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는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안녕하세요 오브라제 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업보가 돌아온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은 조선시대 왕 중에 가장 많은 전설과 야사를 가지고 있고 비운의 소년이라 불리는 제6대 왕 단종과 피비린내로 인해 재평가되고 있는 세조의 이야기입니다.
단종은 12살, 지금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5학년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겨나 한 많은 삶을 살다가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되는 인물이죠. 그런데 단종이 *조선에서 가장 정통성이 강한 왕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전 세계적으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정통성이 강한 왕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통성을 가졌기에 비극적인 결말을 가지게 되죠.
단종은 태어난 후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6살에는 할머니 소헌왕후가, 10살에는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이, 12살에는 아버지 문종까지 차례로 돌아가시는 불운은 겪게 됩니다.
문종이 살아있을 적, 국상 중에는 혼인을 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 세종의 국상을 치르던 재위기간에는 새 중전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혼자남을 어린 아들이 너무 걱정이 되어 힘이 되어줄 세자빈을 들이려고 간택령까지 내리지만 그동안 앓아온 등창(종기)이 악화되면서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간택 문제는 흐지부지 되어버립니다. 문종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 김종서, 황보인 등, 신뢰하는 고명대신들에게 아들을 부탁하며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조부모와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단종은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혈연단신인 상태로 위태롭게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이 상황을 기회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종의 친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었죠.
단종 영정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을 관리하던 사람이라 그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았기에 수양 편에 설 사람들을 아주 은밀하게 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보위에 오른 단종이 하고자 했던 정치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백성들이 부담이 되지 않도록 세금을 줄이고,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민생을 잘 살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경험이 없다 보니 아버지인 문종이 선택한 원로대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수양대군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황표정사’가 일어난 것이죠.
황표정사란, 의정부에서 사람을 낙점하고 왕이 그에 따라 결제하는(도장을 찍는) 방식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종이에 후보가 여럿 적혀 있는데 김종서의 주도로 추천하는 인물 이름에 황색표시가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관상 2013 속 황표정사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새로운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황표정사는 김종서가 만든 것이 아닌, 문종이 단종을 위해 성인이 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만든 제도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보호해 줄 왕실어른이 없다 보니, 죽기 전 믿을만한 사람들을 불러 단종을 부탁하며 이야기했던 것이었죠. 놀라운 것은 황표정사가 의정부 3 대신(김종서, 황보인 등)이 주도한 것은 맞으나, 실제로는 세종의 적자들이자 문종의 친동생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도 황표정사에 같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수양은 그들에게 맞추는 척을 하다가 후에 김종서에게 모두 뒤집어 씌웠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이 있는 의정부가 왕의 권한인 인사권까지 가지게 되면서 세력이 더 커지자, 위협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김종서가 어린 왕을 쥐고 마음대로 흔든다고 말이죠. 단종이 왕으로서 내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일이, 오히려 수양 측에 좋은 멋잇감을 제공한 것이 되었고 세력을 분열시키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단종은 원손부터 세손, 세자를 거처 왕이 되었기에 세상물정을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었고 할아버지 세종이 입이 닳도록 손자의 총명함을 칭찬했던 것처럼 황표정사 시절에도 대신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대담하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만약 김종서나 황보인이 정말 왕을 휘두르고 싶었다면 어린 왕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라는 모습을 보이면 “전하께서는 아직 어려서 모르시겠지만~”이라고 하겠지만 그들은 단종의 의사를 거스르지 않고 수용하며 보필하는 등 선을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표면적으로도 사치를 부리지 않고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청렴한 인물들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특히 황보인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예를 갖춰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김종서 흉상
하지만 이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일어납니다. 단종 1년에 일어난 계유정난이죠. 김종서 일당이 어린 왕을 휘두르며 국정농단을 하고 있기에 왕권을 공고히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겠다는 것과, 그들이 단종을 몰아내고 안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유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단종 측 사람들은 세력은 강했으나 무방비했고, 수양 측 사람들은 그보다 세력이 약했으나, 치밀했고 많은 사람을 포섭한 상태였죠. 특히 김종서는 황표정사 일로 많은 이들의 눈밖에 났기에 같은 충신인 집현전 학자들 (대표적으로 성삼문 등)도 돌아섰고 많은 종친들도 수양의 편에 섰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수양 측은 서로 단합이 잘 되었던 것과 달리, 단종측었던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과 김종서 황보인은 단종을 위해 충성하는 마음은 같았으나, 당시 60대였던 원로대신과 젊은 학자들 간의 세대차이가 있었는지 서로 간의 소통이 잘 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점점 세력이 나눠지게 되는데,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세종의 두 형들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수양 편에 서게 되고, (특히 양녕대군은 수양이 대군이었을 때부터 왕에 올라서기까지 완벽한 수양 편에 서게 됩니다.) 태조 이성계의 조카손자이자 세종, 문종과 가까웠던 하령군은 단종 편에 서게 됩니다.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뿐만 아니라 하령군에게도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셋째인 안평대군과 여섯째인 금성대군은 단종 측에 섰고, 넷째 임영대군과 세종대왕이 가장 아꼈다는 막내아들 여덟째 영응대군은 수양 측에 서게 되면서 친형제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섯째 광평대군과 일곱째 평원대군은 세종과 소현왕후가 살아있을 적 각각 20세 17세 나이로 요절해 당시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종의 여동생이자 수양의 누나인 정의공주 남편 안맹담 또한 수 양편에 섰습니다.
