 선망하고, 이에 약자는 끝없이 가난하고 소수의 강자는 한도 끝도 없이 부유해지며 사회 전반의 빈곤이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통제되지 않은 폭력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손쉽게 불러오기에 마피아가 장악한 땅은 늘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전망이 어둡다. 

이로써 삶이 비참한 시민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아름다운 가상으로 눈을 돌리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우민화 정책'을 꼬집는 것이다. 가로네는 <고모라>에서 환락을 제공하는 텔레비전, <리얼리티: 꿈의 미로>에서 '스타' 선망을 부추기는 프로그램 등 현실유리적인 대중문화를 탐구하며, 실질적인 문제나 정치를 둔감하게 만드는 우민화 정책을 해부한다. 일상은 점점 더 피로 얼룩져가고 빈부격차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는데, 국민들이 쳐다보는 대상은 허위의 부와 명예를 약속한다. 이렇게 부조리가 합법화된 구조 내에서 개인이 구원을 찾기 위해선 <도그맨>처럼 '불법'을 저질러야 한다. 개와 인간의 주종관계가 인간과 인간 사이로 확장된 사회에서 주인인 마피아를 살해해야지만 인간은 정의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가로네가 <도그맨>에서 빌려오는 '그리스도 도상'처럼 몸소 죄를 짊어져야지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암담함이 부각된다.      


늘 남부 이탈리아를 비추던 가로네가 처음으로 자국을 떠나 아프리카 전역을 누비며 촬영한 작품이 신작 <이오 카피타노>다. 하지만 대륙은 달라져도 그가 이탈리아에서 비추던 피사체는 유사하게 이어지는데, 먼저 <리얼리티: 꿈의 미로>처럼 ‘꿈’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다. 도입부, 영화의 주인공 세이두는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도 당최 일어나지 않는다. 옆에서 쫑알쫑알 수다를 떨며 노는 동생들에게 수면을 방해하지 말라며 타박한다. 즉 동생들은 깨어 있는 것이 즐거운 반면, 세이두는 잠들어 꿈꾸고 싶다. 이유는 동생들은 깨어서도 현실의 무거운 책임 대신 놀이, 곧 꿈에 속할 수 있는 반면, 세이두는 일어난 이상 옷을 입고 일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척박하고도 거친 세네갈의 현실을 세이두는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세이두는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서 이제 곧 성인이 될 남자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네갈은 남성은 일을 해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반면, 여자는 안주인으로서 가정을 관리하고 가장들이 좋아할 모습으로 용모를 가꾸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회 형태를 보이고 있기에, 이러한 현실에서 소년의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의 무게는 심히 육중할법하다. 실제로도 세이두가 유럽으로 떠나려는 이유는 개인적인 성공도 있지만, 가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은 꿈꾼다. 그가 꾸는 꿈은 현실의 '결핍'이나 '불안'에서 출발한다. 작곡에 소질이 있는 세이두는 가수로서 이탈리아에서 유명세를 얻어 백인들에게 싸인을 해주는 미래를 선망한다. 세네갈에서의 춤과 노래는 기껏해야 밤의 유희, 축제에 그치지 결코 경제적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 반면 세이두와 무사가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유럽에선 문화가 돈이 된다. 외의 꿈들도 모두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발생한다. 사하라 사막에서 세이두는 뒤처져서 도움을 요청하는 중년 여성의 절박한 애원을 끝끝내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이두는 자신의 비인간적인 결정이 영 마음에 걸린다. 또 사하라 사막의 끝없는 모래는 사람들의 발을 무겁게 붙잡아 주저앉게 만들며, 난민을 급습한 경찰 역시 땅에 밀착하라고 한다. 이렇게 사하라 사막에서는 ‘엎드리는’ 행위가 일반적인데, 그것이 불만족스러운 세이두는 중년 여성이 살아나고 '비행'하는 꿈을 꾼다. 이후 리비아 마피아들의 인질이 되어 감옥에 붙잡힌 소년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엄마에게의 짧은 안부 연락마저 어림없다. 그녀가 걱정할까봐, 또 막대한 몸값을 부담하게 될까봐 입을 꾹 다문다. 그래서 천사에게 부탁해 엄마에게 자신의 안부를 꾸며서 전하는 꿈을 꾼다. 여기서 가로네는 중년 여성, 엄마와 만나는 꿈은 프레임에 펼치는 반면, 세이두와 무사가 스마트폰에서 접하는 '좁다란 꿈'은 감상자에게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볼 필요가 없다는 듯, 또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할 거라는 듯, 즉 소년들은 봐봤자 아무 소용없는 헛된 '망상'에 빠져있다. 

