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하고도 용감하게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필연적으로 공간에 속하고, 또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다만 오래 전 인류가 속한 공간이 자연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사회적 테크놀로지'로서 건축이 공간을 구성한다. 우리를 낳은 자연은 인간 본성에 부합하지만, 오늘날의 공간은 본성 이상의 특정한 사회성을 형성하고,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그래서 공간에 가만히 머물게 된다면, 공간이 개인을 구성하는 수준을 넘어서, 공간이 개인을 “대신 말한다.”(폴 B 프레시아도) 이렇게 공간에 종속되어 자아를 잃지 않으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여행을 떠나 공간을 선별하며 인간 스스로 '사회 속에서 원하는 나'를 선택할 때 인간은 좀 더 자유롭다.(기 드보르) 그리고 토마스 살바도르는 신작 <산이 부른다>에서 공간을 재구성하는 여행의 참맛을 순수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1973년 파리 태생의 토마스 살바도르는 프랑스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그는 2014년 <빈센트>로 장편 데뷔하며 ‘자크 타티’스러운 슬랩스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고 무성영화를 예찬하였다. 그는 왜 무성영화 이미지를 부활시키는가? <빈센트>의 주인공이자 살바도르가 직접 연기하는 빈센트에게 작품 속 누구에게나 동일한 '초록' 유니폼이 입혀진다. 분명 녹색은 긍정적인 색채지만, 영화에선 그 색채가 각각의 개성을 말소하고 전체를 하나로 통일한다. 이때 빈센트는 주저앉는데,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한들 자유보다 더 좋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이후 사복으로 환복하며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 호수에 가 ‘맨살’을 노출한 채로 수영을 즐긴다. 유니폼을 입은 당시의 카메라가 가만히 멈춰있었다면, 여행을 떠난 그는 아주 역동적인 카메라로 담긴다. 개인임을 회복할 때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때 ‘대사’도 줄어들며 무성영화 이미지의 명분이 서서히 드러난다. 유니폼은 직무와 관련되고, 여행지에서도 일자리를 구해야 방세를 낼 수 있다. 이때 언어는 노동, 지불 등에 봉사하는 자본주의라는 사상의 대리인이 되어 그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러다가 대사는 줄어들고, 일 대신 ‘무목적한 유희’를 즐길 때, 노동자가 아닌 '초능력자'로서 빈센트가 깨어난다. 대사에 붙잡히지 않는 영화의 이미지 또한 박진감 넘치는 촬영, 빈센트의 순수한 액션, 편집을 이용한 트릭 등 다른 무언가에 봉사하지 않는 영화 고유의 본질로 가득하다. 즉 살바도르는 대사에 붙잡힌 유성영화를 자본주의적 언어에 복속된 현대인에 상응시키고, 이로부터 ‘액체적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영화 외의 요소에 덜 지배받는, 그야말로 ‘영화 본원적인 자유’가 보존된 초기 영화를 숭배한다. 인간에게 노동을 요구하며 딱딱하게 제한하는 대지와 시시각각 물살을 일으키며 변형하는 호수, 강, 운하, 바다의 공간성을 대비하며, 후자를 무성영화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회복되는 장소로 본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호수로 향할 수만은 없는데, 그래서 공간 내의 ‘사랑의 언어’를 촉구한다. 상대방에게 노동자와 같은 특정 객체를 요구하지 않는, 그저 이름만 지긋이 부르고 있는 그대로의 육신을 긍정하는 사랑의 언어를 서로 구사할 때, 우린 대지와 도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빈센트>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망망대해를 넘어 숲이 울창한 퀘벡으로 향한다. 그렇게 호수에서 바다로, 숲과 산이 자리한 새로운 대륙으로 나아간 빈센트, 비록 이름은 빈센트에서 ‘피에르’로, 퀘벡의 산림은 ‘알프스’로 바뀌지만, 분명 <빈센트>와 느슨하게 이어지는 시퀄, <산이 부른다>로 살바도르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기 이전 피에르는 공간에 붙잡혀 있다. 도입부, '철제' 가구로 가득 찬 '부엌'에 피에르가 놓여있다. 