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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5

바우테르 살리스, <계엄령의 기억>

자유의 맛, 압제의 상처

by 정수

바우테르 살리스, <계엄령의 기억> - 자유의 맛, 압제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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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의 중남미는 미국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비민주적인 독재자들의 만행, 일명 '콘도르 작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 정권은 쿠데타로 전복되었고(파트리시오 구즈만의 다큐멘터리들), 사람답게 살고자 저항의 목소리를 낸 이들은 모조리 끌려가 지금껏 유해마저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역사가 현대 중남미 영화의 거대한 축을 이룬다. 주로 아버지가 부재하는 중남미 영화 설정의 원인 중 하나가 콘도르 작전이며, 이로 인해 끌려간 아버지·남편·아들 등을 찾아 헤매는 여인들의 이야기도 도드라진다.(세자르 디아스,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들>) 또한 독재의 마수가 성별을 가리지 않았기에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고문 및 성폭력을 증언한다(산티아고 미트레, <아르헨티나, 1985년>). 그 사악하고도 끔찍한 현장을 외면하고 독재에 부역하던 태평하고도 교활한 이들을 고발하는 영화(파블로 트라페로와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들)도 있는 반면, 이와는 정반대로 은밀하게 실종자를 수색하고 민주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영화도 있다.(마누엘라 마리텔리, <1976>) 바우테르 살리스의 신작, <계엄령의 기억>도 콘도르 작전 속 저항하던 사람들을 기리는 영화다.


1956년 리우데자네이루 태생의 바우테르 살리스는 브라질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 풍요로운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계급을 받쳐주는 하위 계급의 삶을 영화로 기록해왔다. 그의 작품 특징은 다음과 같다. 문맹률이 높은 빈민가가 영화의 주된 배경이고, 아버지는 주로 부재하여 남아있는 이들끼리 연대를 하거나, 일련의 결핍이 동기가 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로드무비 장르를 추구하기에 얼핏 그의 영화는 이동이 잦을 것 같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다. 떠나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자본이 붙잡고 늘어진다. 돈이 사람보다 우위에 서서 인간에 의해 인간이 팔려가거나, 돈을 벌기 위해 옮겨야할 것들을 옮기지 않거나, 심지어 푼돈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인간은 즉각 처형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빚진 사람이 노동이나 상환을 거부할 시 쫓기고, 돈이 없는 관계로 이곳저곳 헤매게 된다. 즉 그의 로드무비는 돈에 발이 묶이지 않으려는 반자본적인 성향이 짙다. 또 돈이 되었든 아버지의 부재가 원인이든, 종합적인 궁금증과 결핍, 열망이 주인공을 어디론가 떠나게 만든다. 이에 여행은 촉발되고, 거기서 자본에 의해 억눌려있던 인간의 가치가 발견된다. 또 자본의 원리에 맞춰서 틀에 박힌 행위만 반복하던 여행 전과 달리, 여행에선 새로운 만남과 경험이 빼곡하다. 다만 그 여행은 끝이 없다. 자신이 기대한 아버지는 목적지에 없고, 돈이 없으니 계획도 계속 틀어진다. 살리스가 보기엔 그 여행이 곧 삶이다. 결핍에 의한 끝없는 열망, 곧 '의지'를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돈에 의해 이동이 없다가도 결국에는 이동이 잦아진다. 그의 대표작이 여러 인파가 부대끼고 교차하는 <중앙역>인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렇게 많은 인파의 발걸음은 빠르다. 잘 보이지 않고 금세 사라진다. 이러한 가운데 살리스는 자신이 그러하든, 아니면 영화 내에서 자신이 설정한 페르소나가 수행하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클로즈업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끝없는 여행의 인생 속에서 우리는 그립고 쓸쓸해진다.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런 와중에 영화는 그 좋았던 순간을 붙잡는다. 또 이동하는 영화는 그렇게 붙잡은 것을 '편지'로써 연결한다. 그래서 멀리 떨어지게 된 서로에게 닿게 해준다. 영화는 여행이 본질인 이 삶에 있어서 정착과 보존과 닿음의 희망이다.


