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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2. 2024

코랄리 파르자, <서브스턴스>

지옥행 급행열차의 드레스코드

코랄리 파르자, <서브스턴스> - 지옥행 급행열차의 드레스코드     

일반적으로 고어물은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특정 관객층의 끔찍한 사디스트적인 취향에 일조하며 철저하게 상업 논리를 따르지, 예술이 지향하는 다채로운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직 자극적인 눈요기만 있을 뿐, 사유는 부재한다. 그렇기에 고어물이 영화계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선 끔찍함을 보여주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캐나다의 시네아스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기술, 그것도 도래할 가능성이 높은 첨단 기술에 의해 훼손되고 왜곡되는 육체와 이로 인해 분열되어가는 정신을 고어물로써 비추며 장르의 새 지평을 열어젖혔다. 이러한 크로넨버그의 작업에서 대체로 기술의 해악은 젠더를 구분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라면 모두 다 처할 수 있는 재앙을 고찰했다. 그러나 몇몇 기술은 여성과 남성에게 고르고도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구조의 지배적인 사상이 가부장제라면, 그래서 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여성을 혐오한다면, 기술에 의한 육체 왜곡은 여성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코랄리 파르자의 신작 <서브스턴스>는 크로넨버그를 연상케 하면서도 철저하게 차별화된다.  


1976년 파리 태생의 코랄리 파르자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그간 파르자는 정적이고 사색적이라 일컬어지는 아트하우스 영화와 거리가 있는 장르물을 선호해왓다. 그런데도 작가주의와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지금껏 가부장제의 특권이나 다름없었던 장르물을 여성의 것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부장제를 '무비자' 혜택에 비유한다. 장편 데뷔작 <리벤지>의 공간적 배경은 국적이 불분명한 황량한 사막이다. 그 사막은 어떤 나라로도 둔갑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불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교차하니 말이다. 불어가 되었든 영어가 되었든 등장인물들은 남성 우월적인 표현만 일삼으며, '헬기'나 '지프'를 타고 어디로 이동하든 자유롭다. 즉 가부장제란 어디로 움직여도, 어떤 언어로도 유효한 보편적인 것이다. 남성들은 지리나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가부장제의 큰 수혜를 입는다.

이런 와중 여성은 '갇혀' 있다. 남성이 어디서나 보일 수 있다면, 여성은 남성에 의한 특정 조건 한에서만 보일 수 있다. 그 조건은 '성적 대상화'다. 파르자는 지금껏 여성을 눈요기로만 삼았던 남성 감독들의 메일 게이즈를 모방한다. 여성의 정신성을 반영하는 '발화', 남성의 끔찍함을 증언하는 '비명'은 모조리 제거하고, 오직 남근이 관심 있어 하는 둔부와 음부만 클로즈업한다. 이후 '편집'을 활용하여, 성적 대상화된 여성에게 닥쳐오는 것은 '총을 든 남성', '거짓말'임을 경고한다.

남성 감독들이 비추지 않은 성적 대상화의 부작용을 고발한 이후, 파르자는 ‘성적 대상화를 탈피하는 장르 영화’로 장르를 전환한다. 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를 당하는 여성만이 클로즈업되며 스크린에 존재할 수 있었다면, 코르자의 여성은 자신이 지배하는 제 육체로 스크린에 흔적을 남긴다. 남성에게 강간당한 육체, 그 흔적마저 소멸되어야 했던 육체는 끝끝내 되살아나고, 이후 남성들을 여성에 의한 모습으로 뒤바꾼다. 그 형태는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나신이 아니라 토막 난 고깃덩이, 피투성이 내장, 퉁퉁 불어터진 주검 등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위해 가부장적인 남성은 불필요하거나, 오직 죽음의 형태로만 유의미하다는 것을 과격하게 선언한다. 이번에도 파르자는 마초적인 이념과 여자의 몸의 관계를 탐구한다.  

