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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 Mar 18. 2023

영화를 자주 보고 싶다

2022.09.26

언젠가부터 영화를 보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영화관에서든, 집에서든. 영화관에 발길이 뜸해진 건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그 와중에 코로나까지 유행해서였을 것이다. 대중교통 접근성이 낮고 한국어 자막 따위 기대할 수 없는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한국에 와서도 굳이 영화관을 가지 않게 되었다. 2019년 8월 <엑시트>를 보고 처음으로 영화관에 간 게 2021년 9월에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보기 위해서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미국 영화관은 딱 두 번 가 봤는데, 그것도 모두 코로나 전의 일이다.


한편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쉬운 적이 없었다. 최소 한 시간 반 이상의 시간을 떼어 둬야 하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알림이나 일의 방해를 받지 않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영화 볼 시간은 없다면서 더 짧은 드라마 감상이나 SNS를 몇 시간이고 하고 있으니 그다지 합리적인 변명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드라마나 SNS와 달리 영화는 유독 한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만 제대로 감상했다는 기분이 드는 걸 어쩌겠는가.


이런저런 이유를 댔지만, 사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건 내가 영화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내게 영화는 이해하고 느끼기 어려운 매체이다. 나는 글의 행간과 핵심을 읽는 문해력에 비해 영화를 보는 데 필요한 문해력은 약한 편이다. 영화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 서사를 연출을 통한 은유로 암시하는 경우가 많고, 기승전결이 전환하는 지점마저 뚜렷하지 않다. 빠르고 명확하게 요점을 파악하고 싶어 하는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난해한 영화를 볼 때마다 작품을 머릿속으로 요약하려는 시도 때문에 집중해서 감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음악이나 영상미, 혹은 배우의 연기가 아무리 좋아도 서사나 주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 추상적인 감정 덩어리만 마음속을 돌아다니는 상태가 영 답답했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영화와 잘 맞지 않고, 영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영화보다 드라마를 한결같이, 제법 강경하게 선호했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한 편의 영상에 모든 내용을 함축하지 않고 여러 회차에 걸쳐 오래오래, 차근차근 풀어낸다. 인물과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를 ‘설명’ 해 주는 덕분에 즉각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감상을 언어화할 수 있다. 집중할 시간을 애써 확보하지 않아도 되고, 한정된 시공간에서 이야기를 전할 의무도 없는 매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하리만치 드라마의 긴 타임라인보다는 영화의 한정된 시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자취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더 쉽게, 많이 지치기 시작했다. 콘텐츠 시청은 여가의 이름을 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보는 일은 쉼인 동시에 노동이기도 하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니 10화 남짓밖에 안 되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 꾸준히 흥미를 가지고 끝까지 볼 자신이 없어져 새로운 드라마 또한 쉽게 시작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드라마를 선호했던 이유는 드라마를 보기 어려운 이유가 되어 갔다. 그래서 차라리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드라마든 영화든 보기 전후로 품이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라면, 정주행 할 필요 없이 한 편만 보고 끝장을 낼 수 있고, 한번 시간을 내면 감상과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영화를 보겠다며 말이다.


이러한 변화를 실감할 무렵 극장에서 <탑건:매버릭>을 보았다. <탑건:매버릭>은 ‘러닝타임 안에 끝장을 보는 엔터테인먼트’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속편이기 때문에 정주행이나 세계관 이해가 필요하지 않고, 정신력을 소모하지 않는 수준의 갈등과 긴장만을 선사한다. 전투기 비행 장면이 주는 스릴, 석양 아래 비치발리볼 장면의 경쾌함 등에서 이 작품의 연출이 ‘쾌감’ 하나만을 위해 의도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제일 피곤한 수요일 아침 회사에서 보러 간 거였지만, 극장을 나온 내게는 130분짜리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온 듯한 짜릿한 여운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영화관 상영이라는 한정된 시공간에서 감독이 의도한 심상을 ‘때려 넣어주는’ 경험을 맛보았고,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주 주말에 한 번 더 극장에 갔다. 그리고 그때 본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었다.


