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왜 재밌었냐고!”
이게 무슨 소리지?
깜빡 졸았는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여러 명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더욱 놀랐는데. 여기가 지옥인 건가? 그러기엔 너무 사무실 같았고,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세련된 공간은 아니었다. 긴 유리 테이블을 마주 본 두 개의 낡은 가죽 소파에 여러 명이 몸을 구긴 채 앉아있었다.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사람들 얼굴을 한명 한명 바라봤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는... 감독인데, 이름이 뭐더라? 그 옆에 시니컬한 표정으로 앉은 젊은 남자는... 홍감독... 진짜 홍감독이라고?
“감독님?! 아니 왜 이렇게 젊어졌어요?!”
“네에?”
홍감독이 소리치는 날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야, 대표님이 물어본 말에 대답이나 해!”
내 옆에 앉아 반말을 지껄이며 노려보는 여자는... 내 상사였던 현팀장?
“팀장님? 팀장님도 죽었어요?”
어후... 긴 한숨을 내쉬는 현팀장이 짜증난 얼굴로 한마디 하려 하자
“너 진짜 죽고 싶냐?”
풍채 좋고 사람 좋아 보이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장대표였다! 잠깐만, 장대표님이라면 내 첫 직장 영화사의 대표님인데?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죄송한데... 지금이 몇 년도예요?”
“너 아주 정신 나갔구나? 2003년 아냐!”
현팀장이 인내심에 한계가 온 듯 소리쳤다.
“2003년요?!”
내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신기하게도 모두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짜증과 화를 참는 표정으로. 내가 일어나는 순간 무릎에 놓여 있던 종이 뭉치가 툭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그걸 줍는데, 홍감독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재촉했다.
“진미래씨, 제가 쓴 시나리오가 왜 재밌는지 말해 보시라니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주워 든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니 시나리오였다. 거기에는 감독과 글을 쓴 홍감독의 이름, 그리고 제목 <더 키친>이 적혀 있었다.
“<더 키친>? 참나, 이 영화 만들어진 지가 언젠데 시나리오 회의를 하...”
말을 내뱉다 거대한 해머에 뒤통수를 맞은 듯 아득해졌다. 지금이 2003년이라고? 설마, 20년 전으로 돌아간 건가? 에이 그럴 리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뺨을 세게 때렸다. ‘짝!’
“야! 왜 이래 진짜!”
당황한 현팀장이 소리쳤고, 난 아파서 온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20년 전으로 돌아왔다고? 그럼 내게 잘 살아볼 기회가 생긴 건가?
“흐흐.... 으흐흐흐...”
이쯤 되자 나를 보는 모두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쯧쯧, 작작 좀 처마셔라! 넌 대체 부하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장대표가 혀를 차며 현팀장에게 잔소리를 했다. 나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회의임을 그제야 자각하게 되었다. 얼른 정신줄을 부여잡고 두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는데.
‘<더 키친>이라면 홍민호 감독이 조감독이던 시절에 쓴 시나리오야. 회사 직원들 대부분 싫어했지만 나만 재밌다고 했었지. 반대가 많아서 이때 영화화되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 작가로만 참여했던 홍감독이 이 작품으로 감독 데뷔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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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미래씨는 빠지고...”
“아, 아뇨! 최근에 이 시나리오만큼 리얼하고 솔직한 대사는 본 적이 없어요.”
피곤해 보이던 중년 감독과 특히 홍감독의 눈이 반짝거렸다.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도시 싱글녀들의 솔직한 욕망이 키친에서 요리하면서 펼쳐지는 볼거리도 기대되고요. 여자들의 성적 욕망을 이렇게 세련되고 위트있게 표현한 한국 영화는 못 봤어요. ”
“그래?”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장대표의 귀가 솔깃해졌다. 어깨가 축 처져있던 홍감독의 얼굴에 비로소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조감독님이 발로 뛰면서 여자들 취재를 했으니까 대사 맛이 살아있겠죠. 그런데 저는 너무 리얼해서 불편했어요. 여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느낄걸요? 얘는 발랑 까져서 그런 거지.”
‘하, 이렇게 간다고? 중상 모략도 유분수지...’
현팀장의 말에 화가 난 내가 말대꾸를 하려는 순간,
“오PD도 불편하다고 하던데...”
장대표의 말에 놀라 생각이 끊겨 버렸다. 재수탱이 오PD? 맞다, 그 여자도 이 회사에서 만났었지!
“생각 좀 해보자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아, 형! 뭘 자꾸 생각해?”
외모는 대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 감독이 불안한 듯 장대표에게 매달렸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 좀 해보자니까?”
“형, 나 지금 이거 엎어지면 세 개째라고!”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대표에게 다가가는 중년 감독. 다른 사람들은 얼른 우루루 대표실을 나가버렸다. 나도 질세라 얼른 무리에 끼어 따라 나갔는데.
내 첫 직장이었던 영화사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책상과 의자, 파티션만 있는, 기억보다 살풍경한 모습이었지만 감개무량했다.
20대 청춘의 부푼 꿈을 품고 홀홀단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처음으로 입사했던 곳.
이 영화사는 성장을 거듭해 한국 영화계의 대들보 중 하나가 될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