세종의 서자들도 갈리게 되는데, 어머니를 잃은 단종과 경혜공주를 키워준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와 그녀의 아들인 한남군과 영풍군, 그리고 영빈김씨의 아들인 화의군은 단종 편에, 어릴 적 수양대군을 돌봐준 신빈김씨의 소생인 계양군, 익현군은 수양의 편에 서게 되죠.
그리고 배신의 아이콘인 신숙주는 단종이 8살 때 세손이 되면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자인 성삼문과 신숙주에게 세손의 교육을 맡게 하여 단종에게는 스승과 마찬가지였으나 배신을 하였고… 안평대군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우로 꼽았던 신숙주와 정인지 박팽년 중, 박팽년을 제외하고 대차게 배신합니다… 정인지도 신숙주처럼 완벽한 배신을 하죠.
신숙주 초상화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첫 번째 타깃은 당연히 단종 측의 중심이었던 김종서였습니다. 당시 친누나 경혜공주 집에 있었던 단종은 당연히 호위나 경비가 궁보다 약했기에 거사일을 그날로 선택한 것이었죠. 사실 이때 수양은 마음이 갈팡질팡 했던 것 같습니다. 부하들 중 이것은 역모가 아니냐며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때 부부인(대군부인)이 (훗날 정희왕후가 되는 인물) 남편 수양대군의 옷 안에 갑옷을 직접 입혀주며 힘을 보태죠. 그렇게 용기를 얻은 수양은 최소한의 경비로 김종서에게 찾아가 경계를 푼 다음 편지를 읽어보라며 시선을 돌리게 한 뒤, 철퇴로 내려쳤고 그의 아들들도 그 자리에서 죽임으로써 계유정난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수양대군은 곧바로 경혜공주와 남편인 정종의 집에 들이닥쳐 역적 김종서를 처단했다며 어린 단종을 겁박해 명패를 빼앗고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단종 편에 선 사람들을 (황보인과 이성계의 조카손자인 하령군등) 철퇴를 내려치고 칼로 사정없이 베어버리는 등, 잔혹하게 죽여 당시 궁은 피바다가 되어버립니다. 이때 김종서와 함께 단종의 편에 섰고, 수양대군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안평대군은 역모혐의를 뒤집어쓴 채 아들과 함께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얼마 안 가 친형인 수양대군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종의 주요 측근들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표면적으로 내세운 왕권을 흔드는 무리들을 처단한다는 이유와 다르게,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실권을 모두 쥐고, 조카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뒤,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렇게 하루하루 숨도 쉬어지지 않는 날을 보내던 단종은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수양대군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죠.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는 단종을 가까이에서 보호하기 위해 궐에 들어가 왕실어른으로서 궁을 관리하고자 했으나, 이를 눈엣가시로 본 수양이 문종이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귀인 홍씨를 숙빈 홍씨로 지위를 올려 주어 혜빈양씨가 하던 일을 숙빈 홍씨가 대신하게 하여 혜빈의 원망을 사게 됩니다. 아무래도 혜빈 양씨는 궁인출신 후궁이었고 숙빈 홍씨는 간택후궁 출신이라 신분의 차이가 있다 보니 혜빈이 나설 수 없게 된 것이죠. (혜빈은 문종이 세자시절 모시던 궁녀였는데 세종이 세자에게 갔다가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면에 문종이 제일 총애하던 숙빈 홍씨는 형식적인 일만 할 뿐 단종을 보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단종이 아버지 문종의 국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절대 혼인을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수양대군은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왕 허락 없이 자기 마음대로 간택령을 내려, 부부인(훗날 정희왕후)와 이전부터 점찍어둔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뽑았고(정순왕후), *삼간택에 함께 올라간 권완의 딸은 숙의 권씨로, 김사우의 딸은 숙의 김씨가 되어 단종의 후궁으로서 들어오게 됩니다.