필모그래피 내내 로드 무비, 여행을 긍정해왔던 살리스, 이는 곧 그가 '이동'을 중요시 여긴다고 요약할 수 있다. 살리스는 본 작품에서도 이동을 예찬한다. 이동은 우리가 자유로워야하는 이유다. 도입부,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유니스의 모습을 포착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 감각은 가히 경쾌하고 포근하며 해방적이다. 중력의 구속이 덜한 채로 두둥실 떠오른 상태, 이후 유니스의 자녀들은 해변에서 비치발리볼을 즐기고, 또 선탠을 한다. 촬영 소재가 비치발리볼이기 때문에 영화는 카메라 워킹과 편집이 아주 재빠르다. 하지만 단순히 비치발리볼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곳은 존재를 둥둥 부유시키는 바다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저 너머로 데려가면서도 동시에 해변으로 데려다준다. 이로써 사람들은 다양한 곳으로 이동하며 그곳에서만 독점적인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또 마르셀로는 대뜸 나타난 떠돌이 개를 만난다. 이후 아버지 루벤스에게 허락받기 위해 횡으로 이어진 도로를 종으로 가르고, 또 종을 이어진 길을 횡으로 질주하며, 즉 자유자재로 이동하여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낸다. 이렇게 무한한 이동이란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동이 자유로울 때 즐길 수 있는 것도 더 많았다. 68혁명 직후 서방의 영향을 받은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세르쥬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의 에로틱한 노래, 누벨바그 영화 등)와 진정한 저널리즘이 무엇인지를 자각한다. 이렇게 존재가 할 수 있는 게 더 많았을 때 영화가 표현하는 당대의 ‘경제’ 역시 풍요로웠다. 단순히 루벤스가 의원을 역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군부의 폭정 전엔 가사 노동자를 고용할 자금도, 집에서 파티를 하며 손님들에게 마음껏 베풀 여유도 있었다. 이런 삶이 가능하기 위해선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당대의 서방은 선전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바로 그 도그마의 중심, 미국에서 중남미 군부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이 약속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군부의 등장 이후 모든 국민들의 가치는 착취된다.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집과 낙후된 지역이 국민들에게 강제되고, 가사 노동자를 고용할 여유도 없으며, 이는 곧 가사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이 실직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즉 더 후술할 부동은 자유의 제한이요, 그렇게 가능성이 제한되면 제한될수록 생산성도 떨어진다.

이에 살리스는 연출로써 이동을 열렬히 예찬한다. 먼저 도입의 핸드헬드, 분명 영화 내내 핸드헬드는 이중적이다. 도입에서도 유니스가 부유를 즐기는 와중 하늘에서 헬기가 둔탁하게 지나갔기에, 핸드헬드의 떨림이란 불안정, 불완전함, 무너짐 등에 상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악한 마수가 아직 이들 가족한테 직접적으로 미치지는 않았다. 핸드헬드는 어떤 전망보다는 모든 이동이 자유로운 해변에서의 열정과 경쾌함, 생명력 등에 더 맞닿아 있었다. 핸드헬드의 주인은 '내 손'이다. 스테디캠처럼 어떤 기기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정할지언정 그 어떤 상태보다 자유롭다. 그렇게 자유로운 이들을 살리스는 '편집'으로 열렬히 잇는다. 나는 상대방에게, 또 공간 어디든 자유롭게 입장한다. 이동이 자유로운 상황에서 거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떠돌이 강아지마저 환대받는다. 상대의 가치를 더 관대하게 인정하는 사회적 여건, 이로써 가능하게 된 이동으로 인해 영화는 아주 풍성하다. 제한 없는 이동은 역량의 열렬한 발휘이자, 제 가치를 인정해주는 어딘가로 향하는 가능성, 이동이 보장된 사회가 진정 건강하다.


하지만 이내 곧 영화는 얼어붙는다. 청년들은 차 안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노래를 부르며 홈 비디오를 이용해 도로를 촬영하는 등 아주 자유롭게 청춘을 만끽하고 있다. 젊음을 축복하는 듯한 화사한 햇빛을 자유롭게 만끽하며, 그야말로 제 존재를 온 천하에 드러내고, 또 이동이 자유로운 만큼 홈 비디오를 이용하여 상대방 역시 여실히 빛낸다. 그러나 개방된 도로가 이내 곧 끝나 폐쇄적인 터널로 진입한다. 거기서 군인들이 심문을 한다. 군인들은 몸수색을 하고, 수배지 명단에 오른 테러리스트들의 얼굴과 젊은이들의 얼굴이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일치하지 않아야만, 또 자신들이 허락해야만 젊은이들은 움직일 수 있다. 또 군부가 자의로 테러리스트가 아닌데도 수배지 명단에 누군가의 얼굴을 실을 수 있다. 이렇게 제한되는 환경에서 음악, 촬영 등 인간의 삶을 더 풍성하게 창출하는 모든 가치들이 중지된다. 만인을 즐겁게 해주는 가치들 대신에, 오직 권력자 눈에 보기 안전한 것들만 주관적으로 편향되게 취사선택된다. 독재자에 의해 이동이 제한당하는 사회가 생명력을 잃게 되는 이유다.

