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이 석유처럼 땅을 파면 나오는 줄 알고 살았다. 경제관념을 아예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내가 헐거워진 옷이나 부족하게 먹으며 자란 것은 아니다. 나 만큼은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였고 한 끼 굶지 않는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자식 하나 키우면서 그녀가 포기했어야 하는 것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으며,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엄마는 술집을 하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반 술집이 아닌, 양주를 팔고 웃음을 파는 그런 작은 동네 술집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매번 동틀 녘이 되어서야 들어오셨고 그런 상황이 어린아이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번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들이 학교에 참석하셔야 하는 학부모 회의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학부모 회의 용지를 주셔서 집에 간 후 식탁에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새벽까지 장사를 하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술을 많이 드신 탓인지 속이 좋지 않았고 밀려오는 구토를 참아가며 부모의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죄스러웠다.
또 고등학교 때는 불량한 기질이 발동해서 한강을 전전했다. 친구들과 불량한 짓을 하고 싶어서 청소년이 해서는 안 되는 음주를 했다. 한참을 마시다 가슴속에서 밀려오는 뜻 모를 억울함과 이 울분들을 터뜨리고 싶었다. 누군가 한 명 걸려봐라 라는 심산이었다. 그 당시엔 한강에서 많은 젊은 청소년들이 술을 마시고 서로 만남을 갖고 하는 식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시끄럽게 떠드는 한 무리를 발견하곤 시비를 걸고 패싸움을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출동했으며 그날 처음 경찰차를 탔다. 내가 먼저 상대를 때렸으므로 나는 경찰분들께 "내가 다 때렸으니 나만 잡아가세요"라고 이야기했다. 손에는 수갑을 차고 뒷 자석에 타게 되었다. 이날 경찰차의 뒷문이 안에서는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거의 다 도망갔는데 한 친구가 같이 말없이 타줬다. 고마웠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무분별한 폭력은 지탄받아야 될 문제이기에 비난도 규탄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지구대에 도착한 후 경관님이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니 부모님 전화번호를 말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하염없이 언제 오나 걱정만 하는 그녀를 생각하니 죄스러웠고 어리숙한 내가 죽도록 미웠다.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조서를 쓰고 큰돈을 물고 합의를 하고 끝냈던 것 같다. 이런 일들이 생겨나면 생겨날수록 자격지심에 빠졌으며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는 날들은 점점 더 늘어갔다.
또 어릴 적 한 번은 집이라고 형용하기 힘든 그런 집에서 몇 달 산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도 돈을 못 내서 쫓겨났던 기억이 있다. 그 집은 판자로 덧댄 방 한 칸과 부엌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난방도 없었던 집이었다. 그 집에서 쫓겨난 후 막내 이모 집에서 얹혀살았다. 그때는 어린 나이라 이런 것이 부끄러운 줄 몰랐고 또 시골이었기에 한집 건너면 다 그저 그런 형편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7번의 전학 끝에 우리 집은 서울로 자리를 잡게 되고 나는 잠실에 있는 부자들이 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주제를 이때부터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팍팍했다. 반지하에 살았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쥐가 제 집인 양 들락날락거렸다. 화장실은 아주 좁았고 한 평이될까 말까 한 공간에서 씻고 일을 보았다. 벽에는 항상 곰팡이가 서려 있었고, 무엇보다 집이 굉장히 좁았다.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꿈을 가졌다. 그게 서울이라는 큰 물의 힘인가 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축구가 하고 싶었다. 그것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배우고 싶었다. 왜 일본이었냐면, 그 당시 '캡틴 츠바사'라는 일본 만화가 굉장히 유행했었기 때문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너무 멋있어 보였다. 겉 멋이 든 것이다. 그래서 무작정 졸랐다. "일본 가서 축구하고 싶다고!!" 그걸 못해주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아렸을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지금 당장 집세 내기에도 벅찬 생활에서 몇 백만 원이 들어가는 유학을 가서 축구를 한다니.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부자들의 자녀들도 다니는 초등학교였다. 그래도 그때는 아이들이 순수했기에 지금처럼 왕따라는 그런 현상을 그리 자주 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친구들을 여럿 사귀면서 친구들의 집에 초대도 받고 생일 파티에도 초대를 받아서 가게 되었다. 한 친구가 생일 파티를 피자헛이라는 곳에서 했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정말 ‘헛’ 소리 나오게 부러웠다.