송현수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양대군의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냈던 친구였고, 한명회의 부인과 송현수의 부인이 친척이었기 때문이었죠. 이것만 보면 단종이 정순왕후에게 거리를 둘 것 같지만 자기편 하나 없고 피바람만 불어닥치는 살벌한 궁궐에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보니 둘의 사이는 괜찮았다고 합니다.
형 문종의 국상 기간이 끝나갈수록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더 거센 압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뻔뻔하게 ‘국상기간 동안은 형을 생각해 너를 왕으로 남겨 주었으나 이제는 나가라!’라는 듯, 단종을 끝까지 지켜주려고 했던 혜빈양씨와 그녀의 아들인 한남군, 영풍군과 어떤 상황에서도 단종을 보호하려고 했던 금성대군 또한 역모혐의를 뒤집어 씌워, 왕족의 신분을 박탈하고 전재산을 몰수 한 뒤, 멀리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공신들이에게 나눠주죠.
그 시기에는 이미 조정의 신하들은 수양의 사람들로 가득 찼고, 단종 주변의 내시나 상궁, 궁녀들도 수양의 사람으로 바꿔져 단종은 어느 곳에도 마음 편히 있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 시간이 갈수록 자신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혜빈양씨와, 원손시절 세종과 문종이 궐 밖에 나갈 일이 있을때마다 어린 단종을 금성대군의 집에 맡겨 지냈기에 다른 숙부들보다 유대감이 깊었던 금성대군을 죽이려고 하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모를 겪는 것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단종은 그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여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세조 어진
그때 단종의 나이 15살, 훗날 세조의 손자인 성종이 12살에 보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받다가 스스로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을 때가 15살인지라, 단종도 계유정난의 일만 아니었다면 대신들의 뒷받침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겠지만, 하늘은 단종의 편이 아니었는지 제대로 된 왕을 해보지도 못한 채 짧았던 재위 기간을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몇달 뒤, 세조는 단종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하들의 말대로 혜빈양씨를 교수형에 처하죠.단종은 울부짖으며 세조에게 간절히 애원했지만 들어주지 않습니다. 세종의 후궁이기에 세조에게는 서모가 되는 것이라 혜빈양씨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지켜본 집현전 학자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김종서 무리들의 힘을 뺏는 것에 동의를 했지만 막상 일어나 보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김종서보다 더 심한 농단(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하는 것도 모자라 왕을 겁박해 자리에서 밀어낸 것을 보니 ‘아, 우리가 속았구나’ 라며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죠.
상왕이 된 단종을 복위하기로 마음을 먹으며 모여든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이 거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지 1년쯤 되었을 때, 정말 하늘에서 내린 기회가 오는데,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떠나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는 뜻으로 베푸는 연회)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을 옆에서 지키는 (보디가드 같은) 별운검에 발탁이 되어, 그 기회로 세조와 그 일당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이것은 또 무슨 불운인지 곧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취소시키게 됩니다. 계획이 틀어지자, 그 안에서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 문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닌 것 같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라는 입장이었고, 무인인 유응부는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기다리다가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원래 계획대로 그날 거사를 진행하자 ‘ 하였지만 성삼문이 끝까지 말리게 되면서 결국 미뤄지게 됩니다. 그때 단종 복위에 함께했던 사람 중 한 명인 김질이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장인인 정찬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정찬손은 이 일이 자신과 집안을 더 크게 일으킬 기회로 생각을 해 사위와 함께 세조에게 고자질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의 입이 열림으로서 단종복위는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복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거열형을 당하였습니다. 유성원은 성삼문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결을 하였고, 박팽년은 고문중 사망하였는데 세조는 이들의 시신을 *부관능지(연산군이 한 부관참시는 시신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끝나지만 부관능지는 시신 전체를 토막 내는 것으로, 부관참시보다 더 끔찍한 형벌로 여겨지고 있음.)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목은 3일 동안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음.)하고 나머지 부분은 8도 전역에 전시가 됩니다. 훗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목숨 걸고 이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묻어주었는데 그곳이 지금 노량진 사육신 공원의 시작점이 되는 곳입니다.