딱딱하고 견고한 철제 가구는 피에르가 어딘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완고하게 가로막는다. 물론 갑갑한 부엌에 '창문'이, 즉 출구나 통로가 있긴 하다. 하지만 창문은 프레임 바깥으로 잘려나간다. 그래서 프레임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출구가 사실상 없다.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무수한 '사물'이 들어차있다. 공간이 인간 사회를 위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듯, 사물 역시 인간의 편의를 위해 '특정한 목적'을 부여받은 도구다. 피에르는 여러 사물 중 '커피 머신'과 '컵'을 이용해 음료를 마신다. 피에르의 행동은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가득 찬 특정한 목적을 갖춘 사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후 피에르는 바깥으로 나간다. 출구는 있었다. 하지만 야외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들이 빽빽하게 그를 에워싼다. 사회적 목적을 갖춘 건물은 숲을 이루며, 더 견고한 사회적 기능을 형성하는 ‘도시’를 구성한다. 이에 인간은 야외로 나와도 사회를 위한 목적에 붙잡히며 자유를 실현하기 어렵다. 이후 그는 신제품 시연을 위해 '회의장'에 간다. 피에르는 물건을 집어서 옮기는, 즉 ‘다른 누군가의 이동을 결정하는 사물’을 시연한다. 빽빽한 공간에 위치한 특정 목적을 갖춘 사물은 인간의 발걸음까지도 통제한다.
즉 공간과 사물이 인간을 규정한다. 부엌에서 피에르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 회의장의 신제품은 피에르를 '발표자'로, 의자는 사람들을 '청중'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공간과 사물에 의해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렇게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서로만을 잘 안다. 공간과 사물이 규정한 서로에 대한 '앎'이 영화의 '삼중 구속'을 이루며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피에르가 회의장으로 이동하는 기차 시퀀스가 대표적으로, '직원 대 직원'으로서 서로를 딱딱하게 대한다. 대화는 상대의 역할, 목적, 기대에만 맞춰 아주 지루하고 단조롭다. 이 같은 갑갑한 회사 생활에 단단히 질린 피에르는 모든 것이 널따랗고도 광대하게 뻥 뚫려있는 산으로 향하며 회사를 실망시키는데, 삼중 구속으로 형성된 ‘직장인으로서 피에르’를 기대하는 형 마크에 의해 그는 다시 붙잡힐 위험에 처한다.
살바도르는 이를 연출로 반영한다. 정해진 장소, 규정된 목적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공간과 사물처럼, 카메라 역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공간과 사물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행동은 극히 제한되어 뻔하게 예측 가능하기에,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이다. 카메라의 이동 또한 삼중 구속의 목적이 좌우한다.
부동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나니, 그래서 인간은 고정된 장소에서 몸을 일으켜 여행을 떠나 자유를 되찾고자 한다. 특정한 목적에 얽매인 항구적인 관계는 불연속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피에르는 열려있고, 또 관계가 특정 형태로 고정되지 않는 산으로 향한다. 실내, 도시를 촬영하던 영화의 카메라는 매우 '수평적'이었다. 사방이 막혀 있었고 출구는 부재했기에, 저 너머로 향하는 수직적인 촬영은 불필요했다. 2차원적인 구도,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의 수평적인 패닝 등은 시각도 제한하였다. 그러나 피에르는 평평하고 얕게 펼쳐진 얄팍한 시각에 만족하지 못한다. 선택할만한 것이 뻔해서 지겹다. 그래서 피에르는 편평한 세계 속에서 '수직적인 출구'를 만든다. 스마트폰, 액자, 창문 등에 담긴 자연을 감상하며, 더 깊은 곳에서 색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길 희망한다. 이후 실제로 트래킹을 가는 피에르를 카메라는 수직적인 '달리 숏', '트래블링 숏'으로 포착한다. 또 '핸드 헬드'를 동반한다. 구체적으로 규정된 목적으로부터 결코 흔들림 없던 공간과 사물에서 탈피한 인간의 운동은 이토록 생동감이 넘친다.