이에 살리스의 편집에도 변화가 생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의 편집은 내가 보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 다음 숏에 이어지고, 또 내가 던진 볼이 상대방에게 의도대로 닿는, 그야말로 내 목적의 정답에 가까운 편집이다. 또한 자유로운 서로는 상대를 존중하기에 상대의 의도에 따라서 나 역시 얼마든지 연결된다. 영화에서 부각되는 홈 비디오 역시 똑같은 관점에서 해석 가능하다. 당대의 매스미디어는 부패한 독재자의 손에 장악됐다. 이에 매스미디어에 보일 수 있는 대상은 몸소 독재자를 위해서 자유를 상납한 사람들이거나, 또 그들이 감시하는 대상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홈 비디오는 누구나 쥘 수 있고, 또 영화에선 무엇이든 막 촬영한다. 존재는 그저 자유롭게 상대의 눈에, 또 홈 비디오 안에 담길 수 있다. 바로 이 홈 비디오를 빼앗으려 하는 이들이 등장하자 그 자유로운 시선과 발걸음 앞을 헬기가, 민간인으로 위장한 요원들이 가로막는다. 분명 편집으로 무언가가 연결이 된다. 하지만 계엄령 이후의 편집은 이동이 탄력적이거나 많지도 않으며, 그나마 연결되는 것들은 고립이자 벽이자 죽음이다.

그래서 처음에 외부를 포착하던 홈 비디오는 서서히 영역이 축소된다. 집 주변, 정원, 실내 정도만 포착한다. 살리스의 카메라가 활동하는 반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부로 나가면 나갈수록, 이에 군부 및 독재자들의 눈에 띄면 띌수록 기다리는 연결은 절망적이다. 사람들은 홈 비디오를 숨기고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최대한 내부로 응축한다. 가고자 하고 보고자 하는 그 모든 것에 닿으면 군인들의 참혹한 제재가 가해진다. 이에 영화도 서서히 도입의 청량감이 사라진다. 둔탁해지고 무거워지며 갑갑해진다. 하지만 아주 이중적으로 평화롭긴 여전히 평화롭고 주변은 아주 단란하여, 도입이랑 별 차이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계엄령 이후의 풍광은 분명 뻣뻣하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며,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척, 조금의 불평불만도 없는 사람처럼 다들 억지로 행동하고 있다. 감시 요원들에게 항거를 했어도, 유니스는 애써 이웃들에게는 별 일 없는 척 눈인사를 건넨다. 그 범위 밖으로 나가면 그 나마의 평화도 지킬 수 없다.

본 작품은 실화다. 남편 루벤스를 잃고 나서 혼자 고군분투하며 명예를 복권하고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유니스와 자녀들의 일대기를 영상화한다. 여기서 실존 인물들의 구체성은 다소 약하다. 의원으로서 루벤스의 의정 활동이나, 유니스가 교수가 된 이후 강의하는 모습은 그저 파편적으로 흘러갈 뿐이다. 실존 인물들의 구체성보다는,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통분모가 있을 법한 ‘추상성’ 내지는 ‘보편성’을 살리스는 부각한다. 당대엔 모두 다 이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이미 발은 묶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하반신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또 식구들의 안위를 보장하고자 조심스럽게 허용된 범위 안에서만 오밀조밀 움직인다. 그 너머로 나가야 할 일이 있다면 최대한 은밀하게, 눈에 안 띄게 움직이고, 어떻게든 남들의 눈에 튀지 말아야 한다. 당대의 추상성, 평화롭지만 치열한 자기검열로 얻은 가짜 평화, 이로 인한 공허함, 뻣뻣함, 적막으로 허용된 물질적 풍요 아래 가라앉아 있다.


그렇다면 근거 없는 테러와의 전쟁을 호소하고, 소위 계엄령을 계몽령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시민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은 바로 '타자화'다. TV에서 반정부 사회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해 심각한 안보 위기를 겪고 있다고 보도된다. 그러나 정작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독재자들이 수용소의 위치를 숨기려고 검은 보자기를 씌우듯 말이다. 대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군대의 명백한 내란 행위다. 성인이 되지 않은 청소년을 강제로 끌고 가서 심문하고, 적법한 영장 청구도 없이 유니스를 구속하였으며, 심지어 제대로 된 재판도 거치지 않고 루벤스를 살해했다. 국민을 위협하는 것은 진위를 확인할 수도 없는 소위 빨갱이들이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겠다고 거짓말하면서 실제론 고문 및 납치, 살해하여 영현백에 쑤셔 넣는 내란수괴들이다. 그러나 정작 내란범들은 자신들 행위의 유해함을 야당 의원이나 지식인들에게 전가한다. 일단 그들을 체포하고 본다. 죄가 있어서 수용소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수용소로 끌고 와서 없는 죄라도 만들어내어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무수한 시민들이 무고하게 학살당한 반면, 지금까지도 브라질의 내란수괴들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있다.