한 번은 친구네 집에 새로 나온 게임을 하러 놀러 가게 되었는데, 게임을 좋아하던 내 마음은 콩닥였다. 그 게임의 이름은 '디아블로' 시대를 풍미했던 게임이다. 아무튼 엄마는 항상 내게 어디 가서 인사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다녀라라고 말씀하셨고 나도 그 뜻에 동의했다. 친구집에 도착해서 주방에 계시는 친구 어머니께 "안녕하세요!" 인사들 크게 드렸다. 그런데 반응이 시원찮았다. "어,, 어 그래" 난 속으로 조금 속상했지만, 친구 눈치를 보며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속상함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방에는 디아블로가 기다리고 있다고!' 게임에 눈이 돌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게임의 세계에 빠져있다가 친구가 음료수를 먹자고 하고 거실로 나갔는데 옆 방에서 문을 열고 다른 아주머니가 나오신다. 한눈에 봐도 부잣집 귀부인처럼 입으신 분께서 "어머, 아들 친구가 놀러 왔구나? 어서 오렴" 이때부터 머리는 어리둥절, 안절부절이다. '어떻게 된 거지?' 상당히 헷갈리는 상황에 친구가 말한다 "우리 엄마야" 혼란한 소년은 어리둥절한 채로 멍하니 있다가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채 집으로 갔다.
문득 커서 생각해 보니 그분은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충분히 착각할 만한 상황이지 않나? 그때는 그랬다.
이런 내게도 희망이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청년 시절을 보내고 점차 나아지는 듯, 나아지지 않는 삶의 연속이었다. 월세방을 전전하는 생활은 이어졌고,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생활고는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전기세를 몇 달 밀려서 전기가 끊긴 적도 있었고, 하루에 한 끼, 육개장 컵라면 하나만 먹고 버틴 적도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세탁기가 공용인 월세방에서 살기도 했다. 그런 생활에서 내게도 꽃이 피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왜 평생의 짝을 만났을 때 그 사람 뒤에서 후광이 보인다고들 하던데 그때가 그랬다.
우연히 만났고 그날 보자마자 사랑은 사치였던 내게 사치가 아니게 되었다. 아니, 아니고 싶었다. 가난도 이기는 사랑이라,, 첫날 집에 바래다주고 집이 가까웠던 우리는 다음번 만나기로 했다.
그 당시엔 밴드 보컬을 하고 있었는데 컨셉상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수염까지 기른 상태였다. 게다가 내가 가진 옷 가지들은 전부 올드하고 후줄근해서 봐도 봐도 꼴 보기 싫었지만 만나는 날짜는 다가오고 부족한 총알은 만나는 비용에 쓰기도 벅찼다. "일단 가진 것 중 최선의 선택을 해보자" 하고 깔끔하게 입고 나갔지만 그날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처절함을 느꼈다.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드니 자신감이 생길 수가 있나.
만남을 마치고 잘 들어갔냐고 연락을 했는데,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가끔 바뀌는 그 사람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볼 때면 바보같이 설레었다. 그러고는 또 와르르 무너졌다. 몇 번을 그랬을까.
하고 있던 밴드도 해체 한 마당에 그녀를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수염을 싹 정리했다. 부족한 총알은 치킨 집에서 열심히 치킨을 튀기며 한 푼 두 푼 아껴모았다. 그렇게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치고 승부를 보고 싶었다. 우연히 연락을 했는데 나쁘지 않게 받아 주었고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 당시 TV 프로그램 중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가 꽤나 핫 했는데 TV도 없던 내가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열심히 이야기할 화젯거리와 성대모사를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이 좋아하던 볶음 쌀국수를 먹으러 갔다. 그렇게 만난 우리,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내게 빛이었고 희망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뜨거운 용암도 뛰어넘고 저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 수 있는 마음과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참 신기하다. 어떤 연구에서 사랑의 유통기한은 3개월이라고 했던가? 유통기한이 지나고 그 사람이 나만의 것이라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 마음에 스며들고 그렇게 우린 불행한 만남을 이어갔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내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 했기에 점점 어려운 관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 마음속엔 아직도 그 사람은 나의 빛이며 희망인데, 그 사람을 대할 땐 왜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은 흐르고, 일자리를 노력해서 얻어내고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지만, 그 사람의 마음속엔 이미 내가 없었다. 마지막 그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오빠는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야."
헤어짐 이후 찌질하게 수 백번 정도를 연락했던 것 같다.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다. 헤어진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 하지만 그 사람을 통해 본 세상이 나를 변화시켰다. 헤어짐의 아픔을 견뎌낸 후 조금씩 나에게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작지만 무언가를 성취하기 시작했다. 수영 대회에 참가하고 메달을 받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책을 사서 읽게 되고 그런 작은 소소한 성취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 들이 줄어들었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기에.
그렇게 작은 것들이 조금씩 커질 때쯤, 난 달리기를 만났고, 삶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물론 긍정적으로 말이다. 삶의 구석에서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달리기를 통해 더욱 빛나게 닦아내었더니 삶이, 내게 말을 걸었다.
“빛이 보이면 희망을 품고 그 빛을 향해 걸어가, 그럼 언젠가 네가 원하는 그 빛을 품을 수 있을 거야.”
아직도 구질구질한 삶은 변함없지만, 이제 잘 알고 있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과 한 없이 문질러서 빛나게 된 마음은 삶을 점차 더 빛나게 해 줄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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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외톨이 디렉터스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