    

파르자의 카메라는 전작과 이번 작품 모두, 그저 멀리서 남 일인 것처럼 여성의 삶을 지켜보기보단, 마치 그녀들의 눈과 의식이 되어 삶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태도를 고수한다. 그녀들이 서브스턴스 접선장소로 향할 때 사용되는 핸드 헬드와 팔로우 숏은 인물이 걷거나 뛰면서 발생하는 흔들림, 그녀들의 동공과 시야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 같은 카메라에 관객들이 몰입하다보면 자연스레 어떤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리버스 숏'에 의해서 말이다. 남성의 욕망이 좌우하는 엔터산업에서 소위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왕년의 스타 엘리자베스, 그녀가 서브스턴스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수, 양자 모두의 눈앞에 남성들이 떡하니 나타난다. 애초에 그녀들은 본인만의 계획이 있었다. 귀가를 하거나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등 삶의 방향을 그녀들이 설정하고 있었는데 대뜸 그녀들 앞에 예상에 없던 그들이 나타난다. 이로써 편집의 전권을 그들이 그녀들에게서 가로챈다. 대체로 그녀들은 그들을 보기 싫다. 이들은 프레드나 올리버처럼 불청객이거나, 간호사처럼 함정에 빠트리는 존재이며, 심지어 CEO처럼 그녀들의 삶을 구렁텅이에 처박기도 하니 말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녀들에 비해 용모가 단정치 못하다. 담배를 잔뜩 펴서 이는 흉하게 누렇고, 화법도 좋지 못해 쫑알쫑알 떽떽대기만 하며,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들을 불쾌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들을 물리치지 못한다. 그녀들 눈앞에서 그들이 사라질지 말지는 오직 남성이 결정하고, 그들이 사라져줘야만 그녀들은 겨우 숨통이 트인다.

그들은 그녀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고 싶다. 프레드에게 엘리자베스, 올리버와 CEO에게 수처럼 이성으로서 흥미가 있기도 하고, 간호사가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녀들은 그러고 싶든 그러고 싶지 않든, 그들에 의해서 존재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여성들의 시선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녀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어떤 시선 역시 가시화한다. 도입부로 되돌아가서, 일반적으로 인간이라는 피사체와 카메라의 관계는 전자가 더 우월하다. 전자가 자유 의지를 가진 생물이기에, 인간의 목적에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사물이 생물의 자유 의지를 넘어본다는 것은 반역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피사체를 촬영하기 위해 본인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봉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도입의 카메라는 바삐 움직이기는커녕 고정되어 있고, 반면 그 카메라가 형성해놓은 프레임 안으로 서브스턴스 기술을 실험하는 과학자의 손이든,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기념물을 설치하는 노동자들의 육신이든, 피사체가 열심히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야만 피사체는 스크린이라는 세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피사체의 존재를 좌우하는 그 시선은 전지전능해 보인다. 아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이앵글 내지는 버즈 아이 뷰라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 시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후 카메라는 열심히 움직인다. 엘리자베스의 쇼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후 포착되는 수의 쇼에 비해 엘리자베스는 비교적 덜 포착된다거나 불안정하게 포착되는 느낌이 강하다. 어쩌면 카메라가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카메라에 맞추려고 하는데 자꾸만 사물의 기준에 엘리자베스가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현재의 엘리자베스는 늙었고, 그녀가 퇴장하는 복도의 포스터에는 반대로 젊은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카메라와 엘리자베스, 양자 모두 관심 있는 것은 광고물에 담긴 젊은 그녀지 현재의 육신이 아니기에 점점 더 실재 그녀는 소외된다. 엘리자베스뿐만 아니라 수가 오디션을 보기 직전 면접에서 탈락한 여성도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가며 마치 카메라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듯 촬영되었다. 반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이 길게 촬영된다면, 이는 기준에서 벗어난 늙은 여자가 젊음을 선망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때, 대놓고 수에게 폭행을 당할 때다. 이렇게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는 시선은 욕망이라는 이유가 되었든 생식이라는 이유가 되었든, 여성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욕망과 도구로서만 삼는, 또한 가부장제에서 그녀들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남성에게서 출발한다. 그리고 서브스턴스를 열망하는 엘리자베스는 한때 남성의 시선에 들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현재에는 밟히고 더럽혀지며 잊혔다. 그것이 바로 여성의 늙음으로, 비슷한 연배의 남성 CEO가 여전히 기억되는 존재, 심지어 많은 인파가 따르는 존재인 것과 완벽하게 상반된다.      