즉 자유란 움직임의 회복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자유는 수평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수직적인, 곧 깊고 입체적인 움직임이어야 할까? 그 이유는 진정 자유로울 때, 인간의 꽃피울 수 있는 무수한 잠재력이 ‘깊은 곳’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평평한 공간에 가득한 사물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은 극히 제한된다. 특정한 목적을 갖춘 폐쇄적인 공간과 사물에 따라, 인간 또한 단 하나의 특정한 모습만 허용된다. 그것을 외관에 내비쳐 승인받아야 하니 깊고 깊은 내면이나 영혼 등은 중요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자연은 탁 트여 있다. 도시와 달리 산은 '익스트림 롱숏'에 담기고, 그 롱숏을 구성하는 무수한 피사체들 또한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는 사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적을 몸소 선택할 수 있는 '자연물'이어서 그것과 관계 맺는 인간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다. 그 얼굴을 선택하기 위해서 스스로 긴 시간을 들여 사유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깊은 곳에 내재한 여러 가지 얼굴을 꺼내온다는 점에서 자유의 운동은 수직적이다.
더욱이 자연은 개방적임과 동시에 단단한 장애물들로 가득하다. 폐쇄적이면서 장애물로 가득한 도시와 달리, 자연은 장애물만 극복한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피에르는 높다란 산에 오르기 위해서 '중력' 및 단단한 바위, 크레바스 등의 한계와 맞닥뜨린다. 그러나 어떻게든 암벽 등반하고야 마는 피에르는 이내 곧 한계를 뛰어넘어 저 위로 나아가고, 그 과정이 수직적인 워킹으로 포착된다. 그래서 한계를 뛰어넘어 저 위로 상승하는 자유 또한 수직적인 운동이어야 한다.
그렇게 수직적으로 나아가 지금껏 본적 없는 진풍경과 마주하나니,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자연의 특성이란 바로 '예측 불가능'인 것이다. 뻔하디 뻔한 사물이 주어져있다면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할지 불 보듯 뻔하지만,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산발적으로 흩어진 자연에서 피에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어떤 행동을 할지는 미지수다. 그것이 영화의 편집을 좌우한다. 도시에서 영화의 편집은 비교적 전형적이었다. "피에르가 커피를 다 마시고, 또 발표를 다 마쳐야 숏 하나가 끝이 나겠지, 대략 그 끝나는 지점은 커피를 마시는 속도나 회의 내용에 따라 어느 정도가 소요되겠지", 이러한 식으로 대략적인 편집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에서 피에르가 내릴 선택을 속단할 수 없으니, 편집의 갈피를 도무지 종잡기 어렵다. 평범하고 정형화된 사물로써 행동하지 않으니 그 행동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더욱이 우연한 자연의 산물인 '바람'이나 '눈보라' 등이 침입하여 예측에 훼방을 놓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자연으로 간 이후 영화의 편집은 불안정하다.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난 피에르는 편집까지도 뒤바꾸며 도시의 전형적인 '시간'에서도 해방된다.
피에르는 '언어'라는 족쇄까지도 깨부순다. 공간과 장소가 인물의 '신분'과 관계를 규정한 것에 더해, 그들의 입에서 발화되는 언어 또한 규정했다. 그가 속한 직장에서 만드는 사물에 따라, 피에르의 '대사'가 사실상 결정되었다. 언어는 공간이나 사물을 가리키고 재현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하지만 자연에서 피에르는 무수한 가능성 중 '부정적인 가능성'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가능성'만 남기기 위해서, 부정적인 가능성을 가리키고 제거해가는 용도로만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크레바스가 어디 있는지, 바위가 어디서 얼마만큼 떨어지는지, 기후가 어떠한지 등 부정적인 것들만 언어는 구체적으로 가리켜 모호함을 날려버리고, 긍정적인 가능성에는 굳이 언어를 덧붙이지 않는다. 긍정적인 가능성을 구체적인 하나로 구획 짓지 않으며, 무수하게 찾아올 여지를 남겨둔다. 그래서 피에르는 '거짓말'한다. 그는 지금 여기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할 수도 있는 상황을 구술하거나, 그 가능성을 위해 말을 꾸민다. 언어가 현실을 가리키지 않고, 현실 너머의 미래를 잠재하거나, 또 현실과 불일치할 때 구체적인 언어에 붙잡힌 인류 또한 두둥실 떠다닌다.
