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표는 식은땀을 엄청 흘리며
“우리가 뭐 이 영화 하나 찍고 끝날 사입니까? 흥분 좀 가라 앉히시고...”
장대표를 달래려고 애썼지만 어림없었다. 장대표 옆에 오PD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지대표를 노려봤다. 장대표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찍은 영화로 스타가 됐으면 특수관계 아냐? 지우야, 말 좀 해봐!”
지대표 옆에 말없이 앉은 정지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작품으로 만나시죠.”
“이유나 알죠?”
오PD가 뾰족한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없어졌어요. 대작 영화를 책임질 자신이. 부담감 때문에 요즘 계속 불면증 약을 먹고 있어요.”
얼굴을 찡그리며 힘들게 말하는 정지우를 오PD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더니
“설마 우리 회사 직원이 말한 헛소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라고 물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오PD를 쳐다보는 지대표.
“오PD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우리 프롭니다!”
“모르죠. 생각보다 팔랑귀 인지도.”
지대표가 어이없어하는데 팔짱을 끼는 오PD. 정지우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오PD님은 <자객>이 망하면 인기 잃고, 밥줄 끊어집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는 오PD.
“저는 그렇거든요. 게다가 집안에서 제가 가장이라... 신중할 수 밖에 없어요.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지우의 정중하고 그럴싸한 말에 뭐라 반박할 말이 없는 장대표가 오PD를 쳐다본다. 빠르게 태세 전환하기로 했는지
“지우 상황이야 내가 잘 알지. 그래 그래, 우리가 작품 하나로 끝낼 사이도 아니고...”
“대표님!”
억울한 듯 소리치는 오PD에게 그만두라는 눈치를 주는 장대표.
“뭐 원하는 장르라도 있어?”
장대표가 묻자 정지우 대신 대답하는 지대표.
“지우 부담이 큰 것 같은데... 예산 적고 시나리오만 좋으면 뭐...”
“이 회사에서 준비 중인 영화는 뭐가 있어요?”
“몇 개 있긴 한데.... 아직 검토 중이고, 지우가 출연할 만한 건 글쎄...”
표정이 어두워지는 장대표와 마찬가지 표정이 되는 정지우.
이때 장대표의 핸드폰이 울리자 상대를 확인 후 주위에 양해 구하는데.
“어, 백팀장, 지금 회의 중인데...”
백팀장이 하는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 소리치는 장대표.
“뭐?! 오케이 하신 거야? 남궁 대표님이!”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있는 장대표가 궁금해 죽을 지경인 오PD.
“왜, 또 무슨 일이에요?”
장대표가 불안한 표정의 오PD를 쳐다본다.
“어쩌냐... ‘시네마펀치’에서 <더 키친> 하고 싶댄다.”
“뭐라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오PD, 주변인들을 인지해 아무렇지 않은 척 털썩 주저 앉지만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시길래...?”
지대표가 궁금해하자 혀를 차는 장대표.
“그 녀석 진짜 촉이 있나... 홍보팀 막내 혼자 좋다고 하는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투자사가 하겠다고 해서...”
얼굴이 구겨진 오PD와 달리 눈을 반짝이는 정지우.
“그래요? 시나리오 좀 볼 수 있어요?”
“지우씨가 할 건 없어요. 여자 둘이 주인공이니까.‘
심술 난 사람처럼 말하는 오PD.
*
몇 시간 전, 백팀장은 본부장실로 불려 갔다.
남궁 대표와 달리 동글동글한 인상의 본부장은 영화사의 현장 PD로 오랫동안 일했지만 터프함이라곤 없는 편한 인상의 소유자다.
본부장이 <더 키친> 시나리오를 내밀며
“대표님이 진행 시키래.”
라고 말하자 백팀장은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빠른 속도였는데.
“이유도 말씀하셨어요?”
“시나리오가 신선하대. 홍민호 감독 과거에 찍은 단편도 검토했잖아? 작가주의 성향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런 사람이 매끈하게 상업 시나리오를 뽑았으면 잘 만들 거라고.”
“네에...”
뭔가에 홀린 듯 답하는 백영석.
“수고했어. 영화사에 콜 해주고.”
본부장실을 나온 백영석은 긴가민가 했던 작품이 남궁 대표의 눈에 들었다니 좋은 소식이긴 한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 떨칠 수가 없었다.
’설마 ‘시크릿룸’도...‘
그럴 리가 없지, 백팀장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이없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
“투자사에서 관심 있다는 거지, 하겠다고 도장 찍은 건 아냐!”
가시 돋친 말에 놀라 뒤돌아보니 오PD가 팔짱을 낀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영화 현장 스틸 사진을 수십 장 늘어놓은 채 분류 중이던 나는 일단 작업을 멈췄다. 긴장감을 숨기고 그녀를 마주 쳐다봤는데.
“정지우가 하겠다고 했지만 말 바꾼 것처럼.”
“지우씨가 말 바꾼 게 내 탓인 것처럼 와서 말하네요?”
“내가 널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뜬금없는 질문 공격에 움찔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저러지?