이는 가부장제가 여성과 남성의 입과 위장을 차별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CEO 간의 미팅에서 그녀는 그와의 대화에 긴장했거나, 아니면 비위가 상한 듯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또한 교통사고 이후 마음이 심란해진 그녀는 술집에 가서 올리브와 술을 먹는 등 음식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그녀는 남성 바텐더에게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요구하는 등 욕망에 솔직해져보려 하지만, 이후 그녀는 자신이 애써 먹은 것을 게워낸다. 수가 탄생한 이후 위축된 그녀는 늙은 자신을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는 프레드와 데이트를 즐겨보려 했다. 그녀가 그를 취해보려고 한 것이다. 프레드보다 지위가 월등하게 높은데도 위축된 그녀는 데이트에 불참하고야 만다.

이유는 그녀는 먹는 사람이 아니라 먹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CEO는 엘리자베스와의 미팅에서 새우 껍질을 흉하게 까고, 심지어 손가락에 소스 범벅이 된 채로 그냥 먹는 것도 아니고, 게걸스럽고도 우악스럽게 처먹는다. 이때 그가 먹는 음식은 코르셋을 꽉꽉 조인 웨이트리스와 편집으로 동일시된다. CEO가 수를 평가할 때도 그는 담배를 태운다. 그녀는 그의 욕망을 위해 만들어지고 불태워져서 향기를 남기며, 정작 그녀 자신은 바람에 실려 사라질 재로 전락한다. 즉 남자가 먹는 사람이고 여자는 요리임이 가부장제에서 구분되며, 늙은 여자를 바라보는 젊은 여성의 광고판은 노파가 더는 요리로서 가치가 없다고 검열한다. 

요리로서 가치가 상실된 그녀들에겐 '요리책'을 줘서 은퇴시킨다. 은퇴한 그녀들에게 이젠 음식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수와 엘리자베스 모두 다 음식을 혐오한다. 그것은 남성의 시선에 들기 위한 연적이거나 경쟁자이기 때문이요, 자신을 살찌우는 음흉한 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에게 요리책을 쥐어주는 이유는 이제 더는 요리가 아니라면 요리사가 되어 맛있는 음식이나 대접하라는 의미일 테다. 즉 남성들의 시선에서 여성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가부장제의 원리에 파묻힌 채로 평생을 살아온 늙은 여성은 수동적으로라도 존재하기 어렵다. 남성의 시선에 들어야만 스크린에 존재할 수 있는 법칙 하에서 그녀는 모든 쓸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다시 존재하길 원한다. 서브스턴스를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결국에는 손을 뻗고야 만다. 더 나은 나를 생성하는 신기술을 포착할 때 영화의 카메라는 마치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는 듯 미리 가있지 못한다. 그녀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듯, 그 기술을 접하는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이어질지 모호하다는 듯 현장에 대기하고 있지 못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형성한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프레임이 대상을 완전하게 불멸시켜준다면, 부잡스럽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는 분명 기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다. 몹시도 흔들리는 대상은 구체성을 잃어버리고 추상화된다. 어쩌면 미래 기술에 답이 있다. 남성의 시선, 그것이 투영된 카메라의 법칙이 지켜온 고루한 전근대적 여성의 존재 양식을 무너뜨릴 바로 그 힘이!