이렇게 언어에서 해방되니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변한다. 영화의 이미지에 대사나 자막이 동반되면, 프레임이 품고 있는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구체적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는 이미지를 가리키는 말이 거짓말이고, 또 이미지에 구체적인 말이 얹히지 않는다. 그래서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널따란 풍경에서 감상자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당최 모호하다. 차갑고 새하얀 '설경'인가, 아니면 단단하고 날카로워 인간의 육체를 산산조각 내어버릴 '바위산'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젠 산에도 만족 못할 인류가 저 너머로 나아가게 될 '하늘이자 우주'일까? 무수한 가능성 중 무언가를 섣불리 선택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열려있기에 자유롭게 감상하면 된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무언극'의 이미지는 청각이나 텍스트로 전환되지 않음에 이미지 자체가 시각적인 함의를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어떤 한계에도 저당 잡히지 않는 희망, 미래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블로흐가 말하는 무언극 이미지의 ‘유연함’과 ‘순수함’처럼, 본 작품의 무성영화 이미지 또한 '그 자신'으로서 순일하고 자유로우며, 그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보여준다.
살바도르는 이를 ‘상징’으로도 가시화한다. '용암'으로 말이다. 피에르는 산에 오르다가 기묘하게 일렁이는 '붉은 불빛'을 감지한다. 이후 이를 따라나섰는데,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움직이는 용암'이다. 용암은 도시에 둘러싸인 인간처럼 지금껏 단단한 대지 속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틈에서 빠져나와 지상을 활보한다. 산 정상으로 향하는 피에르처럼 말이다. 용암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움직일 때 반짝거린다. 만약 피에르가 그에게 '불빛'을 쏘아서, 피에르가 보고 싶은 용암으로 전락한달지, 아니면 그와 관계를 맺게 될 시 더는 번쩍이지 않고 ‘평범한 돌맹이’로 퇴화한다. 인간 또한 그렇다. 그 자신으로 순수하게 말하고 자유로울 때 피에르의 눈동자는 반짝이는 반면, 관계나 공간에 둘러싸일 때 그의 눈동자는 '동태눈'으로 차게 식는다. 더해서 용암 외의 자연의 존재인 '사슴'이 산에도 위치하고, 또 도시로 내려오며 장소 속에서 자신을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것처럼, 피에르 또한 여기저기에 머물 수 있는 포용력과 잠재력을 실현할 때, 자신의 몸에 용암을 흡수하는 '용암 인간'으로서 더 거대한 잠재력을 꽃피운다. 즉 다양한 곳을 선택할 수 있어야 잠재력도 해방된다. 단 하나의 목적만 부여받은 사물 또한 마찬가지로, 피에르의 손에서 글씨만 끄적이던 '사슴 볼펜'이 그의 손을 떠나 사슴 볼펜의 ‘디자인’을 흥미로워하는 소녀의 손으로 가게 되었을 때, 분명 사슴 볼펜은 피에르가 규정한 목적을 뛰어넘어 재설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살바도르는 마냥 맹목적으로 이동을 예찬하진 않는다. 특히 자연으로의 이동은 능동적이지만 실제로는 수동적일 수 있기에 착각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영화 속 자연은 무시무시하다. 감상자는 실제 설경에서 유리되어있었기에, 거대한 설산이 내뿜는 위압적인 에너지를 그저 미적으로 관조하며 '숭고'하게 즐길 수 있다. 만약 그 현장에 있었노라면 인간의 유약한 신체를 박살내는 그 에너지에 공포를 느끼거나 심지어 '잠식'되었을 수도 있다. 살바도르는 광대한 대자연의 바로 그 잠식을 경고한다. 지금까지 피에르는 중력이라는 장애물을 '거슬러' 저 위로 향해갔고, 또 크레바스를 '뛰어 넘었다.' 그런데 움직이는 용암에 매혹된 이후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중력이 자신을 부르는 '지하'로 내려가고, 또 크레바스 밑으로 자처해서 빠진다. 즉 자신도 모르는 새에 대자연의 거대한 에너지에 매혹되어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동화된다. 피에르의 여정뿐 아니라, 살바도르가 제시하는 대자연의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다. 거대한 설산에서 일반적인 '눈보라'나 '안개'는 피에르라는 존재를 너무나 손쉽게 가려버리며, 거룩한 대자연을 포착한 익스트림 롱숏은 인간을 모래 알갱이 수준으로 흐려버린다. 또 피에르가 적응할 만하면 산사태나 '화산 활동'을 일으키며 자연의 변덕스러운 변화에 무릎 꿇는다.
