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리지 않지만 저놈도 안 잘린다.
9년 동안 공무원을 하면서 휴직도 하고 복직도 하고 난리부루스를 추며 여러 부서들을 전전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잘리진 않았다.
공무원의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일 것이다.
내가 잘릴 일이 없다. 하지만 저 놈도 안 잘린다.
공무원은 안정적인 직업은 맞다. 우리는 그동안 IMF, 리먼브라더스 사태, 코로나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점이 그 특징인데, 굉장한 불안감을 가져다주며, 삶의 질 또한 크게 떨어트리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안감으로 인해 공무원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내 또래들 중에는 IMF 때 부모님이 다니던 회사, 사업이 순식간에 망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에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공무원의 또 다른 가장 큰 장점은 연금이었는데… 연금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모두가 우리 세대의 연금은 이미 다 물 건너갔고 없는 돈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탈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공무원 월급은 편의점 알바보다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공무원 보수가 작다고 한다. 이 단점을 연금이 유일하게 채워주고 있었는데, 이 연금이 바사삭 사라질 것이 불 보듯 뻔해지면서 이탈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큰 장점 중에 하나였던 연금이 산산조각 났음에도 공무원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안정성 때문 일 것이다.
내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거나 횡령을 한다는 등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이미 임용이 된 이상 정년까지 잘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마음의 안정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저놈도 안 잘린다는 것이다.
공무원 사회는 생각보다 좁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물론 공무원이라는 것 자체는 크고 기관, 업무, 직급, 직위에 따라 정말 다양한데, 보통은 한 기관에 들어가면 다른 기관으로 이동하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시청, 보건소, 교육부, 법무부, 국세청, 행정부, 소방, 경찰, 교정 등등 일단 생각 나는 곳만 나열해 봤는데, 훨씬 많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모두가 공무원으로 묶일 수 있는데, 기관과 기관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국세청 공무원이 경찰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임용되어 근무하다 보면 저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저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평이라는 게 매우 중요해지는데 한 사람에게 잘 못 보이면 그 그룹 전체에 나의 평판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리지 않지만 저 놈도 잘리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부서 간 이동이 많지 않고, 인원도 많지 않았다. 특히 나는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계속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동의 폭이 많지 않았지만
고비 풀린 망아지 같은 나의 운명 때문에 여러 부서를 전전하고 심지어 내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도 일했다.
이 정도면 사실 그냥 나가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가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일했다.
결국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한, 내가 잘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무슨 일이든 공무라는 것 자체에 보람을 많이 느꼈고, 책임감을 많이 느꼈으며, 그 느낀 책임감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일에 임할 수 있었다.
원래 나는 게으르고 덜렁대는 낙천주의적 성격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성격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일을 하다 보면 조그마한 실수도 큰 손해로 연결되고, 특히 해외일정 같은 경우는 외교에도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로 인해 촉각을 다투는, 피를 말리는 나날들이 계속됐지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면 그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비록 공무원이란 낮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을 어시스트하는 사람이라지만
나라는 사람이 쓸모가 있는, 필요한 사람으로 느껴지는데, 그 효용감은 나의 자존감과 행복으로 연결이 된다.
하지만 이 장점은 직업에서의 가치 중 돈이 중요한 사람, 주목을 받고 실력을 인정받고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점이 될 것이다.
최근 한동안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택하고 힘들게 임용됐으나 이내 후회하고 의원면직(퇴직)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체감상 10명 중 3명 정도였던 것 같다.
요즘사회는 특히 SNS나 인터넷의 발달로 누가 어떻게 얼마를 버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사회이다. 이로 인해 나도 초라해진 적이 없다면 거짓이다.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것도 사실이다.
하는 일에 비해 보수가 적은 것도, 사회의 존경을 적게 받는 것도,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이해할 수 없는 공무원 문화는 의원면직의 여러 이유 중 몇 가지 일 것이다.
10년 전과 다르게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정말 다양한 직업이 존재하고, 돈을 버는 방법도 많다. 또한 변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 공무원이 최고야!‘라고 하던 시대는 지났으며, 굳이 이 힘들고 인정도 못 받는 보수도 적은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는 공무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직업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가치관과 삶의 질에 대한 태도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공무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도 파이어족(경제적 자립을 토대로 자발적 은퇴하는 것)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살면서 발생하는 각종 비용은 내가 벌어놔야 하기 때문에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어떤 형태로든 일은 해야 한다.
이 말은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력이 없다면 하루 8시간이던 4시간이던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어 다른 직업들과 비교해 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가 일하며 느낀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비록 월급은 작다고 하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다 보면 월급이 밀릴 일도 잘릴 걱정도 없는 꽤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한다.
인생은 새옹지마이고 모든 것의 장단점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 어떤 곳에 내 마음이 더 치우치는지 잘 살펴보고 선택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