서브스턴스의 아름다움은 전례가 없다. 수가 보는 오디션에서 앞 순번의 여인은 고정된 카메라에 자신의 몸을 끼워야하고, 그마저도 남성이 요구한 틀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기의 미인 엘리자베스로부터 한층 발전된 수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요구하던 미적 기준마저 뒤흔들기에 카메라는 고정, 곧 그간의 기준을 포기하고 그녀를 위아래로 열심히 훑어본다. 그녀가 카메라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그녀에게 봉사하고, 그녀가 카메라의 룰을 만든다. 이후 올리버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국에는 여성을 위아래로 훑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 여전히 여성은 존재한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하나인 것처럼, 고정되어서 여성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카메라와 여성을 열심히 훑는 변태적인 카메라 둘 다 똑같이 하나인 것이다. 결국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피조물'로서 미인만을 송출하는 무대에 나타날 것이 예정되어 있기에 후반부의 카메라는 다시 대기한다. 엘리자베스 기념비를 저 하늘 위에서 포착하는 하이 앵글 구도가 결말에서 반복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남성에 의한 기술은 남성을 위한 법칙을 강화하고, 눈요기로서 여성을 거세게 옥죌 뿐이다.      


파르자는 남성에 의해 코르셋을 차게 된 여성의 육체와 정신의 소유권을 고찰한다. 우리의 육체는 자연스레 나이 들어간다. 그 사실을 우리의 정신도 수긍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유한함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너는 늙어선 안 된다고, 다시 젊어져야 한다며 무시무시한 기구와 괴괴한 약물을 들이민다. 파르자는 기구의 크기와 육체에 막대한 위협을 가할 것만 같은 날카롭고 뾰족뾰족한 조형성, 맹독성 파충류의 색채와 유사한 서브스턴스 약물 등의 이미지를 토대로 외부의 영향이 자신을 지배할 것임을 경고한다. 그 외세는 자아를 둘로 나누고, 둘 중 하나를 직접 조종한다. 현실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코르셋을 차지 않은 자신과 코르셋을 찬 자신으로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르셋을 착용함으로써 영화 속 여성은 가까워진다. 지금까지의 엘리자베스는 멀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기분을 풀 수 없었고, 데이트도 마음대로 즐길 수 없었다. 하지만 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된다. 다시금 탄력을 되찾은 그녀의 둔부나 가슴이 말이다. 이때 그녀는 마치 흥분하여 애무하는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강하게 움켜쥐듯, 젊음을 되찾은 자신의 육체를 감격에 겨워 부여잡는다. 수는 엘리자베스와 달리 뒤돌아보지 않는다. 명성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더 많았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수에겐 채워나갈 현재와 미래의 복도 및 전광판이 드넓기 때문이다. 그 명성은 형식상으로는 에어로빅 쇼지만 실제로는 포르노에 가까운, 남성의 욕망에 의해 쌓여 올라간다. 이를 남성이 원하는 '웃는 얼굴'을 하면서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그렇다, 코르셋을 찬 여성의 소유권은 남성에게 있고, 그녀는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남성처럼 사고한다. 그녀들의 육체와 정신과 삶 모든 것은 여성이 기반인데도 불구하고 남성의 기준을 따라 판단한다. 

하지만 그 남성적인 자아의 질료는 여전히 여성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박해당하고 폄하당하는 여성의 몸, 마치 서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처럼 식민화되어 수탈당하고 있다. 그 식민지는 늙고 쭈글쭈글해져서 볼품이 없어졌다. 남성처럼 사고하는 젊고 아름다운 그녀들은 그들이 노파를 혐오하듯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마치 젊은 여성은 사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며 늙은 노파에게 모든 죗값을 떠넘긴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처럼, 늙은 여자에 대한 적나라한 혐오가 노출된 캥탱 마시의 <추한 공작부인>처럼 말이다. 그들처럼 늙은 그녀들을 고립시키고 가두며 살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화장을 지우면, 영화 내에선 7일마다 코르셋을 차지 않은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에 의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감사해하기는커녕 착취와 혐오만 일삼는 젊은 그녀를 원망한다. 나는 내가 싫고, 나도 내가 싫은 것이다. 여성은 가부장제에서 솔직한 자아와 남성에 의한 자아로 양분되어 반목한다. 심지어 기술이 젊음과 늙음을 더욱 양극화할수록 본 작품처럼 그 갈등은 극도로 첨예해질 것이다.      


