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음계, 삶의 사계
강연장에서 소설가 김애란 작가가 인간은 참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질문에 누군가가 대신 답해준 것 같았다. 그녀는 2020년 금환일식 날, 유튜브 생중계 댓글창에 올라온 수많은 인간들의 소원을 읽어주었다. “복권 당첨시켜 주세요”, “전 남편도 사랑해”라는 댓글들을 듣다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주적 장관 앞에서도 지극히 세속적인 소원을 비는 것이 우리였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묵직한 질문이 숨어 있었다. 왜 인간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기도하는가? 왜 최첨단 과학 시대에도 여전히 하늘을 보며 소원을 비는가? 김애란 작가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이상함이자 동시에 인간다움이라고 했다.
문학 읽기를 기반으로 한 강연 중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입동>의 한 장면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새벽녘 묵묵히 벽지를 도배하는 장면. “11월이네”라는 아내의 말에 “그러네. 곧 겨울 이불 꺼내야겠다”라고 답하는 남편. 이들은 거창한 위로나 의미 부여 없이, 그저 계절이 바뀌듯 일상을 이어간다. 김애란은 이 장면을 통해 “세상에 아이를 잃는 것만큼 큰 겨울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겨울, 그것도 ‘입동’은 추운데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뜻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 부부는 서로를 부축하며 일어선다. 벽지에 묻은 복분자 자국을 지우듯, 상처를 덮어가며 살아간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국 사회가 겪어온 수많은 ‘겨울’을 떠올렸다.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참사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입동을 견뎌왔던가. 그리고 그때마다 누군가는 합창단을 만들어 참사 현장을 찾아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글을 썼으며, 누군가는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도한 생활>에 등장하는 시골 칼국수집의 피아노 이야기 또한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동네 어른들이 국수를 먹는 가운데 어린 소녀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 그 부조화스러운 풍경이 오히려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낮은 음이 높은 음보다 더 오래간다”는 피아노의 원리를 통해 삶의 진실을 포착한다. 웃음 뒤에 깔린 슬픔, 일상 속에 스민 애잔함. 그것이 바로 우리네 삶의 낮은음이다.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도히 우는 건 아닐까”라는 작가의 물음은, 결국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독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ChatGPT와의 대화 에피소드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너는 수많은 작가들의 무덤 위에 핀 꽃이구나. 부채감이 없는 꽃”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AI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학습했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없다. 죽음도, 상실도, 고통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역설적으로 인간 고유의 가치를 증명한다. 우리가 쓰는 글, 부르는 노래, 나누는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의 절실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몸이 있어 비루하고, 몸이 있어 아프고 죽는” 우리이기에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강연의 마지막은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울먹이며 부르는 ‘알로하 오에’. 군인들은 그 노래를 듣고 비로소 총구를 내린다. “좀비는 노래하지 않으니까.” 이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극한의 슬픔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증거다. 그녀는 “슬픔 한가운데서 노래하는 존재는 인간이 거의 유일하다”라고 했다. 새도 노래하고 귀뚜라미도 노래하지만, 장례식장에서 노래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강연을 들으며 나는 계속해서 ‘계절’이라는 은유를 곱씹었다. 김애란이 말하는 인생의 사계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과 회복, 죽음과 재생의 순환이다. 봄처럼 시작하는 사랑이 있고, 여름처럼 뜨거운 열정이 있으며, 가을처럼 쓸쓸한 이별이 있고, 겨울처럼 혹독한 시련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겨울 다음에 반드시 봄이 온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겨울 한복판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간다는 사실, 눈보라 속에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김애란이 말하는 인간의 이상함이자 동시에 숭고함이다.
문학의 역할에 대한 그녀의 통찰도 인상적이었다. “문학은 자신의 무지를 아주 길게 고백하는 방식의 장르”라는 그녀의 말처럼, 좋은 이야기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는 것이다. 시리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라고 답한 것처럼, 때로는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일 수 있다. 그래서 문학은 당장의 구원이 아닌 형태로, 아주 느리게 일어나는, 거의 표도 안 나고 생색도 안 나는 형태의 도움이 된다. 행정 언어나 법률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의 결들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도도히 우는 사람들의 울음을 받아 적는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인간과 더불어 살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지어나가며 살고 싶습니다.” 이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바람이 바로 문학의 본질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이상한 존재다. 때로는 용기 있지만 자주 나약하고, 선하려 노력하지만 종종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렇게 겨울을 건너간다.
강연이 끝나고 나는 김애란이 인용한 ‘알로하 오에’의 가사를 속으로 되새겼다. “꽃 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지금이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라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봄이 오면, 아니 봄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노래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존재,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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