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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락 Apr 11. 2023

흐린 봄비가 내리면 밀라노가 떠오른다

흐린 날씨도 좋은 날씨가 될 수 있을까



저는 흐린날이 좋아요.

누군가에겐 흐린 날씨도 좋은 날씨예요.

좋다는 건 상대적인 거거든요.



언젠가 캠퍼스를 거닐다 어둑어둑 흐린 구름이 하늘을 덮쳐올 때, 함께 걷던 후배가 들려준 말이다. 이 말이 퍽 인상적이어서, 이따금씩 이렇게 대낮에도 사위가 어두워지고 옷깃을 여며도 막아지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그 날 후배와의 대화를 떠올리곤 한다.








신경생물학적으로는 흐린 날이 우리의 기분을 슬프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설명된다. 낮에 햇볕을 충분히 많이 쬐고,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에서 생활하면 멜라토닌(생체리듬을 조절해주는 호르몬) 농도가 잘 조절되어 밤에 잠도 깊이 잘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한다. 또, 햇빛샤워를 받으며 5분 정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 호르몬이라는 세로토닌이 생성돼 우리의 기분을 한결 상쾌하고 행복감 있게 도와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관련 내용 : 하이닥, 원더풀마인드)



그러니까 오늘처럼 날이 우중충하고, 시커멓게 구름이 끼고, 싸늘한 비바람이 몰아칠 때 우리 중 누군가가 우울해한다거나 유난히 기분이 흐릿해 보여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더군다나 그게 여행중일 때라면.








2015년 겨울과 봄 사이

밀라노는 온통 구름이고 내내 비였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당시 나는 한 외국계 뷰티 회사에서 파견 용병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본사로 복귀해 새로운 팀으로 팀을 옮긴 상태였다. 파견 나가 있는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탓에 아무 생각 없이 회사로부터 날 좀 멀리 떨어트려 놓은 채로 유럽 도시를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도착 첫 날부터 엉망이었다. 비행시각도 예정보다 딜레이 되고, 말펜사 공항에서 밀라노 도심까지 들어오는 고속버스는 엄청난 트래픽잼에 갇혀 예상 시각보다 한참은 더 걸린 끝에 날 캄캄한 밀라노 중앙역 측면 어딘가에 내려주었다.


분명 중앙역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는 호텔을 예약했는데 도무지 호텔 싸인은 보이지 않고, 깜깜하고 추운 밤의 밀라노는 지구 반대편에서 12시간 날아온 날 반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구글맵을 켜고 간신히 숙소에 돌아와 짐꾸러미를 내려놓으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폭 나왔다.


줄기차게 비가 내리더라도, 이 여행은 '좋은 기분으로' 계속 돼야만 한다. 어떻게 얻어낸 장기휴가인데. 내가 지난 몇 개월간 얼마나 갖은 수모를 헤쳐왔는데!





이튿날은 미리 한국에서 예약해두었던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교회를 다녀오며, 근처 재래시장이 열린 것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곳 다 비슷하구나, 여기 사람들은 이런 채소랑 과일을 먹고 사는구나 -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시장이나 마트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때로는 유명 관광지나 유적지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즐거웠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아침부터 발끝을 적시는 와중에,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고 지나가는 이들의 기분을 잠깐 산뜻하고 향긋하게 채워주는 꽃집도 마음에 새겼다.







2박 3일 내내 우산 없인 못 다닐 정도로 비가 퍼부었던 건 정말이지 너무했다. 명색이 패션의 도시인데, 패셔너블한 사람들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우중충한 밀라노였다.



그래도 '무언가가 좋다'고 기억되는 건 내 기억필름이 여행에 예쁘게 추억보정필터를 씌워서만은 아닐 거다. 고된 파견직 수행 후 떠났던 혼자만의 여행.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영어를 못하는 노부부께서 친절하게 길 찾는 걸 도와주었던 일, 갓 내린 진하고 따끈따끈한 에스프레소, 나빌리오 지구에서 즐겼던 해피아워의 시끌벅적하고 흥겨웠던 맛.



그런 스치듯 자그마한 장면들이 지겹도록 우산을 접었다 펼쳤다 해야했던 밀라노 여행을 봄비처럼 잔잔하게 기억하게 해준다. 오늘처럼 온종일 흐린 봄비가 내릴 때면, 여지없이 밀라노에서의 짧은 여정이 떠오른다.






흐린 날씨에 기분을 침범당할 위기라면, 흐린 날이지만 괜찮아 - 하며 요리조리 마음을 움직여보자. 활짝 봄이 피어나려고 봄비가 온다. 모두에게 더 없이 좋은 봄날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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