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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자리 10

by 부소유

양 소장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거실 불을 끄려다가 멈추었다. 은총이가 살아 있을 때는 거실 불을 끄고 잤다. 은총이가 어둠 속에서도 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하얀 눈으로도 이 집의 구석구석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열아홉 해를 같은 공간에서 살면 발바닥이 기억하는 지도가 생긴다. 현관에서 거실까지 몇 걸음, 거실에서 베란다까지 몇 걸음, 소파 앞에서 밥그릇까지 몇 걸음. 은총이는 그 지도를 걷고 또 걸으며 이 집을 자기 몸의 연장으로 만들었다. 그 연장이 끊어진 것이다. 집은 남아 있는데 그 집을 집으로 만들던 발자국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불을 끄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의 거실이 너무 넓어질 것 같았다. 은총이가 없는 거실은 같은 공간인데도 더 넓었다. 작은 것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모든 것이 커진다. 그 커진 공간을 채울 것이 양 소장에게는 아직 없었다.


양 소장은 거실 불을 켜둔 채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최 여사가 등을 돌리고 자고 있었다. 양 소장은 천장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은총이의 발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각사각. 거실에서 방문 앞으로, 긁적긁적. 문을 열어달라는 소리. 양 소장은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시계 초침 소리만이 어둠을 채우고 있었다.


양 소장은 눈을 감았다. 내일도 아침은 온다. 해가 뜨고 최 여사가 밥을 짓고 경비원이 인사를 하고 화단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릴 것이다. 아침이면 또 현관 앞을 내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은총이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상실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익숙한 자리가 빈 것을 확인할 때마다 작은 상실이 반복된다. 그 반복 속에서 사람은 천천히 빈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거실 한켠에 앉아 있는 작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따뜻한 것은 없을 것이다. 매일 저녁 아홉 시에 꺼내는 플라스틱 약통은 주머니 안에서 쓸모를 잃을 것이다.


양 소장은 주머니 속의 맨소래담을 손으로 감쌌다. 플라스틱 통이 체온에 의해 서서히 따뜻해졌다. 양 소장은 그 작은 온기를 쥔 채 밤 안으로 들어갔다. 은총이가 떠난 첫 번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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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은 이방인의 뫼르소 처럼 살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처럼 속세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호밀밭의 홀든 콜필드 랍니다. 뭐 그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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