이들은 무고한 이들에게 자신들의 죗값을 뒤집어 씌워 내란수괴 스스로의 무력 사용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한다. 이후 그들은 온 세상을 활개치고 다니며 사람들의 일상을 쑥대밭으로 헤집어놓고 사랑하는 식구와 반려동물들을 앗아가며, 이로써 저항할 수 있는 시민들의 이동마저 사전에 차단하게끔 검열을 일상화한다. 이때 살리스는 카메라 워킹을 이중적으로 사용한다. 도입부에서 이중적이던 핸드헬드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여 일상이 파괴되는 흔들림, 전망을 알 수 없는 괴괴함을 가시화한다. 뿐만 아니라 잔뜩 조심스러워진 카메라 워킹은 더는 핸드헬드가 아니라 스테디캠을 이용한 달리 숏과 트래킹 숏이 일반적이다. 이제 나는 혼자서 이동하지 않는다. 어디엔가 붙잡혀있다. 더는 여기 있을 수 없다. 아빠는 사라졌고, 겨우 돌아온 엄마는 이상하며, 그마저도 정든 집과 동네를 떠나 상파울루로 가야 한다. 이때 빛은 서서히 사라진다. 어둠은 찬란하던 존재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끔 지워낸다. 존재를 지켜내겠다고 주장하는 안보주의자들의 거짓말을 어둠으로 폭로한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이동을 멈추지 않았고, 존재의 불씨를 꺼트리지도 않았으며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군부 및 미국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은밀하게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그 사실이 적발되어 희생된 동지의 명예 복권을 위해 사투하던 보편성 역시 당대 브라질인들을 관통한다. 루벤스와 유니스 뿐만이 아니다. 유니스는 루벤스를 감옥에서 봤다는 마르타에게 증언을 부탁한다. 하지만 마르타는 보는 눈이 많아 이를 꺼린다. 교회에서 수녀들의 눈총에 움츠러드는 것을 생각하면, 군부가 마찬가지의 거대한 권력, 가톨릭과도 공조해왔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비가 세차게 오는 어느 날 밤, 마르타는 유니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증언을 은밀하게 전달한다. 외에도 유니스는 루벤스의 생사를 확인하고 구출하기 위해 동료들과 흡사 첩보전하듯 끈질기게 움직인다. 어둠, 그리고 고립적인 편집을 어떻게든 빛과 개방적인 연결로 전환해내고야 만다. 분명 반민주적인 사회가 도래했고, 시민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측면이 있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었고, 민주적으로 의사를 묻기보다는 강압적으로 이사 결정을 내리고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자신들의 처지를 알릴 수 있는 언론을 모색하고, 군부의 비민주성에 저항할 수 있는 행위들로 드리워진 악덕을 씻어낸다. 원주민의 거주권을 옹호하는 유니스,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이야기와 군부 치하의 유년기를 표현해낸 마르셀로처럼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에 그들이 갖는 보편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진 사람들, 설령 육체가 남아있어도 정신은 한이 맺힌 그때 그 순간에 얽매여 의식이 오늘에 있지 못하다. 살리스는 그 존재들을 위해서 영화가 어떤 역할을 띨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 답을 본 작품으로서 제시한다. 당시 군부에 의해 시민들의 활동권이 축소되어, 목숨을 위협하는 중요한 사건들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이로써 사라진 당대를 살리스는 누군가가 치열하게 촬영한 푸티지들을 모으고 모아서 아카이빙한다. 이로써 그 역사 속에 위치한 어떤 존재들 역시 복권한다. 또한 당대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이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오늘날,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얼굴을 당당하게 클로즈업한다. 이로써 존재할 것, 존재했어야 할 것이 영화의 원제처럼 어떻게든 존재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전 세계적으로 극우의 물결, 곧 국가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내란 동조자들이 늘어나는 와중에, 또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작품의 제목을 대한민국의 처참한 현실을 환기하는 ‘계엄령의 기억’이라고 번역한 맥락에서, 시민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더는 퇴행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고조시킨다. 그 경각심이 사악한 세력들이 앗아간 ‘계몽’의 원 뜻이어야 한다. 계몽은 내란수괴들의 알량한 변명과 거짓말을 미화하는 개념이 아니라, 계엄령과 독재의 무서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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