실록을 보면 성삼문이 단종도 복위운동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라, 신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충신 김종서를 역적으로 만든 것처럼, 성삼문도 하지 않았을 말을 만든 것인 수도 있고, 말했다 하더라도 모진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거짓고변을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성삼문 영정
결국 사육신의 복위운동으로 인해 단종은 폐위가 되었는데, 엄청난 혈통과 정통성을 가진 왕에게 ’ 대군’(왕과 왕비에게 태어난 적자 중, 세자를 제외 한 아들에게 주는 작위)가 아닌, ‘군‘ (왕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주는 작위)으로 강등시켜 ‘노산군’으로 불리게 하는 모욕을 주었고, 부인인 정순왕후와도 강제로 헤어져 홀로 먼디 먼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순왕후와 헤어진 다리를 영영 건넌 다리라고 하여 영도교라고 불리게 됩니다.
영월에 있는 정순왕후와 단종 동상
단종의 눈물은 메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세조의 친우였던 단종의 장인들도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고 하여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송현수와 숙의 권 씨의 아버지인 권완을 처형시키고 집안사람들을 노비로 만들어 집안을 박살을 냅니다. 반면의 숙의 김 씨 아버지인 김사우는 관련되지 않았다고 해서 친정이 무너지지 않았고 아버지가 관직에 남을 수 있었지만 많은 공신들의 견제를 받고 평생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죠.
현덕왕후의 친정도 이 일과 관련 있다고 하여, 보통여자는 죽이지 않는데, 단종의 외할머니인 현덕왕후의 모친과 단종의 외삼촌이자 현덕왕후의 남동생인 권자신을 처형시킵니다.
공신세력들은 더 거침없이 나갔습니다. 공신 중 한 명인 정인지는 노산군이 내려갈 때 궁녀를 단 한 명도 붙여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죠. 그리고 한명회와 신숙주는 단종이 ’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유배를 가는데 그의 어미가 왕후 자리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폐위를 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키라고 합니다. 세조는 그 말에 따라 바로 현덕왕후를 폐위시키고 이미 사망한 그녀와 가족들 모두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고, 문종과 함께 놓여 있는 종묘의 신주(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없애버립니다. (성종 때에는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을 때 받은 교명까지 불태워 버리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형 문종과 합장 되어있는 현덕왕후의 관을 파헤쳐 물가에 아무렇게 묻어버리고 맙니다.
서수영 작가가 그린 현덕왕후
우여곡절 끝에 청령포에 도착한 단종은 비참하고 슬픈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그 지역사람들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해 큰 봉기를 일으킬 예정이었지만 이것 또한 관노비의 꼰지름으로 세조의 귀에 들어가자 신숙주는 안평대군때와 똑같이 금성대군을 처형할 것은 물론 단종도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말합니다. 세종의 친형들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도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죠. 화가 난 세조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아예 왕실 족보에서 지워버립니다.