살바도르는 자연의 거룩한 에너지에 잠식될 시, 자유롭기 위해 여행을 떠난 인간이 다시금 지배될 것임을, 그 지배의 결과가 '자기 상실'이라고 연출로써 진단한다. 피에르가 어둠이라는 장애를 물리치고 용암을 받아들여 용암 인간이 되었을 때, 피에르의 형체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의 자아 또한 피에르로서 명석했다. 피에르라는 사람은 유지되었고, 거기에 새로운 잠재력이 덧붙여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용암 인간을 넘어서, '빙하' 속으로 빠져 들어가 '액체 인간'이 될 때 상황은 돌변한다. 그는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기는커녕 빙하에 혼합되어, 피에르임을 확인할 수 없는 'X-레이 이미지'로 변환된다. 또 피에르가 액체 인간이 된 직후, 레아와 그녀의 아들이 '비 내리는 호수'에서 유희를 즐기는 숏이 이어진다. 흡사 액체 인간이 된 피에르가 인간이자 자신임을 상실하고, 한갓 '물방울'로 변형될 것이라는 듯 말이다. 그 와중에 레아는 피에르에게 연락하고 그를 그리워하는데, 피에르는 대답이 없다. 액체 인간이 된 그는 더 이상 피에르가 아니기에 답할 수 없다.
즉 인간은 '나 로서' 자유로워야 한다. 내가 지배당하거나, 또 나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변형을 겪게 되는 것은 '비자유'다. 자유를 위한 조건으로 살바도르는 여행을 제시했다. 분명 자유를 구속하는 도시를 탈출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연에 잠식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균형과 정도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도시에도 발 한쪽의 뿌리를 내려놔야 하기에, 인간은 관계가 전면 해제되는 자연과 달리,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 결말에서 피에르가 도시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를 맺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데, 살바도르는 자유로운 관계란 순수한 '사랑'이라고 본다. 상대가 바라지 않는 특정 목적을 투영하는 관계는 자유를 박탈한다. 이는 나를 위해서 상대를 희생하는 일방적인 욕망의 관계다. 그런데 사랑은 다르다. 레아가 피에르에게 보여주는 태도로서, 피에르가 산에서 조난을 당하지 않게끔 신발끈을 단단히 조이는 법을 알려주고, 음식을 챙겨준다. 레아는 자기가 바라는 특정 피에르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피에르가 유지되었으면 싶다. 이후 피에르가 실종되었을 땐 그를 찾아 헤매며, 액체로 변하기 직전의 피에르를 구조하고, 용암 인간으로 변한 피에르를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존중하고 보듬는 것, 그것이 상호 자유로운 관계, 사랑이다.
물론 그렇게 자유로운 인간의 끝은 죽음이다. 용암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달하여, 즉 자유를 실현하고 '잿덩이'로 차갑게 식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살바도르는 병원에 붙잡혀 '자유 없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병원을 탈출하여 자유를 누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 그렇게 자유롭게 죽는 것을 인간의 사명으로 본다. 그 자유는 지극히 자신으로서 순수해야 하는 것, 스스로에게 순진한 것이기 때문에, 살바도르는 오직 '산악 이미지', '몸의 이미지'만 순박하게 조명하는 기교 없는 연출을 택한다. 작년과 올해 만날 수 있던 두 편의 산악 영화, <여덟 개의 산>과 <산이 부른다>, 둘 다 말하고자 하는 바도 유사하고, 다루는 공간도 유사하지만, 주제의식을 더 효과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론 <산이 부른다>를 택하고 싶다. 청각과 텍스트가 희미한 초기 무성 영화 이미지로, 즉 움직이는 이미지, 시각 매체로서 영화가 자신으로서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로 되돌아가, 해방된 인간의 모습을 환기하는 작품, 중반부부터 살짝 늘어지기에 러닝타임은 다소 아쉬울지언정, 거기에 담긴 순수한 시각의 맛은 슴슴하면서도 아주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