<박쥐>나 <아가씨> 등 감독의 전작을 본 적 없는 내게 <헤어질 결심>은 대책 없이 당혹스럽지만 흥미로운 영화였다. ‘엄마 원전 완전 안전’이나 ‘서래 씨는, 몸이, 꼿꼿해요.’ 같은 난해한 유머와 강박적으로 치밀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이 동시에, 숨 쉴 틈도 없이 펼쳐졌고, 그 생소한 경험이 거북하기보다는 재미있었다. 물론 두세 개의 플롯이 엮여 있고, 인물의 감정 변화와 서사 역시 암시적인 영화적 장치에 크게 의존했던 만큼 결코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관을 나와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니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요소들도 많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 영화를 제법 좋아하는 듯했다. 이 작품을 완벽히 이해하거나 인물의 관계나 서사에 벅차오르게 감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사람들의 감상 후기와 영화를 소개하는 팟캐스트 등에 손을 대고 있었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듯, <탑건:매버릭>과 <헤어질 결심>은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작품이다. <탑건:매버릭>은 단순한 서사와 원초적인 쾌감에 치중하는 반면, <헤어질 결심>은 두세 개의 서사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고, 대사와 소품, 인물의 사소한 언행이 그들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암시한다. 하지만 두 작품은 모두 영화라는 매체로서 특정 심상을 연출하는 데에 충실하다. 드라마가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정보를 설명’함으로써 시청자의 감상을 이끌어낸다면, 영화는 대사, 조명, 미술, 음악과 같은 연출이 특정한 ‘심상을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탑건:매버릭>의 해변 장면이 줄거리에서 중요하진 않지만 경쾌한 음악과 황금빛 석양, 잘난 외모의 배우들로 원초적인 쾌락이라는 심상을 전달하고, <헤어질 결심>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해준과 서래의 자잘한 대사, 서로를 만나고 일어난 변화 등을 통해 개인을 붕괴시키는 사랑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와 서사에 대해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서사를 전달하기에 유용한 매체가 아닌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줄거리를 요약해 보라 그러면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못해요. 왜냐하면 그건 영화가 그걸 위한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죠.” ('최종 해석'도 '완전 요약'도 아닌, 영화를 영화로 보는 마음 with 김혜리 기자 - 유튜브 겨울서점 (https://youtu.be/c2SYLyik3wo))


영상 제목처럼 과거의 나는 무심결에 영화의 ‘최종 해석’ 또는 ‘완전 요약’을 찾아다닌 것 같다. 하지만 영화의 파편이 전하는 심상을 느끼고 나니,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 꼭 그것을 해석하고 요약하진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서사와 주제의식에 미련을 버리니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심상을 연출을 통해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눈길이 갔고, 그제야 감상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 영화도 재밌었다, 좋았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영화를 대하는 마음이 어렵기보다는 한결 편안해졌다… 마침내.


결국 영화감독은 관객들에게 ‘썰’을 풀기보다는 심상을 추상적일지언정 직관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게 아닐까? 쾌감, 애정, 상실감, 불안, 열정 같은 심상을 전달할 매개로서 서사가 만들어지고, 인물의 행동이 결정되고, 음악과 미술이 더해지고 그렇게 연출된 장면들이 엮여 만들어지는 유기체가 영화가 아닐까. 그래서 인물이 아무리 과장되고 허무맹랑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서사의 합리성이 아닌 심상을 전달하기 위한 연출임을 고려하면 그렇게 개연성 있고 설득력 있을 수가 없다.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가 한 행동 매우 극적이지만, 138분의 러닝타임 동안 촘촘히 쌓아 올린 연출의 파편 덕에 관객도 그 결정의 연유를 쉽게 납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연출이 만들어낸, 바깥세상과는 유리된 한정된 시공간, 은유가 공용어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의 개연성, 합리성은 우리가 발 붙인 현실과는 미묘하게 다른 듯하다.


올해 나는 두 작품 이후로도 서너 편의 영화를 더 봤다. 어떤 작품은 집에서 보기도, 어떤 작품은 영화관에서 보기도 했다. 하나같이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 또한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일어나지 않을 법했다. 하지만 연출의 파편을 곱씹는 일, 즉 뭔가를 했다, 이래야 한다라는 문장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마음, 이러이러한다는 것 같은 명사로서의 심상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영화를 집중해서 볼 환경을 만들기란 쉽지 않고, 티켓 값은 날로 올라서 극장에 자주 가기도 어렵고, 나의 영화적 문해력은 아직도 비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정된 시공간을 계속해서 찾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영화가 전해주는 심상을 느끼고, 온전히 집중하고, 휴식을 취하는 행위를 좋아하게 되었기에. 그렇기에 비록 미숙하더라도 자꾸 영화를 보고, 그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다 나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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