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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후회하지말자!

by 부소유

일요일 오후, 교보문고 광화문점 북뮤직 콘서트 ‘보라쇼’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삼십 년 넘게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서만 보아왔던 그 사람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배우 박중훈이 아닌, 작가 박중훈으로. 첫 에세이 <후회하지마>를 들고 독자들 앞에 선 그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화려한 무대 장치 대신 소박한 녹색 배경과 돌 장식만이 놓인 무대였지만, 그는 특유의 유머로 “이렇게 성의 없는 배경은 처음”이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거침없는 농담 속에서도 진정성이 묻어나는,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에는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작가 박중훈입니다”라는 인사가 여전히 낯설다고 했다. 십 년간 영화감독으로 살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배우 박중훈을 기억했고, 이제 작가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얻게 된 자신이 신기하다고 고백했다. 육십 년 인생, 배우 사십 년의 궤적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면서 그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감사였다고 했다.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 오백 명도 넘는다는 말, 배우는 결국 마지막 주자일 뿐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영혼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의 얼굴이 된다는 고백에서 그의 겸손함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계절에 있는지 물었다. 대한민국 평균 수명 팔십오 세를 기준으로 보면 자신은 가을, 그것도 늦가을쯤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을이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봄에는 추위와 싸우며 싹을 틔우려 몸부림쳤고, 여름에는 더 푸르게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자신을 괴롭혔지만, 가을이 되니 힘은 떨어져도 더 아름다운 색을 낼 수 있게 되었다고. 떨어지는 낙엽은 가벼워서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육십 년을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애정 어린 통찰이었다.


<후회하지마>라는 책 제목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진솔했다. 그는 이십 대부터 인생에 반성은 하되 후회는 없다는 철칙을 세우고 살아왔다고 했다. 반성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후회는 과거에 멈춰 서서 가슴만 치는 것이라고 구분했다.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지금 돌아보니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다고 고백했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는 그의 말은,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향한 따뜻한 격려처럼 들렸다.


책을 쓰면서 가장 큰 수혜자는 자신이었다고 했다. 강원도에서 홀로 새벽 서너 시까지 글을 쓰다 보면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했고, 과거의 자신을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육십 년을 정리하다 보니 미운 기억보다 고마웠던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고 했다. 자존감이 낮은 편이라는 그의 고백은 의외였다. 자신감 넘쳐 보이는 외양과 달리, 그 안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과정 또한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또한 자존감이 한없이 낮은 사람이지만 글쓰기로 그것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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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은 이방인의 뫼르소 처럼 살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처럼 속세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호밀밭의 홀든 콜필드 랍니다. 뭐 그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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