하지만 둘은 하나다. 엘리자베스가 잠들어야 수가 깨어나고, 수가 잠들어야 엘리자베스가 깨어난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스위칭을 하는 와중에 둘의 인격이 동시에 공존하게 되었지만, 결국 영화의 끝자락에선 모든 인격이 통합되는 것처럼 둘은 하나다. 하나인데도 둘로 나뉘는 이유, 그것은 육체에 따라서 가능한 것을 구분 짓는 통념이나 규정이 정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야외에선 누구나 다 호의를 베풀며 데이트를 신청한다. 반면 늙은 여성에게는 불평불만이 많고, 심지어 젊은 사람 본인이 돌아가면 될 것을 굳이 노인에게 비키라고 호통을 친다. 이에 코르셋의 유무에 따른 외모의 격차가 낮과 밤의, 격주 마다 다른 이중인격을 형성한다. 정신이 아무리 둘은 하나라고 생각해도, 둘을 다르게 대하는 사회에 의해 나 자신은 철저하게 타자화된다. 

파르자는 이를 관객이 체험하게 만든다. 영화의 카메라는 남성의 시선을 반영함과 동시에, 앞서 말했듯 그녀들의 발과 눈이 되어 마치 <사울의 아들>처럼 간접적인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수의 시선에 일조할 때 그녀에 의한 촬영은 더더욱 안정적이다. 편집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이 이후 숏에 필히 이어지고, 비교적 명석한 의식은 많은 것을 똑바로 인식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 접선 장소로 향할 때, 특히 수에게 착취당해서 노화가 극심해졌을 때, 핸드 헬드는 피사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세차고 편집도 매우 듬성듬성하다. 노인의 시야와 의식, 기억 등을 반영하는 형식인 것이다. 그렇게 육체의 차이에 따라 수용되는 것들이 정신의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수 또한 늙는다. 더욱이 엘리자베스에 의해 수가 결정되기에, 전자가 숨을 거두자 남성들의 기준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수는 서브스턴스를 오남용하고, 그 결과가 '엘리자수'다. 여성에게 과한 코르셋을 요구하는 영화 산업, 넓게는 엔터 산업이 만들어내는 최종적인 피조물이 바로 엘리자수다. 여성과 유한함이라는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한 결과, 거세하고 싶지만 수를 가능케 하는 진실이자 토대로서 엘리자베스는 뒤에 숨어있고, 과하고도 혹독한 코르셋의 부작용인 흉측한 몰골로 변해버린 여성이 앞에 놓여있다. 그 여성을 엔터 산업의 부역자이자 공범들은 ‘괴물’로 규정하여 은닉하고 없애려 하지만, 파르자는 엘리자수가 그들에게 피를 끼얹게 만든다. 그들 역시 시뻘건 괴물이라는 증거로서, 또한 세계의 무수한 엘리자수들이 숨지 않고 존재할 수 있게끔 말이다.

결말에서 엘리자수는 엘리자베스로 되돌아가고 미화되지 않은 최종적인 몰골로 제 명예의 전당에서 숨을 거둔다. 이때 카메라는 처음과 같이 고정되어 있다. 가부장적 시선의 기준에 부합하려는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피로 얼룩진 그 얼굴이다. 하지만 그 얼굴은 다음날 씻기고 잊힌다. 그것 역시 현실이다. 아무리 밝혀도 또다시 은닉되는 진실을 파르자는 엘리자베스의 전철에 공감할 수 있는 데미 무어,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이자 수의 전철을 밟게 될지 모르는 마가렛 퀄리와 함께 밝힌다. 특히나 엘리자베스, 곧 데미 무어의 얼굴을 늘 클로즈업하여 그 고뇌에 찬 얼굴이 배역의 것인지 배우의 것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촬영이 일품이다. 공상적인 설정, 특히 고어한 연출이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수용되기 위해선 일련의 리얼리즘을 포기해야만 했지만, 마냥 허구로만 여길 수 없는 생생한 경고가 그녀들의 얼굴로 전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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