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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쌤 May 14. 2020

밥벌이의 끝은 죽음뿐인가?

조정진의 <임계장 이야기>를 읽으며

  원격 수업을 진행하며 현장과 괴리되는 관계 부처를 향한 답답함과 비난의 화살이 오롯이 학교로 모이는 모습에서 서글픔을 느끼다 보니 글을 잠시 멀리했었다.     


  물론 이따금 열심히 수업 듣는 아이들이 남긴 비공개 질문에 긴 답을 하면서, 동료 선생님들과 원격 수업을 준비할 때 어떤 기기를 활용하는 게 좋은지, 어떤 어플이 수업 영상 촬영에 도움이 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답답함과 서글픔에 조그마한 창 하나 낸 기분으로 행복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작은 창 하나로 환기가 원활히 될 수는 없는 일이고, 여전히 답답한 시국이 계속되고 있다. 시류에 몸을 맡기며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야지 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그런 와중에 답답함과 서글픔을 분노로 뒤바꾼 사건이 생겼다.


  사회적 약자, 속칭 ‘을’. 나 역시 고용 불안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을’로 지칭되는 계약서를 써보았다.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부끄러웠고, 마냥 슬픈 일이 아닌데도 슬펐다. 계약서를 들고 조용히 교무실 자리에 앉아 읽어보니 ‘갑’이 나를 손쉽게 내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인지하며 등골이 서늘했던 기억도 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방학 중 방과후학교 수업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동교과 교사들도 자기들은 무슨 연수를 들어야 한다는 둥, 힘들다는 둥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연수를 듣지도 않고, 힘든 척도 할 수 없는 나와 다른 기간제 선생님은 역시 웃으며 방과후학교를 하겠다고 했다. 아직도 그들의 웃음과 방학에 수업할 수 없는 이유들이 기억나는 것은 그때 내가 ‘을’로서 서글펐기 때문이리라.     


  아파트 경비일을 하시던 분이 삶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토끼 같은 자식을 두고 어떻게 눈을 쉽게 감으셨겠냐만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항거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목숨을 건내셨으리라 본다.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롭고 허망하며 모멸감에 가득 찼을까를 생각하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자꾸만 흘러 생각을 멈추게 된다. 하지만 생각을 멈춘다고 끝난다면 다행이련만 자꾸만 관련 기사를 보고만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시간이 지나며 취재된 내용들은 깊어져만 갔고, 철자는 다 틀린 삐뚤한, 그러나 한 자씩 꾹꾹 눌러쓴 그의 글을 기사의 사진으로 접하며 세상에 대한 혐오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임계장 이야기>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공기업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하다 퇴직을 하고 여전히 돈을 벌어 살아내야 하는 삶을 위해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길을 택한 분이 임시 계약직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었다. 




  신분제는 없어졌다 하지만 인간의 천박한 습성은 그대로 남아 있어, 너와 나를 위와 아래로 나누는 태도는 고압적이기까지 했다. 더럽고 궂은 일을 한다고 하여 사람이 더럽고 궂은 것은 아닌데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는 언사를 듣기도 했다. 높으신 분의 아내는 역시나 높으신 분이라 경비를 하대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호루라기를 부는 경비따위는 손짓 하나로 해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계장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천박한 습성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임계장은 철저한 ‘을’이었고 늘 죄송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네, 그럼 쓰레기를 현관에 버리시더라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놓으세요. 제가 갖다 버릴게요.”

  “아저씨. 난 그런 거 어디서 파는지 모르니까 아저씨가 사서 버려 주세요. 돈 드리면 되잖아요? 1000원이면 되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다.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하나를 내던지고는 이내 티볼리를 몰고 사라졌다. (...) 경비원을 시작할 때 선임자가 해준 첫 번째 충고는 주민과 다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다투면 항상 졌다. 내가 옳으면 주민은 항상 더 옳았다. (pp.68-69)     


  그 김갑두가 오후에 내 초소로 오더니 사과 한 알을 내밀었다. 

  ”이거 먹고 기죽지 말고 일 잘해. 내 말만 잘 들으면 오래 일할 수 있게 해줄게.“

  사과는 껍질이 쭈글쭈글하고 일부는 상해 있었다.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사과를, 생색까지 보태서 먹으라며 내민 것이다. 조금 전에는 내 무릎을 꿇려 눈물을 쏙 빼놓더니, 갑자기 온화한 어르신이 된 듯 힘내라며 내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pp.99-100 )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 가루가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p.122)


  오늘도 출근길을 나서며 아파트 공동 현관 앞 경비 초소를 보았다. 얼마 전, 분리수거 날이라 새벽부터 분리수거 정리에 매진하시는 흰머리의 경비 아저씨들을 보았다. 나는 보기만 한다. 용기 없이 보기만 하는 소시민이라 늘 부끄럽고 서럽다. 답답하고 서글픔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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