하지만 망상이 아무리 헛되고 터무니없어도 이들은 빠져들 수밖에 없다. 망상의 낙관은 너무나 달콤하다. 가로네는 이를 '대립적인 리버스 숏'으로써 가시화한다. 본래 세이두와 엄마는 대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두가 유럽에 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엄마는 극도로 반대하며 분개한다. 세이두는 유럽을 향한 낙관적인 희망에 부풀어있는 반면, 엄마는 유럽에 가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가 사하라 사막과 지중해에 잠겨 잊힌 무수한 난민들의 실태를 알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세이두의 정면에서 극렬히 대립한다. 세이두의 주장을 '컷'하며 잘라내고, 이에 반하는 자신의 얼굴을 이어낸다. 세이두와 무사가 찾아가는 '브로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또한 유럽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냐고, 너희들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요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세이두는 그 직후 무사의 얼굴을 본다. 무사는 자신들이 충분히 유럽으로 갈 수 있다고, 거기서 부와 인기를 누릴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한다. 이처럼 무사는 세이두의 망상과 대립하지 않는다. 무사가 속한 숏에 세이두가, 세이두가 속한 숏에 무사가 섞여든다. 즉 리버스 숏으로서 진실은 내 앞에서 욕망을 가로막고 저지하지만, 공동의 프레임에 뒤섞이는 망상은 나의 낙관을 휘감으며 지지한다.  


무사와 세이두는 끝끝내 유럽으로의 여정을 택한다. 세네갈→말리→사하라 사막→리비아→지중해를 거치는 여정 속에서 가로네는 <도그맨>의 ‘주종관계’가 전 세계를 잠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난민들의 유약함을 이용하는 강자들이 어떤 이득을 누리는지 폭로한다. 세이두와 무사는 어떻게든 자국을 탈출하고 싶은 절박한 처지에 더해, 아직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이다. 온전한 일자리를 가질 수 없고, 떳떳하게 주체적일 수 없는 청소년이라는 연령이 자립 및 성공이라는 꿈을 추동했지만, 이러한 목적에 다가가기에 그들의 진실은 유약하다. 여성과의 교제를 선망하던 소년들은 이제 항문에 돈이 강제 삽입되는, 더욱이 고문당하며 육체가 유린되는 현실과 맞닥뜨린다. 신체도 그렇거니와 정신도 온전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당장 브로커가 좋은 차와 배를 지녔다며, 유럽으로의 여정에 자신이 있다는 '사진'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현실과 과연 일치할지 의심조차 않는다. 약자들은 여권을 위조하고, 법을 집행하며, 감금과 해방을 결정하는 브로커, 군인, 마피아 등에게 가혹하게 착취당한다. 100달러, 50달러에서 출발한 뇌물은 800달러로 불어나기에 이르며, 돈을 뜯는 주인들은 종들에게 꿈의 실현을 약속하지만, 정작 자신의 배만 채우고 그들의 꿈을 영영 유예한다. 심지어 세이두에게 위험한 항해를 시켜 책임을 떠넘긴다. 이렇게 종들의 현실은 불만족과 결여로 공허해지고, 주인들은 이들을 지배하거나 허황한 꿈을 팔아먹으며 착취한다.