단종 유배지 영월 청령포, 단종의 유배지를 가려면 지금도 배를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금성대군은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게 됩니다. 사약을 받을 때는 보통 왕을 향한 쪽으로 절을 하고 마시는데, 금성대군은 ‘나의 왕은 북쪽에 계신다 “며 세조가 있는 한양이 아닌 단종이 있는 영월을 항해 절을 하고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이보흠도 유배지에서 죽게 되는데 분이 풀리지 않았던 세조는 순흥도호부를 폐지해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단종의 복위 운동에 참여한 많은 순흥 사람들을 처형을 시켜서 그 당시 순흥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십여 리까지 피가 흘러나왔다고 말이 나올 정도로 처참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정축지변이라고 하죠. 세조로 인해 금성대군의 시신이 수습되지 못해 묘는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순흥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사약을 받은 자리에 돌을 쌓아 금성단이라는 제단을 만들어 그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금성단 (숙종, 영조때 정비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1457년 11월, 금성대군이 죽고 한 달 뒤, 단종 또한 죽게 됩니다. 그 소년의 나이는 17세였죠.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는데, 세조가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라는 말에 영월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한 한달 동안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한 채 방치가 되어 새들이 시신을 뜯어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 그 주변을 맴돌았다고 해요.
보다 못한 영월의 호장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자 가족들이 말렸는데 “왕이었던 분을 이리 대할 순 없다. 옳은 일을 하다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 며 아들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어머니를 위해 쓰려고 했던 관에 단종을 모시고 곡을 하고는 혹독한 겨울산을 뚫고 올라가 얼지 않은 땅을 찾아 묻어주었는데 그곳이 지금 단종이 묻혀있는 ‘장릉‘이라고 합니다. 그 후, 혹시 모를 세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떠났는데, 사실 영월사람들은 그가 용기 내어 단종의 시신을 묻어주었다는 것도, 그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해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단종 편에 섰던 사람과 그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형(누나의 남편)인 정종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다가 단종이 죽고 4년 뒤, 승려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거열형에 처해졌고, 금성대군처럼 시신이 수습되지 못해서 훗날 경혜공주 묘 옆에 가묘(고인의 시신이 실종되거나 훼손되어 없어졌을 때,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빈 무덤)를 만들어놓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종에게 충성을 다했던 혜빈양씨의 아들인 한남군은 유배지에서 죽었고, 영풍군은 세조가 보낸 이들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금성대군, 이보흠과 함께 복위운동을 계획했던 화의군은 어머니인 영빈김씨와 함께 익산에 유배되어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등, 단종을 위해 죽은 충신들의 가족들은 모두 공신들의 노비가 되어 사람대접도 못 받고,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했는데, 세조의 악행은 자기 친형제들에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보통 남자 자손은 죽이고 여자들은 첩이나 성노예로 보내지는 것이 보편적인데, 금성대군의 아들은 살려주어 그의 부인, 딸과 함께 노비로 만들어 갖은 모욕을 주며 처참한 삶은 살게 했습니다.
안평대군의 경우, 남자 자손을 절멸시켜서 대를 잇지 못했습니다. 안평대군의 며느리 또한 노비로 만들어 공신 권람의 성노예로 살게 되죠. 친동생의 자식이자 자신에게는 친조카이고, 친동생의 며느리이자 자신에게는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람들을,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직계 손주, 손녀, 며느리들을 모두 공신들에게 나눠 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입니다. 이들은 왕족의 가족에서 하루아침에 노비로 떨어진 것이었죠. 단종 외의 세조의 또 다른 조카들도 불운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후에 복권이 되고 안평대군이 죽은 지 200년 후쯤, 영조의 명으로 금성대군 후손이 안평대군에 입적하여 대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단종의 부인들도 험난한 인생을 산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의 폐위와 함께 정순왕후도 서인으로 강등이 되어 입에 풀칠하고 살기 힘들어지자, 서민도 힘들다고 하는 염색업을 하며 힘들게 살았는데 세조 말년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세조가 주는 돈은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후에 경혜공주와 정종의 아들인 정미수가 정순왕후의 수양아들이 되어 그녀를 돌보며 살게 됩니다.
숙의 권씨는 아버지가 처형당한 후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였고, 하루아침에 왕의 후궁에서 공신의 노비가 되어 비참하게 살았죠. 10년 뒤 세조가 그녀를 해방시켜 주지만, 세조의 공신이자 그녀의 친척인 권람이 그녀의 부모가 남긴 재산을 모두 빼앗아한 푼도 돌려주지 않자 구걸을 하는 등, 평생 가난하게 살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종은 17살에 죽었지만 그의 세명의 부인들(정순왕후, 숙의 권 씨, 숙의 김 씨)은 모두 80대까지 살아서 사람들은 남편의 짧은 생을 부인들이 대신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죠.
자신의 혈육에게도 한없이 무자비했던 세조는 자기편에 섰던 형제들이나 공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막 나가도 눈감아 주었습니다.
제일 심했던 사람은 홍윤성이었는데 아녀자를 겁탈하거나 양반집 규수를 마음대로 자신의 첩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에게 벼슬을 부탁하러 온 숙부를 죽여 땅에 암매장을 시키는 끔찍한 일을 하는데도 세조가 눈감아 주는 것도 모자라 벼슬을 올려주기까지 합니다. 백성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았고 이를 되찾기 위해 온 사람들을 때려죽이기도 하고, 군량미 30석을 횡령하는 등의 일을 하자, 참다못한 세조가 숙부를 죽인 죄까지 더해 참형에 처하겠노라고 하니, 홍윤성은 전하께서도 형제와 조카를 죽였으면서 저에게 왜 그러시냐, 하니 배짱이 좋은 놈이라며 웃어넘겼다고 합니다.
세조의 이러한 봐주기로 인해, 공신세력의 힘은 나날이 커졌고 자신의 후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들로 인해 후대 왕들이 골머리를 앓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 시절 일어난 갑자사화 때 폐비윤 씨와 관련되어 참형을 당한 이들이 대부분 단종과 그의 측근을 처참히 짓밟은 계유정난 공신들의 후손들이라 (한명회와 정인지 등) 연산군이 단종의 복수를 대신해주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반면에 신숙주는 폐비윤씨 사건 이전에 죽어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정인지 초상 (갑자사화때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사육신을 배반한 김질의 후손인 김자점도 효종 때 역모 혐의를 받아 집안이 풍비박살이 나서 사육신의 자손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족과 후손들도 노비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홍윤성은 친자식이나 양자가 없었기에 그대로 대가 완전히 끊겼고 그에게 당했던 백성들은 그의 묘에 가서 비석을 부시는 등 묘가 남아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도 홍윤성 무덤에 볼일을 보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많은 피바람을 내어 업보를 쌓았던 세조는 재위기간 동안 문둥병으로 인해 피부가 썩어 문들어지는 괴로움에 발버둥 쳤고, 장남인 의경세자는 20살, 둘째 예종은 재위 1년 만인 19살에 죽어서 조선 왕 중, 단종 다음으로 빨리 요절한 왕이 되었죠.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도 2살에 요절을 합니다. 의경세자가 죽을 당시 세조는 자신이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 죽자 슬픔에 잠겨 곡기를 끊을 정도였고, 부인인 정희왕후 또한 아들의 초상화를 보며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식과 후손들이 무덤도 순탄치 않았는데, 세조의 아들 예종의 창릉은 인조 때 봉분(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에 화재가 두 번, 영조 때는 정자각이 불타 재건하였고, 고종 때도 봉분이 다시 두 번이나 타는 일이 발생합니다. 손주와 손주며느리인 성종과 장현왕후가 있는 선릉과, 증손주인 중종이 있는 정릉은 임진왜란 때 도굴을 당하면서 시신이 없어졌는데 결국 찾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성릉과 정릉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이 없고 빈 무덤만 있는 상태입니다.
반면 단종의 무덤은 숙종 때 노산군에서 노산대군, 그리고 왕으로 복위가 되면서 장릉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리를 옮기려고 했으나 엄흥도가 묻어준 그 자리가 최고의 명당이라 하여 옮기지 않아서 유배지에 묻힌 유일한 왕릉이 되었죠. 장릉은 다른 왕릉보다 작고 간소하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잘 어우러져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장릉이 간소한 이유는 폐위 되었다가 복위된 왕이라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서 병풍석, 무인석, 난간석은 제외하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단종시대에는 충신, 배신자, 기회주의자, 간신 등 다양한 면모를 인물이 나옴으로써 인간의 본질적인 내면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세조가 자신의 저지른 업보를 제대로 돌려받았다고 하고, 어떤 분들은 조선 27대 왕인 순종까지 모두 세조의 후손이니 최종 승리자가 아니냐, 본인이 저지른 업보보다 벌을 너무 적게 받은 것이 아니냐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업보는 돌아온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로 인해 만들어진 괴담, 야사, 전설을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