본래 세네갈에서 소년들은 사실과 대립했다. 허상을 믿는 자신들이 진실을 인지한 현명한 사람들과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소년들은 자신들이 진실이 되어, 거짓말하는 주인들과 대립적인 리버스 숏으로 직면한다. 세이두와 무사는 세네갈인이다. 하지만 여권을 위조하는 브로커들은 이들에게 '말라', '밤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말리인으로 신분을 위장한다. 여전히 세네갈인이고 싶지만, 소년들은 어쩔 수 없이 거짓과 타협한다. 뇌물만 내면 안전을 보장한다는 부패한 군인이나 경찰, 세이두에게 항해가 결코 어렵지 않다고 떠미는 브로커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은 듣기만 하면, 또 실상을 접하기 전까진 꽤 달콤하다. 가로네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세이두와 말리가 집을 떠나 버스에 탑승했을 때 마음을 들뜨고도 벅차오르게 만드는 '로드 무비' 장르로 선회하고, 사하라 사막에서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연상케 하는 짜릿한 익스트림 롱숏 촬영이, 지중해에서는 청량하고도 광활한 바다를 경이롭게 수놓은 하이앵글 구도의 익스트림 롱숏이 인상적이다. 난민 영화로서 어울리지 않는,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싶은 불편함을 자극하는 이미지들, 가로네는 당연히 난민들의 탈출 현장을 미화하려고 이런 숏을 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로네는 여정을 목가적이고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숏들 이후에 필히 '클로즈업'하여 가까이 다가가 모래바람을 맞는 소년들, 트럭에서 떨어져 사망하게 될 난민들, 사하라 사막의 무수한 주검과 끝끝내 사망한 중년 여인, 고문실, 생지옥과 같은 배 안의 실상을 생생히 비춘다.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땐 아름답고도 평화로워 보인다. 내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하지 않는 힘은 동공을 즐겁게 해주는 스펙타클이자 숭고일 뿐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치열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소년들이 알지 못하는 진실, 난민의 여정을 안온하게 축소하는 비인간적인 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꿔야 하는가. 불가능함을 열망하는 종들의 꿈은 주인의 착취에 보탬이 된다. 바로 이 주인에게 반항할 수 있는 꿈이 있나니, 주인에 의해서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된 꿈'을 꾸고 끝끝내 실현할 때다. 브로커들은 귀찮은 난민들이 탈락할수록, 더 나약해질수록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 난민의 수가 줄어들수록 주인의 책임은 줄어들고, 그들이 나약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뇌물을 뜯어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인들은 종들을 결코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냉담한 ‘비인간성’이 그들의 힘이다. 이런 와중에 소년은 ‘인간성’을 꿈꾼다. 본래 소년의 꿈은 백인에게 싸인을 해주는 것, 즉 그들 위에 군림하길 바랐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중년 여인에게 돌아가는 꿈, 리비아 감옥에선 작별인사를 못하고 온 어머니에게 생존 신고하는 꿈을 꾼다. 이러한 꿈은 소년이 백인을 선망하게 한 스마트폰에 내재한 환상과 달리, 1.88:1 화면비를 가득 채우며 감상자에게 객관적으로 널리 보이는데, 부조리한 꿈과 달리 실현되어서 마땅히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여야 하는 꿈이 바로 '다정함'이다. 이 다정함은 단순히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몸소 소년에 의해 실현된다. 세이두가 리비아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곁을 중년 남성이 항상 동행한다. 그는 소년을 제 아들처럼 생각하여 물을 건네고, 이후 탈출 기회가 생기자 함께 데리고 나간다. 마침내 소년에게 함께 이탈리아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세이두는 무사를 찾아야 한다며, 제 이익을 단념하고 사촌을 위한다. 이후 세네갈 난민촌에서 무상 숙식을 제공받고 일을 하며 지내다 겨우 무사와 재회한다. 그런데 무사는 탈출 과정 중 다리에 총을 맞았나니, 세이두는 이런 그에게 기꺼이 치료비용을 대준다. 여기서 다정함은 자신에게 손해다. 제게 더 좋은 일은 중년 남성 혼자 탈출하거나, 세이두가 무사를 찾지 않고 이탈리아로 가는 선택이다. 그러나 다정함을 포기하지 않나니, 쫄쫄 굶고 돈도 없던 세이두는 그나마 번듯하게 일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유약한 상태를 극복하고, 마찬가지로 무사도 위기에서 벗어나 거동이 원활한 상태가 된다.

착취를 당하는 현실에선 당연하게 보복 심리가 발동하고, 또 이젠 내가 누군가를 착취하고 싶은 보상 심리도 자극된다. 그러나 착취의 악순환을 억제하고 친절함을 발휘할 때, 약자는 주인에게 탈출해 종의 상태를 벗어나 진정 자유로워지며, 주인들에게 벌벌 떨어야 하는 스트레스 가득한 심리도 말끔하게 해소된다. 영화의 제목에 사용되었고, 결말에선 세이두가 자신을 당당하게 칭하는 단어 '선장', 타인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친절함으로 자라났고, 이를 베풀 줄 알게 된 소년 세이두는 제 삶과 타인의 삶 또한 이끄는 ‘주체적인’ 선장이 된다. 본래의 주인이라면 배에서 위기를 초래하는 병자, 임산부, 노약자들을 착취하거나 탈락시켰겠지만, 다정함을 베풀 줄 아는 지도자는 이들과 어떻게든 자원을 나눈다. 세이두의 다정함으로 지하실에서 죽어가던 병자들은 갑판 위로 ‘상승’한다. 이로써 서구의 도움 없이 모두 다 당당하게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주인에 의해 옮겨지지 않고,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설정하며 개척하는 주체성을 난민들은 다정함으로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     


즉 가로네는 말한다. 주인들은 종에게 헛된 꿈을 불어넣는다. 종 역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꿈, 그 실체는 주종관계를 강화하고 착취를 용이하게 만드는 유혹의 덫이다. 그래서 진정 꿔야 하는 꿈은 착취가 아니라 상호 다정함, 그것이 실현될 때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주인에게 빼앗긴 종의 주체성이다. 시의적으로 유의미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 하지만 주제 의식이 영화를 압도한다. 이 말은 영화가 영화답지 못했다는 것, 연출에서의 강점이 거의 없었다는 의미다. 아프리카 난민들이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유사한 과정을 담아낸 작품 <지중해>가 2015년 공개됐었는데, 그 작품에 존재하는 강점이 <이오 카피타노>에 부재한다. 가로네가 대중성과 타협하며 리얼리스트답지 않게 사실을 뭉툭하고 낙관적으로 처리하고, 몇몇 숏들을 지나치게 심미적으로 다뤘다면, <지중해>는 현실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연출을 고민하며 난민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난민 문제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분명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로서 가로네와 영화로서 본 작품이 포기하고 잃어버린 것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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